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hining Star
가면무도회, 19세기 스팀펑크 AU
스타크가 와 달라고 부탁해서 친히 와 줬더니만, 스티븐은 여전히 이 가면무도회의 목적을 잘 모르겠다. 철심이 박힌 손가락은 진주색 장갑에 가려졌지만 그 잔떨림은 완전히 숨겨지지 못했다. 아무리 가면 뒤에 얼굴을 감춘다고 해도 보일 건 다 보이는데 대체 이게 무슨 소용인지. 메인 댄스 플로어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보안상 대부분 스타크가 아는 사람들이거나 쉴드 요원들이었지만, 굳이 그 사이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한쪽으로 빠져 샴페인 잔을 들었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홀 왼쪽에 마련된 쉴 공간에 놓인 테이블로 향하는 발걸음은 짜증이 난 듯 경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스타크가 보낸 이 가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가루가 약간 뿌려진 청록색 나비 가면을 괜히 쓸어내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면은 아름다웠지만, 그걸 준 사람의 의도가 훤히 비쳐 보였다. 기껏 목숨을 구해 줬더니만 이런 식으로 갚아? 평범함은 이 남자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 건가 싶었다. 붉은 넥타이가 그의 감정을 눈치챘는지 그 끝으로 스티븐의 벨트를 톡톡 두드렸고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잔을 쭉 비웠다. 진정하자, 진정. 그러나,
“여기 있는 것 중에 논 알코올 음료가 있긴 한가요? 전 아직 나이가―”
젊은, 아니 어린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맑지만 조용한 음성은 금방 잦아들더니 조그마한 목소리로 젠장할 미스터 스타크, 하고 이 파티의 주최자를 욕했고 스티븐은 익숙한 목소리에 술기운이 완전히 달아났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의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로 유난히 눈에 띄는 이를 발견했다.
옅은 하늘색 드레스는 마치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져 하늘하늘하게 그녀의 몸을 감쌌다. 곳곳에 박힌 아콰마린은 홀의 불빛을 반사해 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단정한 검은 머리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써클렛이 얹혀 귀족처럼 보였다. 수수한 청회색 가면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가면 같았으나 가까이서는 이슬을 머금은 아침 햇살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구멍에는 유리가 덧씌워져 있었다. 원래 안경을 쓰던 사람이군. 칵테일 바 앞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소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스티븐이 앉는 것을 무료하게 바라보던 소녀는 스티븐이 코스모폴리탄 한 잔과 아리조나 선셋 하나. 하고 음료를 두 잔 주문하자 그를 퍼뜩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스티븐이 잔을 받아서 그녀 앞으로 밀어주자 그녀의 시선이 그와 잔 사이를 빠르게 왕복했다.
“아리조나 선셋은 논알콜 칵테일이죠. 드세요.”
그녀의 손이 잔에 다가갔다가 움찔, 하고 떨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스티븐은 저도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내게 당신을 해할 의도가 있는지가 궁금하겠군요. 걱정하지 마시길. 아가씨에게 손을 댈 생각은 하나도 없거니와 그런 일이 이곳에서 일어난다면 스타크가 난리를 피울 것이 분명하니까.”
소녀는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 표정으로 스티븐이 가져다준 음료를 홀짝거렸다. 음료의 단맛과 탄산에 미묘하게 긴장이 풀린 듯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스타크라, 이 파티의 주최자를 아세요?”
이런. 소녀가 수정이 맞든 아니든 꽤 예리한 것은 분명했다. 스티븐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음,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버터플라이 맨’은 조금 물리잖아요?”
“아. 캔들. 에릭 캔들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무언가 깨달은 듯 소녀의 입가가 약간 말려 올라갔다.
“그럼 전 다프네라고 불러 주세요. 그런데 에릭, 혹시 스트레인지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아세요? 제가 아는 사람과 목소리가 비슷해서요.”
설마. 스티븐은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릴 뻔했다. 스타크가 어떻게 알았지? 파티가 끝나자마자 그 망할 인간을 찾아가서 사생활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일단은 아이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중요했다. 스티븐은 숨을 간신히 내쉬며 그 사람에 대해 더 말해줄 수는 없냐고 물었다.
“그분은……. 그분은 우연히 만났어요. 당신은 믿지 못하시겠지만, 제가 사는 지역에 지독한 악령이 찾아왔었거든요. 그분은 그런 것들을 잡는 일을 업으로 삼으셨는데, 마침 제가 사는 지역의 언어를 모르셔서 제가 도와드렸어요. 그리고 그다음부터 저희는 친구가 되었어요.”
“꽤 좋은 사람 같군요.”
스티븐의 답에 다프네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듯했다. 맞다며 고개를 주억거린 다프네는 그 남자와 ― 스티븐과(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었다. 이런 일을 했었는데 그 아저씨가 어떻게 반응했다더라, 아저씨라고 자꾸 부르니까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어서 이제는 그냥 이름으로 부른다더라. 평소보다 신이 난 듯 손짓까지 해가며 설명하는 다프네의 목소리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한쪽에서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던 곡이 끝나고 잠시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스티븐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런데 왜 아가씨는 여기에 계속 계시는 거죠? 한 번쯤은 댄스 플로어에 나갈 만도 한데.”
스티븐의 말에 다프네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춤을 출 줄 몰라요. 배운 적도 없고. 홀을 아련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빈 잔으로 시선을 돌리는 다프네의 손 위에 조심스레 자신의 것을 올렸다.
“나한테 배워볼래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다프네의 입에 이내, 조심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요?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머뭇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밴드도 아까보다는 조금 더 서정적인 노래를 시작했고, 스티븐은 천천히 그녀를 무대 위로 이끌었다.
손을 맞잡고, 하나 둘 셋 둘 둘 셋. 느린 재즈풍 음악에 맞추어 발을 천천히 옮긴다. 호흡을 맞추고, 스티븐이 맨 처음 춤을 배웠을 때를 떠올리며. 역시 똑똑한 수ㅈ-다프네답게 곧잘 따라 하는 것을 보며 괜히 뿌듯함을 느꼈다. 두어 곡 정도를 같이 보내고 나니 이제는 자신감이 붙은 듯 발의 움직임도 확실해졌다. 마지막까지 서툴지만 잘 해낸 다프네와 마주 보고 인사했다. 그리고 문득 장난을 치고 싶어져 그녀의 눈높이에 맞게 무릎을 구부렸다.
“You’re my shining star, never think that you can’t do something.”
마지막으로 다프네의 손등에 옅게 키스한 후 자리를 떴다. 뒤에서 잠시만! 하는 다프네, 수정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스티븐은 생텀으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 금방 모습을 감췄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황금색 빛가루만이 휘날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