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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르륵. 무언가가 노트 아래로 흘러내린다.

아이렌은 제이드의 필기 노트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낚아챘다. 비록 체력은 형편없을지언정, 순발력은 나쁘지 않은 덕에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은 그는 제가 잡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손바닥 하나 정도의 크기 즈음 되는 그것은, 다양한 버섯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제이드 선배, 이게 뭐예요?”

 

얇은 비닐 속에 든 사진들을 구경하던 아이렌은 노트의 주인에게 물었다.

상대에게 노트를 빌려준 후 제 할 일에만 몰두하던 제이드는 아이렌의 손에 있는 사진을 확인하고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기르는 버섯의 성장 모습을 기록한 사진입니다.”

“아하.”

“맨눈으로 보면 구분이 잘되지 않는 것도 사진으로 보면 잘 보일 때도 있다 보니, 더 자세한 기록을 위해 찍게 되었지요.”

 

말하자면 관찰일지용 사진인가. 아이렌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버섯 갓의 주름이 보일 정도로 클로즈업해 찍은 사진을 빤히 보던 아이렌은 본래 목적이었던 노트를 내려놓고 제이드가 노력하여 기른 결과물을 살폈다.

 

“생각해보면 반려동물의 사진은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 찍는데, 식물이라고 못할 건 없긴 하죠. 버섯은 식물이 아니긴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면 뭘 이렇게까지 하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아이렌은 너무나 당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여 줘서 괜히 웃음이 나온다.

제이드는 기꺼이 사진 속 버섯에 관해 설명해 주려다가, 돌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상대 덕에 하려던 말을 삼켜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보니 꼭 증거 사진 같네요.”

“이런. 그런가요?”

“네. 아, 사진을 못 찍었다는 이야기가 아녜요. 그냥 뭐라고 할까. 근접샷이 많아서 꼭 수사 중 찍은 사진 같다고 해야 하나…….”

 

하필 비유를 들어도 저런 걸 예시로 들다니. 차마 직접 말할 순 없지만, 참으로 아이렌다운 표현이다.

하지만 이건 절대 불평이 아니다. 제이드는 이 여자의 이런 면을 좋아한 거니까.

역시 재미있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제이드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채, 아이렌은 사진 이야기만 이어갈 뿐이었다.

 

“선배가 찍은 다른 사진도 궁금하네요.”

“흐음, 다른 사진이라.”

 

무엇이든 제게 관심 가져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정말로 관심이 없다면 궁금해하지 않게 되는 걸 아는 제이드는 상대의 호의에서 오는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잠깐 골몰했다.

 

“테라리움 사진이나 버섯 외엔 별다른 게 없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딱 하나 다른 게 있군요.”

“다른 것?”

 

도대체 무엇일까. 제이드의 관심사를 대강이나마 아는 아이렌은 그가 가방을 뒤적거리는 걸 얌전히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꺼내 보인 것은 익숙한 인물이 찍힌 사진이었다.

‘푸흡.’ 사진 속 인물을 금방 알아본 아이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잔 건지, 상의를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이불을 껴안고 잠든 플로이드의 모습은 그 커다란 덩치와는 맞지 않게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이건 언제 찍으신 거예요?”

“처음 카메라를 샀을 때 테스트를 해본다고 찍은 겁니다. 마침 방에 플로이드가 있었거든요.”

“플로이드 선배는 이 사진의 존재 여부는 알고 있나요?”

“아마 모를 겁니다. 제가 보여준 적이 없으니까요.”

 

아무리 형제라도 함부로 사진을 찍어도 되는 걸까. 그런 걱정은 잠깐일 뿐, 아이렌은 사랑스러운 자는 모습에 금방 매료되었다.

 

“이 사진, 좋네요.”

 

피사체가 사랑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평가내린 건 아니었다. 어두운 방인데도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얼굴과 정확한 초점 등등. 제이드의 첫 사진은 분명 나쁘지 않았으니까.

감출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렌의 목소리 톤은 평소보다 한결 높았다.

 

“선배는 역시 못 하시는 게 없네요. 요리도 잘해, 공부도 잘해, 사진도 잘 찍다니.”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아이렌 씨의 사진도 좋아합니다.”

“음? 그래요?”

“예.”

 

제이드는 아이렌이 마지카메에 올렸던 사진들을 떠올렸다. 노을로 물든 하늘부터 들꽃, 마음에 드는 컵이나 공부하는 책상까지. 다양한 풍경과 사물을 찍어 올리는 아이렌의 사진에는 특유의 감성이 있었다. 특별히 배워서 익힌 것이 아닌, 제가 좋아하는 걸 담기 위해 셔터를 누르다 보니 생긴 감성이.

제이드는 화면 속에서만 보았던 사진들이 문득 가지고 싶어져, 슬그머니 제안했다.

 

“그 사진, 마음에 드신다고 하셨지요?”

“예? 그렇긴 한데…….”

“혹 가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아이렌 씨가 찍은 사진과 교환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면 서로 손해 볼 건 없는 거래라고 생각한다. 제이드는 그리 생각했고, 아이렌도 그리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렌은 이 조건이 너무나 좋다고 여긴 건지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가 찍은 사진이랑?”

“네.”

“제 사진이 아니라?”

“아이렌 씨는 사진 찍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거나 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실 아이렌의 사진이라면 직접 찍은 걸 달라고 하는 것보단 몰래 찍는 편이 빠를 거다.

하지만 만약 몰래 찍었다는 걸 들키면……. 차라리 피를 보는 게 낫겠다 싶은 일이 터질지도 모르지. 그러니 그냥 원하지 않거나,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현명하리라.

생긴 것과 달리 겁도 없고 배짱이 두둑한 아이렌이 그동안 어떤 사고를 쳐왔나 잘 아는 제이드는 충분히 성립될만한 거래 조건으로 상대를 유혹했다.

아이렌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교환할까요. 제가 선배 교실로 찾아갈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교환할 만한 사진을 새로 찍어서 가져올게요.”

“좋습니다. 절 위해 굳이 사진을 다시 찍으시겠다니. 기대되네요.”

 

과연 어떤 사진을 찍어 올까. 플로이드를 찍은 사진을 돌려받은 제이드는 이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상대가 볼 수 없는 각도로 고개를 틀어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첫 수업이 시작하기 전 2학년 E반 교실로 찾아온 아이렌은 불투명한 봉투에 담긴 사진을 내밀었다.

 

“선배, 여기요.”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이야. 어지간히도 플로이드 사진이 가지고 싶었나 보다.

제이드는 기꺼이 사진을 교환한 후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봉투를 가볍게 들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지금 내용물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졸음이 덜 가신 자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깃든다. 제이드는 그 기색을 읽곤,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무래도 자신을 위해 찍어 온 이 사진은 여러 의미로 걸작인 모양이다.

기대를 품고 봉투 안을 확인한 제이드는 ‘이런.’ 하고 입 모양만으로 감탄했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이렌이 찍은 사진에 담겨 있는 건 노을로 물든 해변과, 몰려오는 파도 위에 겹쳐진 누군가의 그림자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치마와 땋은 머리. 그 익숙한 그림자 주인이 누구인지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제이드는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최대한 언어를 고르고 골라 목소리를 내었다.

 

“늦게 외출하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큰 수고를 하셨군요.”

“제가 마법은 못 써도 이건 잘 쓰잖아요.”

 

검지를 세워 제 입술을 톡톡 치는 아이렌의 모습이 퍽 짓궂게 느껴진다. 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걸 애써 참은 제이드는 사진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역시 아이렌 씨의 사진은 좋군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이런 귀여운 플로이드 선배의 모습은 귀하니까요. 아, 제이드 선배의 사진이라 더 좋은 것도 있고요.”

“그거 기쁜 말이군요.”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사진은 소중히 간직해야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은 그렇게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음? 이거 뭐야?”

 

소리소문없이 나타난 제삼자가 아이렌 손의 사진을 빼앗는 것으로 인해, 발이 묶이고 말았다.

발소리도 내지 않고 아이렌의 뒤로 다가왔던 플로이드는 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곤 눈썹을 까딱였다.

 

“엑, 대체 언제 찍은 거고?”

“프, 플로이드 선배?”

“이거 제이드가 준 거야?”

 

시간적 배경은 추정이 안 되지만, 공간을 보아하니 자신들의 방에서 찍은 건 분명하다. 아이렌이 제 방에 놀러 왔을 때 이러고 잔 기억은 없으니, 아마 촬영자는 제이드일 터.

플로이드의 추리는 옳았고, 제이드는 순순히 자신의 소행임을 인정했다.

 

“제가 찍었습니다, 플로이드.”

“근데 이걸 왜 아기새우에게 줘?”

“가지고 싶어 하셔서요. 드린 게 아니라 교환한 거지만.”

“뭐랑 교환한 건데?”

“아이렌 씨가 찍은 사진이죠.”

 

제이드는 불투명한 봉투에 도로 집어넣어 무엇이 찍혔나 알 수 없는 사진을 보라는 듯 팔랑거렸다. 그 행동에 약이 오른 플로이드는 이번에도 냅다 물건을 채가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이렌과 달리 제이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번의 헛손질 끝. 결국 참지 못한 플로이드가 불평을 내뱉었다.

 

“나도 볼래.”

“안 됩니다. 이건 제 거니까요.”

“내 사진으로 교환해 놓고 나한테 안 보여준다고?”

“하지만 저 사진은 제가 찍었으니까요.”

 

아무리 형제라 해도, 정말 쥐어짜 버리고 싶다.

플로이드는 얄미운 제이드를 노려보다가, 목표물을 바꾸었다. 무엇이든 제가 바라면 들어주는, 다정하고도 무른 사람에게로.

 

“저기, 아기새우야. 나도 사진 줘.”

“예?”

“내 사진이잖아, 이거. 그러니까 나도 줘야지.”

 

이건 억지인가, 정당한 요구인가. 사실 아이렌에게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플로이드가 원한다면, 줄 수밖에 없지.

오래 고민할 이유가 없는 아이렌은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 그럼 내일 인화해 올게요.”

“약속한 거다? 제이드한테 준 사진 그대로 줘야 해, 알겠지?”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제 사진을 아기새우에게 돌려준 플로이드는 제이드를 째려보았다.

자신이 얄미운 짓을 했다는 건 아는 제이드는 뻔뻔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입니까? 절 보러 온 게 아니었나요.”

“아 맞다, 아줄이 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정말 볼일이 있던 플로이드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솟아나던 짜증을 잊고 말았다. 이때만큼은 그가 기분파라는 것이 감사해진 아이렌은 돌려받은 사진을 고이 챙겨 넣고 1학년 A반 교실로 돌아갔다.

 

‘안 뺏어가셔서 다행이네.’

 

만약 뺏겼다면 되찾기 힘들었을 수도 있을 텐데. 제가 찍은 사진 쪽으로 신경이 쏠려 다행이다. 한숨을 푹 내쉰 그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찍힌 사진을 소중한 보물 대하듯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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