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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처럼 푸른 바다는 언제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금의 정채은이 그랬다. 매년 여름과 겨울, 빠짐없이 허묵과 바다에 오지만, 그녀는 질리지 않는다는 듯 창가로 펼쳐진 드넓은 바닷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짐을 내려놓고 발코니로 따라온 허묵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바다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채은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는 말했다.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요? 당연히 교수님이죠. 원하던 대답이었고, 정답이었다. 그는 상을 주듯 볼록 튀어나온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같이 걸을래요?

그 물음에 채은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고, 이는 채은의 기분을 대변했다. 허묵은 확신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흐린 하늘은 한순간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제가 그렇게 만들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한 허묵은 캐리어에 넣어둔 카메라의 배터리를 확인한 후, 채은의 손을 잡고 호텔방을 나섰다.

 

*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선명한 이곳은 성수기 직전의 바닷가였다. 연차와 휴가를 내고 무리해서라도 온 보람이 있었다. 아직 휴가를 즐기기에는 이른 모양인지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고, 그들의 표정 또한 허묵과 채은처럼 즐거워 보였다. 채은은 종종 쭈그려 앉아 모래사장 위에 허묵과 제 이름을 적어 보기도 하고, 하트를 그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파도가 그 글자들을 모두 집어삼켜 조금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눈과 입으로는 웃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걷던 허묵은 목에 걸어둔 카메라를 들어 그 모습을 담아냈다. 순수하게 웃는 모습이, 마치 물 만난 물고기, 놀이기구를 눈앞에 둔 아이 같았다.

 

한참이나 모래 위에 글씨를 적고 핸드폰 카메라에 찍기를 반복하던 채은은 아예 신고 있던 샌들을 벗고는 바닷물 속에 발을 담갔다. 아, 차가워. 그렇게 말하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허묵은 먼발치에 앉아 연신 셔터를 눌렀다.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어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피사체였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계속해 들려오자, 바닷물에 집중하고 있던 채은이 드디어 뒤를 돌아 허묵을 보고 말했다.

 

“교수님도 와서 같이 놀아요. 사진만 찍지 마시고.”

“나는 이게 노는 거예요. 바보. 당신을 찍는 일만큼이나 재미있는 일은 내게 없어요.”

“체, 젖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요?”

 

장난투의 말에 허묵이 웃음을 흘렸다. 채은이 이어서 장난 어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인생샷 많이 찍어주세요. 허묵은 저만 믿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두 사람은 그들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곧 해가 저물어갈 시간이었다.

 

발만 담그고 동동거린 덕분에, 채은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여벌 옷이 부족하던 참이었으니까. 채은은 여전히 앉은 채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에게 손짓했다. 교수님, 이리 와요! 해 지기 전에 셀카 한 번 찍어요.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서 줄곧 채은의 모습만 담아냈지, 함께하는 모습은 찍지 않았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허묵이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샌들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바닷물이 확실히 차가웠다. 채은이 물에 몸을 담그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분명 물놀이를 했다면 다음날 호되게 감기로 혼이 났을지도 모르겠다. 허묵은 채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훅 다가온 허묵의 체향에 채은이 어깨를 흠칫 떨었고, 그 떨림은 온전히 허묵에게 전해졌다. 긴장하고 있구나. 혼잣말에 가까운 말에 채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와 함께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또 그와 이런 스킨십을 하는 것도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매번 새로운 일을 하는 것마냥 긴장하고 떨려 했다. 그 모습까지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쉬움에 웃은 허묵이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장하지 말고, 얼른 찍고 들어가요. 발 시렵겠다.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에 그녀의 긴장도 서서히 풀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셀카 어플은 채은이 직접 찾아 설치해준 것이었다. 필요한 기본 어플만 깔려있던 허묵의 핸드폰이 여러 가지 어플로 다채로워지기 시작한 것도, 정채은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이내 핸드폰 화면 안에 허묵과 채은 두 사람의 얼굴이 담겼다. 촬영 버튼을 누르자 5초 타이머를 설정해 둔 카메라가 5에서부터 숫자를 차차 낮춰 가기 시작했다.

 

5초는 아쉬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조금 전 찍힌 사진을 한 번 살펴본 허묵이 “한 번 더 찍을까요?” 하고 물었다. 지금의 사진도 더없이 특별하고 예뻤지만, 머릿속에서 어떤 계략이 스치듯이 지나간 까닭이었다. 채은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눈동자가 눈앞의 바다보다 투명했다. 놀리고 싶고,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걸 보고 싶었다. 그래서 허묵은 다시 한 번 촬영 버튼을 누르고는, 가볍게 채은의 볼에 입 맞췄다. 이윽고 허묵이 채은에게 입 맞추는 모습과 함께 흠칫 놀라 두 눈을 댕그랗게 뜨는 채은의 모습이 함께 카메라에 담겼다. 5초라는 짧은 시간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갑자기 뽀뽀하는 게 어디 있어요! 놀랐단 말이에요.”

“그래도 싫지는 않았잖아요, 그렇죠?”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채은의 화법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는 긍정이었다. 허묵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리고는 두 팔로 채은을 안아 들었다. 이대로 호텔까지 안전하게 모실게요. 채은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면서, 결국 허묵의 목을 두 팔로 조심스럽게 감았다. 이 또한 긍정이리라. 호텔로 향하는 두 사람의 등 너머로, 노을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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