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토키는 눈앞에 선 연인을, 몇 시간 전까지도 걱정하며 찾아 헤매던 연인을 노려보며 숨을 골랐다. 얼마 전 저 먼 우주 너머의 행성에서는 서로의 등을 맡기며 한 편에서 싸웠었던 둘은 결국 다시 지구로 돌아와 검을 맞대는 사이가 되었다.
지구. 고향. 타향. 이방인. 신라. 천인. 연인. 둘 사이의 거리감을 정의하던 수많은 단어들이 머릿속을 뿌옇게 흐렸다. 서로가 애써 외면하며 밀어냈던 과거가 돌아와 결국 이렇게 파도처럼 둘을 삼켰다. 역시나 카나는 동료들의 죽음을 원통해 했으며, 나를 원망했고, 저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렇게 과거와 거의 같은 상황을 다시 한 번 만들어내 자신을 끌어 세운 걸까.
서로가 목숨을 걸고 마주 선 것은 난생처음이었으나, 마치 원래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카나의 손짓 몇 번에 신라 용병들이 대형을 바꿔 좁혀 들어왔다. 긴토키는 들어올 공격에 대비해 순간적으로 근육을 경직시켰으나, 잘 훈련받은 용병들은 서로 눈을 맞추지 않고도 동시에 공격해왔다. 물밀듯 들어오는 검격들을 받아내며 긴토키는 조금 더 나아갔다. 그렇게 받아내기 어려운 공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빈틈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얼핏 푸른색이 일렁거렸다. 눈 깜빡할 새 카나가 용병들 틈에서 나타나 크게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감각이 배에 퍼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자, 한 번 더 내리쳐오는 카나의 검격을 겨우 막아냈다.
칼날이 복부에 스치며 낸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마주친 카나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검을 들이대는 지금 이 순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너는 얼마나 많이 마음을 다졌을까. 바보 같게도 그것이 퍽 사랑스러워 웃음이 흘러나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카나의 손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긴토키는 눌러오던 검을 빠르게 쳐내고 카나의 가슴팍을 길게 휘둘러 베었다. 카나는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으나 남은 부하들은 주체하지 않고 대장의 빈틈을 채우며 앞으로 나왔다. 손에 남은 감각으로 보아 깊게 상처를 낸 것 아닌 듯했다. 아쉬워해야 할지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을 자조하며 달려드는 신라 용병들을 베어냈다.
잠시 이어지던 전투가 순간 멈추고 용병들이 뒤로 물러났다. 주위를 살피니 카나가 다시 부하들을 불러 모은 듯했다. 가슴팍의 갑주가 비스듬히 반으로 갈라지고 그 틈새로 피가 번져 나오는 게 보였지만, 서있는데 무리는 없는 듯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선 적은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역시 봐줄 생각은 없는가 봐, 긴토키?”
수많은 파도를 잠재우고 소리 죽인 듯한 담담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가만히 손놓고 당할 수만은 없잖냐. 너야말로 좀 봐주지그래? 지금에라도 멈추면 없던 일로 해줄게.”
파도 무늬가 그려진 소맷자락이 마침 불어온 바람에 펄럭였다.
그 말에 카나는 잠잠히 웃어 보였다.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