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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난 건 수업이 시작하고 30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학생들은 한창 떠들썩하게(그들은 한 번 조용히 하라고 해서 잘 알아듣지 않는다. 늘 그렇듯.)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체 없이 미술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얌전히 서 있는 사람은 2학년 4반 담임이자 수학 과목을 맡은 권 선생이었다. 권 선생은 화빈을 보자마자 피곤한 기색을 조금이나마 걷어내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도 쌤, 밖에서 촬영 중인데 이제 슬슬 차례 온다고 해서요.”

“아. 오늘 졸사 찍는 날이었죠. 잠시만요, 나갈게요.”

 

졸업 앨범에 올라갈 사진을 찍는다는 말은 월초에 전달받았지만, 선생 일이라는 것이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업무 바깥에 놓여있는 일은 아무래도 잘 잊히는 편이었다. 권 선생이 끄덕이고 기다리는 사이 화빈은 반장에게 수업 시간 지나면 알아서 반으로 돌아가면 되니 큰 소리 안 나게만 해달라는 가벼운 부탁을 했다.

바로 문으로 나가려던 화빈은 순간 멈칫했다. 가져갈까, 말까. 잠시간 고민하다가 한쪽에 놔뒀던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었다. 학생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 뒤편에 마련된 정원은 졸업 앨범 사진을 찍을 때쯤이면 촬영 스튜디오로 변했다. 교내에서 특별히 사진을 찍을 구석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일한 지 오래되지 않은 화빈의 눈에도 이맘때의 정원은 제법 푸르고 아름다웠다.

화빈은 정원으로 나서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파란 하늘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양 펼쳐져 있었지만, 화빈의 시선은 어디에 얼룩이라도 없는지 뜯어보는 듯 따가웠다.

 

“쌤?”

“…아, 죄송해요. 그나저나 오늘 단체 사진까지 다 찍는 거죠?”

“네. 전 교직원 전부 찍는 단체 사진이 마지막이에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촬영을 마친 다른 사람들도 마지막 촬영 전까지 이 뙤약볕 아래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다. 극상의 비효율에 화빈은 메마르게 하하 웃을 뿐이었다. 권 선생도 따라 웃었다.

손차양을 하고 촬영이 진행되는 곳을 바라보며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매켄지가 눈에 들어왔다. 과연, 태양이 어울리는 남자는 이런 순간에도 쾌청하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속은 반대에 가깝겠지만. 화빈이 쓴웃음을 짓는 순간 절묘하다시피 그가 고개를 돌렸다.

 

“하이, 권 쌤. 화빈 쌤.”

 

안녕하세요, 매켄지 쌤. 권 선생이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는 동안 화빈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전부였다. 그와는 아침에 이미 비밀스럽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었고 권 선생은 두 사람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직장 동료 이상으로 친근하다는 사실을 알아챌 정도로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었으니 이 정도라면 괜찮을 터였다.

매켄지는 화빈의 인사를 보고 작게 키득거렸다. 아까와는 웃음의 결이 달랐지만, 그 또한 화빈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은밀했기에 그가 자신의 연인에게 아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았다. 오늘은 날이 정말 덥네. 화빈은 손가락 틈 사이로 들어온 햇볕 탓에 눈을 깜빡였다.

 

1학년부터 3학년 담임까지 사진을 찍고, 다음은 담임을 맡지 않은 선생들 차례였다. 음악 선생을 이어 원어민 선생이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사진을 찍고, 화빈이 그와 교대하듯 카메라 앞에 섰다. 매켄지는 이 순간에도 장난스레 웃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찍습니다. 사진 기사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투두두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익숙한 화빈은 갑자기 찾아온 빗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아쉬울 뻔했지. 갑작스레 흐려진 채 물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화빈은 가장 느리게 비를 피했다.

 

“이제 몇 명 남았죠? 단체까지는 찍어야 하는데.”

“어차피 여우비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 보죠.”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 안쪽에서 선생들이 단체로 웅성거리는 모습은 학생들에게 있어서도 별난 모습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엄한 사람도 있었으니 다가와 말을 걸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화빈은 머리카락에 적게나마 달라붙은 물기를 가만히 털어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구태여 기분이 상할 이유는 없었다. 일일이 신경 쓰기엔 지금까지 지나온 빗물들이 많았으므로. 하지만 이와 별개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연인을 찾기 위해 시선이 움직이는 건 잘 제어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켄지는 뒤쪽에 서서 화빈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 웃어 보였지만, 방금까지와는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었다. 화빈은 잠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매켄지의 근처에 섰다.

 

“왜요?”

“But, you… 비 오는 거 싫어하잖아요.”

 

화빈이 나직하게 묻자, 매켄지가 딱 상대에게만 들릴만한 목소리로 답했다. 싫어하는 정도는 아닌데. 아닌데… 말이 나오다가 끝이 흐려졌다. 화빈의 기분을 기민하게 알아채는 매켄지는 속으로 역시, 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햇살 아래에서 수줍게 웃어 보이던 얼굴은 정말이지 딱 좋았다. 지금처럼 미지근하게 음울한 표정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인 건 알아도 불행한 꼴을 직접 보면 배알이 뒤틀렸다. 사람이 많아 기분을 풀어줄 만한 개수작도 부리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비를 그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매켄지는 요술을 부리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남들을 속이는 사기꾼이었지.

 

매켄지가 가볍게 불퉁해진 얼굴로 서 있으려니(사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쾌활한 원어민 교사의 얼굴이었다.) 화빈이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 아직 비가 내리는 정원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괜찮겠다 싶어 주머니에 있던 걸 조심스레 꺼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만 알아볼 행동이었기에 손에 들린 게 무엇인지 알아챈 사람도 매켄지뿐이었다. 그는 화빈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반지를 보자마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기침하는 척을 해댔다. 아마 웃음이 터지는 소리를 가리려고 한 듯 보였다. 화빈이 가져온 반지는 입을 가리고 있는 매켄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것과 똑같았다.

매켄지야 별 상관없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화빈은 직장에서,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단은 비밀 연애 중인 두 사람은 학교 안에서 커플링조차 반쪽짜리가 됐다. 적어도 지금은 예외인 듯싶었지만.

 

“잘 어울리네요.”

 

매켄지가 머쓱한 듯 자꾸만 자기 손을 쓰다듬는 화빈에게 작게 속삭였다. 놀리는 말투였지만 실상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애인을 향한 밀어에 가까웠다. 낯이 뜨거운지 눈을 빠르게 깜빡이는 화빈이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어, 어차피 졸업 앨범 보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아서요.”

 

원래는 바빠 보여서 할 틈이 없었는데, 비가 내려서 시간이 남으니까 준비하면 될 것 같다고 생각해서요… 뒤로 이어지는 말들도 비슷했다. 애틋한 감정을 채 숨기지 못해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매켄지는 그래요, 그래. 히죽대는 주제에 아무 일도 아닌 척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비 그쳤네요. 마저 찍고 빨리 들어갑시다.”

“어휴, 금방 그쳐서 다행이네요.”

“아까 누구까지 했었지? 도 선생이었나?”

“네, 제 차례에요.”

 

비가 그치자 촬영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화빈이 피사체가 되어 카메라 앞에 서자 시선이 모여들어서 괜히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매켄지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어색했는지도 모른다. 화빈은 사진 기사의 말대로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고,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그리고 손은… 그냥 앞에 다소곳하게 모으기로 했다. 흔해빠진 포즈였지만, 끼고 있는 반지는 또렷하게 사진에 담길 정도였다.

 

해가 바뀌면 졸업 앨범이 나오겠지. 기실 화빈은 학생 시절에도 앨범을 모으는 취미가 없었다. 어차피 좋아서 찍은 것도 아니거니와 특별한 추억이 담긴 물건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번에는 꼭 앨범을 신청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의 곁에서 함께 페이지를 넘기고 싶었다. 어떻게 찍혔는지 함께 보고, 오늘을 회상하며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란히 웃어버리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까. 반지를 낀 자신의 사진을 웃으며 볼 수 있을까. 한치 앞도 확신하지 못하는 화빈은 순간마다 불안해했다. 그래도 반지를 끼고 사진을 찍기로 정한것에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검은 카메라 렌즈 너머, 아마도 화빈을 가장 잘 볼수 있는 자리에, 그가 햇빛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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