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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또 말썽이네…”

 

 

 

채유하는 제 앞에 놓인 카메라를 든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루이틀 쓴 카메라가 아니니 어딘가 고장났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제 손에 익숙한 카메라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바꿔야 한다면 저에게 있어 의미있는 사진을 찍고 보내주는 게 사진사의 도리 아닌가. 물론, 이는 저만의 생각이다. 매순간 카메라를 바꿀 때마다 마지막으로 인화할 사진은 특별한 순간으로 골랐다. 그러면 마음 편히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실제로 몇 번 그렇게 한 뒤에는 어떠한 물건에 애착이 생겨도 카메라만큼은 마음 편히 보내줄 수 있었다. 너무 거창한가? 그러니 오늘도 의미있는 사진을 남기기 위해 모델 하나를 초청해 마지막 사진을 찍고자 했다. 생각보다 더 말썽인 탓에 골머리를 썩고 있지만. 제가 앞에서 불평을 내뱉자 이가 목소리를 내었다. 오늘 제가 초대한 모델은 바로 백지한이었다.

 

 

“천천히 해. 시간 많아.”

“백지한 씨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같은 심정일까요…”

 

 

앞선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왔다는 말에 놀란 저는 취소를 다시 취소하라고 독촉할 지경이었다. 어떤 사람이 사진사 모델 한 번 해주는데 미리 잡힌 일정을 취소하냔 말이다. 카메라가 더 망가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촬영을 하고 싶었지만, 그의 일정에 영향을 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제가 아는 백지한은 상당히 극단적인 사람이긴 했다. 분명 그의 말로는 취소해도 괜찮거나 미뤄도 괜찮고, 정말 쓸모없는 약속이었다고 하나 그게 제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가 책임감 없이 일정을 취소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그의 이미지가 망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빨리 끝낼테니 다시 그에게 취소한 일정을 잡아달라고 사정하자 정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과 제 부탁이니 들어주겠다는 태도에 한숨을 쉬었다. 다시 잡는 일도 상대방에게는 어이없으려나… 백지한이야 그 일정들보다 제가 더 중요하다고 할테고. 그를 말릴 재간이 없기 전에 빠르게 카메라를 손보고 다시 촬영에 들어가야만 했다.

 

 

 

*

 

 

 

“모델이 되어줄래요?”

“내가?”

“…사진에 찍히는 건 별로 안 좋아해요?”

“일단, 언론에 나간 적도 없을 정도니까.”

“그럼 누구한테 부탁을…”

“아니, 내가 해. 네 부탁이잖아.”

 

 

제 말을 자르고 대뜸 답하는 말에 권유했던 제 쪽에서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얼굴 없는 CEO라는데,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저는 얼른 누군가한테 보여줄 생각은 아니고요, 라는 말을 덧붙였다. 뒤늦게 그 말이 저혼자만 볼 사진이란 말과도 같다는 걸 알았지만,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진짜 저만 볼 생각이기도 했고. 애초에 사진점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회사 내 사진사로 소속된 제가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찍는 사진을 어딘가에 쓸 수 있을리가 없었다. 정식으로 계약된 사람이나 물건을 찍는 일이지. 뭐, 그가 한 인벤스트먼트의 CEO라는 걸 밝히고 찍는 사진이라면 쓸모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욕심을 제가 채울리도 없으니 그에게 모델을 부탁한 건 정말 개인적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 좋아하려나, 생각이 들면 다시 백지한이 입을 열어 저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언제가 좋아? 너한테 맞출게.”

“저보다 바쁜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요. 제가 맞출게요.”

“아니, 내가 맞추는 게 나아.”

 

 

*

 

 

그렇게 완고한 고집 끝에 제 일정을 말해준 후, 자주 이용하는 스튜디오를 예약하고 오늘 다시 만난 일이었다. 몇 시에 돌아가야하냐는 제 질문에 전부 취소했다는 답이 돌아와 또다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 게 몇 분 전의 일이고. 카메라의 상태가 아무리 안 좋아도 몇 장 찍고 말 예정이라 시간도 오래 잡아두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시간을 늘리는 게 나을지 고민을 하며 다시 카메라를 붙잡자 오늘따라 달라보이는 백지한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사진사마다 다르지만, 때때로 사진을 찍으며 모델의 긴장을 풀게 하거나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말을 종종 거는 경우가 있었다.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말을 쉽게 얹는 쪽은 아닌지라 방향성만 틀어주는 게 전부였다. 피사체의 대부분은 물건이기도 했으니 지금처럼 말을 걸며 사진을 찍는 일은 특별히 부탁받은 경우 뿐이었다. 그러니 오늘도 별 말 없이 사진을 찍을 줄 알았는데. 백지한이 정장을 입지 않고 온 순간부터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카메라에 그를 담고 살펴보니 달라진 점이 눈에 확 띄었다. 저는 셔터를 누르고 자리를 바꾸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좀 달라보여요. 제 기분 탓이에요?”

“아마… 아닐걸.”

 

 

아마 아니라는 건 정말 꾸미고 온 걸까. 제 질문에 짧게 답하면서도 뭐가 부끄러운지 어설픈 말에 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이어서 찍기 시작했다. 저도, 카메라도 편해진 건지 막힘없이 찍히는 사진에 비해 백지한의 모습은 어딘가 뻣뻣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설마…

 

 

 

“긴장했어요?”

“조금. 네가 바라본다고 생각이 들어서.”

 

 

 

당연하지 않냐며 답하는 탓에 결국 저는 소리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정말, 그가 저를 좋아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탓이었다. 제가 본다니 꾸미고, 긴장하고. 연인도 많았을 법한 이에게 연인 하나 없이 저와 처음 하는 일이 많다니.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면, 제 웃음에 부끄러워하기보다 따라 웃는 그가 눈에 들어와서. 저는 결국 셔터를 여러 번 누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스튜디오를 정리하며 백지한을 붙잡았다. 제가 본다고 꾸몄으니 뭐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모델도 해주고, 카메라도 기분 좋게 떠날 거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올리가 없었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은 헷갈리는 게 너무 많았다. 제가 이무기의 신부가 되지 않으면요? 그 질문에 돌아올 답이 우리의 운명이 끝났다라면 저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백지한에게서 너무 많은 걸 받은 탓이었다. 제게 붙잡힌 채 아무 말 없이 저를 기다리는 백지한은, 오직 저라는 이유만으로 시간을 기다려주는 이였다. 그것만으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좋을텐데. 저는 모델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사회성 미소를 지으며 할 말을 골라 내었다.

 

 

“사진, 보내드릴까요? 되게 잘 나왔어요. 카메라도 힘내줬나봐요.”

“너랑 찍은 사진도 아닌데 내가 뭐 하러.”

“그래도요. 없으면 아쉽잖아요.”

“…할 말은 그뿐이야?”

 

 

제 표정이 평소랑 다르다는 걸 알아챈 건지 되묻는 말이 돌아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할 말은 많아요. 앞으로 우리가 보낼 시간에 대해서도, 제가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어떠한 것도 물을 수 없고, 어떠한 답도 듣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백지한은 제가 설화계에서 멀어지길 바라는 사람이니 모든 걸 알려준 적은 없었다. 그럴 바에는 혼자 알아내야만 했다.

 

 

 

“저 혼자 가지는 건 괜찮아요?”

“내 사진?”

“네, 일단 제 작품이잖아요.”

“네가 원한다면.”

 

 

예상한 대답이었다. 비록 묻고 싶은 질문은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았다. 언젠가 알아낼 일이다. 제게 놓인 상황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이 순간에는 서로에게 일상이 되고 싶었다. 설화계하고 상관없는 둘만의 일상. 우리가 어떠한 이유에서든 만났다면 지금처럼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을테고, 그럼 이 상황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는 여전히 웃어보였다. 억지로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사진은 갖고 싶기도 했으니까. 허락은 받았으니 집에 가서 확인만 하면 될 일이었다. 마지막에 저를 보고 웃어주던 그 얼굴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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