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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비x유하

 

 

 

 

" 아냐, 라비. 너를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짧은 흑발의 여성은 당장 울 듯한 목소리로 저보다 한참 앞으로 걸어가는 그를 따라갔다. 목소리에 맞게 좁혀진 미간은 도저히 펼 생각이 없어 보였고, 시선은 쭉 그를 향한 채, 그녀의 표정은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황 머리의 남성도 절대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한쪽 눈을 안대로 가렸는데도 찌푸린 미간은 그대로 티가 나 못마땅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라비는, 그러니까, 안대를 한 남성은 저를 따라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나도 알아, 그 한마디 말을 내뱉지 못하고 계속 걸어갈 뿐이었다. 나도 아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으로 이해 못 하겠어. 라비는, 아주 가끔 제 연인이 사랑스러운데도 더 다가가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가 가장 괴로웠다. 머리로는, 자신이 북맨이기 때문에 이 이상은 안 된다는 생각과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면 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부딪힐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라비가 제 연인과 헤어지는 날을 기다린 건 아니었다. 마치, 생각하기 싫다는 듯 미래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자신의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생각보다 전쟁이 잘 끝나서 제 연인이 무리 없이 검은 교단을 벗어나 자신과 같이 세계의 이면을 기록하기 위해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유하는,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니까. 그때에는 어떠한 고민도 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쭉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격해지는 싸움과 늘어나는 부상이 그저 꿈이라는 걸 알려주듯 보여주었다. 그래도, 괜찮았어. 나는 우리가 같은 꿈을 꾸는 줄 알았어. 라비, 내 말 좀 들어봐. 나는, 계속해 말을 그녀의 목소리에 결국 라비는 뒤돌아 그녀를 붙잡았다.

 

 

 

" 나라고…. 좋은 건 아니잖아, 유하."

 

 

 

유하라고 불린 여성은, 라비를 바라보았다. 상처를 준 건 자신인데, 어째서 자신이 더 아프고 마는 것일까.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유하는 고개를 숙이는 듯싶더니 그대로 라비를 끌어안았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제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라비. 라비가 먼저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계기는 단순했지만, 이야기는 단순하지 못했다. 라비와 유하의 연애는 단순히 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켜보는 사람에게도 아슬아슬한 연애였다. 분명 서로를 바라보는 감정이 확실한데, 부럽다며 으름장을 놓을 정도로 서로를 위하는 연인인데. 둘의 사이가 짙어질수록 헤어질 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둘이 평생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이별을 말해야 하는 주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유하와 자주 같은 팀을 이루는, 파인더의 대화를 라비가 우연히 들은 게 계기였다. 두 분은 계속 연애 하는 거세요? 글쎄, 언젠가 헤어지지 않을까. 유하는, 라비와 연인이면서도 달랐다. 언젠가, 꿈이라도 헤어지지 않을 날을 생각하는 라비와 달리 그를 처음 사랑했을 때부터 이별을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에 대해 라비에게 말한 적은 없었다. 어느 누가 이별을 고하는 연인을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순간적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품어왔던 생각을 제 연인이 원하지 않게 들었을 때, 무어라 변명을 덧붙이지 못하고 수긍한 건 분명 유하의 잘못이었다. 라비는, 어떠한 변명이라고 해주길 바랐을 테니까.

 

 

 

 

 

" 계속 그런 생각을 한 거야?"

" 아냐, 라비. 나는…."

" 내가 너를 계속 불안하게 한 건가?"

" 라비 탓이 아니야.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유하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라비의 얼굴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냐, 라비. 아니야, 나는. 하지만 유하도 마찬가지로 아니라는 말만 할 뿐 더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여전히 제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드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제대로 된 거짓을 말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미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그것도 모르고 나는 계속, 너에게…. 괜찮을 거라고 말한 거야?"

" ... ... ... "

" 나는, 너한테 상처 줄 생각 없었어. 네가 계속 그렇게 생각한다면 난…."

" 상처라도 괜찮아!"

 

 

 

네가 나한테 준 게 거짓은 아니잖아. 나는, 괜찮다고 말했던 라비가 좋았어. 유하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너를 의심한 건 아니었어. 평소에 그 정도로 감정적인 일이 없던 라비의 반응 탓일까, 유하는 결국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못했다. 더는 오가는 말 없이, 둘의 관계는 여전히 아슬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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