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캐릭터명: 파멜라, 네일라).
블라인드 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시쿄인 히비키는 눈을 떴다. 엉성하게 벌어진 블라인드를 흘끗 보곤 인상을 찌푸린 그는 몸을 뒤척였다. 암막 커튼으로 새로 맞추던가 해야겠군. 아니, 집주인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정도 햇빛이 들어와야 아침에 겨우 일어날 수 있으려나.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잘까. 오랫동안 진행되던 영화 촬영이 겨우 끝내고 오랜만에 휴가를 가진 참이었다. 이정도 휴식는 조금 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제 옆에 있을 연인도 아직 꿈나라에 가있을 터이니. 히비키는 제 연인의 붉은 머리칼을 떠올리며 손을 뻗었다. 한참동안 허공을 헤매던 손에 닿은건 따뜻한 감촉 대신 싸늘하게 식은 천뿐이었다.
“카엔?”
손을 감싼 찬기에 잠에서 깬 그는 눈을 떴다. 분명 제 연인이 있어야할 자리엔 누군가 누워있던 흔적만이 있었다.
「미안해, 히비키. 파멜라가 아침부터 재촉을 해서….」
자그만 화면 너머로 보이는 얼굴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프리파라 연습복 차림인 하나사키 카엔은 더 이상 설명할 거리도 없는지 제 앞에 상대를 향해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거실 소파에 다소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히비키는 한숨을 쉬었다. 짐작대로 제 연인은 저를 두고 한 발 앞서 프리파라에 가있는 상황이었다. 땀을 삐질 흘리고 있는 카엔에게 히비키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 화면 바깥에서 꽤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부터 깨우지 않았으면 오후가 되어서야 프리파라에 왔을 거 아니에요! 오전에만 연습할 시간이 난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진정해, 언니.」
히비키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언뜻 비치는 형체를 보지 않아도 카엔의 동료인 보컬돌 자매 파멜라와 네일라가 곁에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쉬는 날엔 정오가 되어서야 느즈막히 일어나는 카엔이 이리 이른 시간에 프리파라에 가있더라니, 그 둘-정확히는 하나겠지만-의 다소 집요한 재촉 탓이었구나. 본인이 알기도 전에 카엔을 깨운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히비키, 나 마저 연습하러 갈게. 이따 봐.」
옆에서 한껏 성을 내고 있는 파멜라를 진정시킨 카엔은 이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기기의 화면이 완전히 꺼지고, 히비키는 까만 스크린에 흐릿하게 비친 제 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남들이 보기에 저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평소처럼 무표정일까, 아니면 제 감정이 다 드러나 있을까. 후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기기를 탁자에 내려놓은 히비키는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카엔이 파라주쿠 프리파라에 온 이후부터 많은 변화가 생겼다.
“카엔 언니! 저희 지금 연습하러 가는데!”
“우린 지금 막 연습 끝났어. 바톤터치네.”
“아캄파넬라다! 오늘 라이브 있어?”
“오늘은 쉬는 날.”
“아쉽다~”
“곧 우리 가로마겟돈의 강림이 시작될지니 두 눈에 똑똑히 새겨두어라!”
“오늘 라이브가 있으니까 보러 와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용.”
“응, 보러갈게.”
바라보기만 하는 게 좋다고 줄곧 얘기하던 카엔은 어느새 프리파라 아이돌 사이에 섞여 들어가 있었다. 마음이 맞는 동료를 만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사람 많은 곳은 질색하던 그는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있어도 버거워하지 않았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는군.’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히비키는 바닥을 앞꿈치로 몇 번 통통 치다가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지금 기분으로는 인파 사이에 섞여있는 카엔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원래 카엔 옆에는 나뿐이었는데.’
봄이 되면 붉게 물드는 정원에서 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카엔, 그리고 항상 붉은 꽃을 한 아름 품에 안고 그를 찾아가는 자신. 그리고 저를 발견하면 변함없이 보여주던 미소까지. 그것이 세계의 전부고 그들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자신들의 세계엔 둘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세계가 넓어진다는 건 카엔에겐 좋은 일이 분명했다. 연인으로써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겠지. 하지만 그 모습을 확인할 때마다 어째서인지 마음 한 편에 얼룩이 한, 두 방울씩 생기는 기분이었다.
개인 대기실로 돌아온 히비키는 소파에 대충 걸쳐 앉았다. 오늘따라 쓸데없이 널찍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대기실엔 혼자뿐이었다. 팀 동료인 후와리와 파루루는 각자 일로 바빴고, 제 곁에서 시중을 들던 집사는 카엔과 단 둘이 있으려는 요량으로 휴가를 보낸 참이었다.
대기실을 한 바퀴 훑어 본 히비키는 지그시 눈을 감아 천천히 제 감정을 바라보았다. 사실 어렴풋이 이 얼룩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저가 그런 감정에 휩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히비키.”
그냥 카엔이 곁을 떠날까봐 초조해졌을 뿐이야, 답지 않게 불안에 떨고 있군. 아니, 불안에 떨긴, 카엔이 떠나고 싶다고 한다면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어. 그래, 이건 질투도 소유욕도 뭣도 아니라 그저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 기인된….
“히비키?”
문득 귓가를 맴도는 목소리에 히비키는 눈을 번뜩 떴다. 그저 제가 상상한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토록 그리던 상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눈앞에 있었다.
“카엔?”
“역시 여기 있었구나. 연습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왔어. 어휴, 힘들어.”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훔친 카엔은 히비키 옆에 털썩 앉았다.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본인이 지은 죄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카엔은 히비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모처럼 쉬는 날인데 내가 말도 없이 나와서 화났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기운 없이 축 쳐진 어깨를 보고 히비키는 급히 부정했다. 정말? 그럼. 몇 번이고 확인시켜도 여전히 풀 죽어있는 카엔에게 히비키는 정신을 돌릴만한 화제를 던졌다.
“오후엔 스케줄 없어?”
“응, 오늘은 파멜라랑 네일라만. 보컬돌 특집이라나. 그래서 파루루랑 같이 가더라고! 가루루는 라이브가 끝나면 합류한다고 하더라. 아참, 그리고 오면서 라라랑 후와리도 만났는데….”
물꼬를 튼 카엔은 언제 기운 없었냐는 마냥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겨우 몇 시간 떨어져있었다고 이리 할 얘기가 많은지. 히비키는 카엔이 이곳에 온 이후로 말이 제법 늘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카엔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히비키가 혼자 떠들고 카엔은 받아주기만 하는 정도. 프리파라에 관련된 화제라면 제법 얘기하긴 했는데 것도 그 정도뿐이었다.
히비키는 카엔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파라주쿠 프리파라가 제게 준 몇 안 되는 좋은 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아참, 곧 가로마겟돈 무대 시작될 텐데.”
카엔이 가볍게 손뼉을 치자 히비키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 흔들렸다. …또 혼자 훌쩍 떠나버리려고? 히비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카엔은 방긋 웃었다.
“같이 보러 가자!”
그리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카엔을 보고 히비키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 누구 마음대로?” 그리 말하면서도 올라가는 입 꼬리를 필사적으로 눌렀다.
“금방 시작한댔어! 같이 가자! 응?”
카엔의 성화에 히비키는 못 이기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대기실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카엔을 붙들고 히비키는 입을 열었다.
“대신 오늘은 라이브만 보고 돌아가자.”
“응? 알았어. 영화 촬영하느냐 피곤할 테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자.”
응, 단 둘이. 히비키는 뒷말을 삼킨 대신 카엔의 손에 깍지를 꼈다. 제 마디 사이사이에 들어온 손가락을 본 카엔은 영문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알았어, 알았어. 웬일로 어리광이래?”
그럼 가자, 정말 늦겠어. 카엔과 히비키는 서로의 손을 다시 한 번 꼬옥 쥐곤 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