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 하루는 잘 보내셨나요? 오후 예배는 약속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하루종일 당신 얼굴도 못 봤네요. 이젠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요. 어제는 당신 쪽에서 일이 있다고 레이놀즈 씨께 전해들었어요. 다행히 쓰고 있던 글이 있어서 집필에 힘 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포우 선생님도 칭찬을 해 주셨어요……
*
에스나가 한숨을 쉬우며 잉크병에 깃펜을 푹 담구었다. 이 편지를 그대로 보냈다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그리스월드는 유독 에드거 앨런 포우를 적대시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기묘한 감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에스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리스월드와 만남을 지속하기 전부터 그 감정의 기류를 눈치채고 있었다. 물론 제 연인을 위해 포우와 교류를 끊는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았다. 포우는 문인으로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자신의 교류에도 큰 도움이 될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이 편지를 그대로 보내면 안 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포우 작가님과 만났다는 내용을 루퍼스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어? 에스나는 자신의 귀여운 애인과 구태여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미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리스월드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면 충분히 여러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며 에스나를 설득했으나, 이미 포우의 기묘한 글솜씨에 매료된 에스나로선 한 귀로 듣고 흘릴 말이었다. 그때마다 에스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만남을 지속했다. 단순히 연심에 기인한 질투가 아니라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열등감? 루퍼스가 그런 싸구려 감정을 마음에 담을 사람이던가. 루퍼스 그리스월드는 에드거 앨런 포를 그저… 제 발 밑에 굴러다니는 원고지만도 못하게 보고 있는걸.
"다시 써야겠네."
에스나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썼던 편지를 곱게 접어 제 품 안에 넣었다. 루퍼스와 포우 선생님의 사이가 좋아질 리는 없으니, 좀 이따 버려야겠다. 생각을 마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랑하는 제 연인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임박할 무렵이었다. 이제 슬슬 교회로 향할 시간이었다. 입안에서 절로 나오는 기이한 한숨, 사랑하는 사람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지만 본능적으로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당초 루퍼스가 목사란 사실에 관심을 가진 것도 아닌 걸. 굳이 목사관까지 가야 하는 걸까. 마음과는 다르게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새까만 옷에 걸맞은 검은 머리가 보일 무렵, 에스나가 눈을 부드러이 휘었다.
"루퍼스."
"에스나?"
놀란 듯 드물게 눈을 깜빡이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또 재미있기도 해서 에스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리스월드의 볼을 푹 찔렀다. (뒤에 서 있는 레이놀즈가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으나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놀랐어요?"
"…말도 않고 왔으니 당연하잖습니까."
"그래, 미안해요. 그렇지만 오늘 만나기로 했잖아요. 시간도 거의 다 됐고… 무슨 일 있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물음을 던진 에스나를 향해 옅은 미소를 띈 그리스월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예상보다 일찍 와서 놀란 것뿐입니다. 들어가죠."
에스나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목사관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리스월드가 잠시 멈춰 서 레이놀즈에게 눈짓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기묘한 기류를 눈치 챈 에스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싸한 느낌이 그녀의 마음을 순식간에 관통했다.
그날 밤, 에스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 속에 안온히 머물고 있었다. 이상해, 왜 계속 불안한 느낌이 들지? 결국 집에서 나와 잠깐의 산책을 택한 그녀는 마을을 서성거리며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정신 차려, 에스나 르베이트. 루퍼스가 아무리 포우 작가님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다지만, 그 생각이 가당키나 해? 그는 단지 작가님을… 그 악마 같은 재능을, 잠깐. 악마?
"…악마 같은 재능."
에스나의 붉은 눈이 서서히 커진다. 그래, 악마.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라기엔 지나치게 매혹적이고 사람들을 홀리는 느낌. 마치 악마 같은, 루퍼스 그리스월드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존재인 이단아.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어. 하지만, 하지만 만약… 루퍼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존재를 모두 지우고 신의 말로 그 간극을 채우려 한다면? 열등감 따위가 아닌, 호기심과 쾌락으로 모든 일을 행하려 한다면? 과연 그때에도 에스나 르베이트는 루퍼스 윌모트 그리스월드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스월드는 강한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자랑하는, 그런 단단한 사람. 그 단단함의 이면을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눈을 감는다. 온전한 절망이 에스나 르베이트를 감싸안았다. 만일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정말 그런 것이라면…
눈을 뜬다. 확신만이 그녀의 골을 타고 오른다.
나는 그를 떠나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