

페이트 제로 23화 기반, 일반인 대리 마스터와 길가메쉬
“시선만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지적해주지 않으면 맡은 바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녀석이었나? 서툴지만 여태 잘 해왔다 생각했는데, 이래선 시종으로 써먹을 수 없겠구나.”
그런 게 아니오라, 어색한 고어를 내뱉고 난 뒤 당황한 표정까지도 본능적으로 어려워하는 태가 난다. 누가 보아도 이 계집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혀를 차고 경이라도 칠까. 지고의 왕을 모시기로 작정하고 모셔왔으면 그에 상응하는 태도를 끝까지 갖춰야지. 입가에 대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계집을 바라보았다. 낮은 한숨을 토해낸 계집은 아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이었다. 전신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띄엄띄엄, 천천히 말한다. 마치 어린 계집의 말이 끝날 때까지는 유예를 주어야 할 것처럼. 영리한 방법을 쓴다. 이런 눈치가 있으면서 지금까지 내 수발을 드는 걸 이리 힘겨워했단 말이지. 유예를 줄 겸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른하게 기댔던 상체를 제대로 세운다. 그래, 어디 한 번 떠들어 보거라. 가진 담과 비례할 정도의 서툰 말재간이겠지만.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휘광이 너무 눈부셔서요. 이따금 쳐다볼 수 없어서.”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었다. 계집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의 인내도 끊어진다. 하루도 그냥은 못 지나치지, 이 작은 계집을 놀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 크게 웃어버렸다. 작은 공간이 떠나갈 정도의 소리였을 것이다. 계집은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내게 웃음을 멈추라는 어떠한 신호도 보내지 않았다. 웃던 것을 갈무리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두려움이다. 앞두고 있는 싸움의 크기를 마술사도 아닌 평범한 계집이 가늠하니 그렇겠지. 현명하다 생각했는데 이런 방면은 영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설마 하니 내가 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진 않겠지. 아니, 고작 라이더 하나에 눈동자에서부터 두려움을 표하니 큰 부상이라도 입을지 모른다 생각하나? 계집의 속이 궁금해졌다. 쉬이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한 심상이더라도 구태여 입에서 감정을 꺼내어 살펴보고 싶다. 지금쯤이라면 여린 혓바닥이 입안을 맴돌고 있을 것이다.
내 심기를 거슬렀으니 뭐라도 변명해야 할 테니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신은 잠자코 지켜보기엔 너무 눈부신데.”
“지나친 우문이다, 계집. 어리석은 것도 정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계집이 발끈하는 단어가 몇 개 있었다. 현명치 못하다, 어리석다, 멍청한 짓……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꾸짖을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렇다. 그리고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상황은 계집이 마술사와 일반인의 괴리를 느꼈을 때였다. 계집은 이미 공포의 원인을 알고 있으면서 내게 정답을 갈구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가 친히 수고하라는 뜻이다. 그 잘난 혓바닥으로 나를 안심시켜봐라, 계집이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까. 내가 서번트가 아닌 마술사 정도만 됐었어도 조그만 저것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상대를 잘못 만났군. 잔에 담긴 술을 비웠다.
계집에게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딴에는 특기다. 먼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 맞은편에 털썩 앉은 계집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치켜뜬 눈은 위협으로 다가오기엔 지나치게 새치름했다. 시선이 닿는 곳은 머리칼, 어깨, 술잔을 쥔 손. 그밖에 다양한 곳에 시선을 내린다. 무례하다 일컫기 딱 좋은 행동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방해는 하지 않기로 한다. 지상의 술은 재보 안에 있는 것만은 못했다. 이것 역시 일품이긴 하나 결전에 마시긴 어울리지 않았다. 충분히 맛을 본 술병은 다른 곳으로 밀어둔다. 테이블 위에 유리병이 끌리는 소리에도 계집은 미동하지 않았다. 눈살은 찌푸렸지만. 이내 벌어진 입술에서 단어가 읽힌다. 설마, 그래 그 설마다.
“그 휘광을 계속 보란 말씀인가요?”
제정신인가. 계집은 자신이 뱉은 말에 놀라 입을 가린다. 드물게 커다랗게 뜬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 내가 눈을 맞춰주다니, 그래 제정신은 아니군. 취할 정도로 마시진 않았지만, 기분 좋게 오른 술기운이 변덕을 부렸다 쳐주마. 눈부시다 했지, 내 휘광을. 계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계속 보고 있으면 될 텐데. 검은 동공에서 네 녀석이 느낄 공포, 두려움. 이런 일말의 감정을 모조리 집어삼킬 정도의 빛 정도는 감당해야 참된 시종이 아니겠느냐. 너의 왕의 빛을 의심하다니. 괘씸한 계집에게 딱밤을 놓았다. 이런 가벼운 장난에도 계집은 다채로운 반응을 보인다. 고양이라면 꼬리를 부풀렸을 것이고 토끼라면 작은 주먹으로 얼굴을 할퀴려 들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지루하지 않게 비위를 적당히 맞춘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하지.
“그래도 두렵다면 이번 싸움, 도망쳐도 좋다. 애초에 마술사도 뭣도 아닌 한낱 인간이 감당할 싸움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으니.”
잠시나마 나와 어울려 기분을 돋워준 포상이다. 네게 미래를 선택할 권리를 주마.
붓지도 않고 긁히지도 않은 이마를 계집은 신경 썼다. 머리칼을 내려 촘촘히 가려본다. 걷어내어 상처를 친히 살펴봐주겠다는 말에는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계집은 머리칼을 정돈한 후에야 앙다문 입술을 열었다.
“아직 신하도 못 된 시종이지만, 그래도 왕과 미래를 같이 해야죠.”
계집은 포부가 남달랐다. 조만간 시종과 신하를 넘어선 무언가를 차지할 것이라며. 옆에 계속 나를 두고 있는 자신에게 놀랄 것이라고. 그래, 라이더와의 싸움 이후라면 내 안에서 이 녀석의 평가가 확실히 바뀌겠지. 다른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어떤 가치가 될지는, 역시 네 스스로 증명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