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번 파괴될 뻔 했던 세계는 어느 용감한 트레이너의 활약 덕분에 평화를 되찾았고, 잘못되었던 모든 것들은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마그마단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세계를 원래대로 돌리기 위한 단체로 탈바꿈 하였고, 호연지방에 떨어질 예정이었던 거대운석도 무사히 우주공간에서 파괴되어 아름다운 유성쇼만 남기고 가버렸지.
그야말로 동화책 끝에 나올 법한, 해피엔딩의 예시 같은 나날이다. 하지만 자신은 어째서 이렇게도 기분이 들뜨지 않는 걸까.
미염은 해안가의 바위에 앉아 하릴없이 바다만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언니와 어떻게든 화해를 한 것에 대해선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뜸 가족과 연락을 끊고 잠적하더니, 알고 보니 마그마단에서 과학자로 일하고 있었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마그마단도 마음을 고쳐먹었고, 언니와도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쌓인 감정을 풀었으니 더 이상 제가 걱정할만한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풀렸는데 어째서 이렇게 침울한가. 사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미염은 그 이유를 해결할만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이제 뭘 하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이나 도와주며 살던 자신이 갑자기 집을 떠나게 된 것은 다 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이 걱정하니까, 자신도 걱정되니까, 혹시 언니가 나쁜 일이라도 저지르진 않을까 염려되어 무작정 여행길에 올라 수소문을 하고 다닌 것이었지. 즉, 지금 목적을 달성한 그는 달리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고민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역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을 도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어차피 자신은 체육관 배지 8개를 모으는 것도 벅찼던 그저 그런 트레이너니까, 포켓몬 리그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베테랑 트레이너를 목표로 삼는 것도 아니니, 모험을 그만 두는 것에 큰 미련을 가질 건 없다. 분명. 그래야 할 텐데.
“미이!”
“응?”
멍하니 푸른빛을 두 눈에 담은 채 생각에 잠겨있는 미염을 부른 것은 비늘의 광택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밀로틱이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이 아름답게 헤엄치며 다가온 밀로틱은 미염이 앉은 바위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 너구나.”
익숙한 포켓몬의 등장에 은은한 미소를 지은 미염은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추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느낀 밀로틱은 묘하게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누가 시키기도 않았는데 화려한 수중쇼를 보여주며 제 자태를 뽐내었다.
‘와아.’ 어린아이 마냥 미염이 감탄하자, 또 한 명의 배우가 물결치는 무대로 뛰어 들어왔다.
“아.”
감탄사와 함께, 무늬가 아름다운 왕콘치가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튀어 오른다.
서로를 향해 빙글빙글 도는 우아한 물 포켓몬의 주변으로 튀는 물방울들이 대기 중에서 보석마냥 반짝반짝 빛나자, 어느새 어두웠던 미염의 얼굴에도 밝게 화색이 돌았다.
“후우, 드디어 웃었네.”
왕콘치와 밀로틱의 공연에 한눈 팔린 사이, 어느새 제 옆에는 두 포켓몬의 주인이 다가와 있었다. 한 여름의 해변보다도 눈부신 상대의 용모에 잠깐 숨을 삼킨 미염은 도망치듯 시선을 피해버렸다.
“유, 윤진 씨. 체육관은요?”
“트레이너가 하도 안 와서 잠깐 산책 나왔지. 저 애들도 심심해하더라고.”
“아하….”
뭐라고 말을 이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니, 말은 고사하고 심장이 뛰어서 눈도 마주칠 수 없다. 미염은 고개를 숙인 채 제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루네시티의 체육관 관장이자 루네민족의 사명을 받은 이. 호연지방에서 제일 잘나가는 콘테스트 스타의 외삼촌이자 호연리그 챔피언의 친우. 그리고, 제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
이 남자를 표현할 말은 많지만, 미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마지막 수식어였다.
“무슨 고민 하고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닌데.”
“아뇨, 그냥…. 별거 아녜요.”
“혹시 언니 문제 때문에 그래?”
“아녜요. 그건 아니고….”
그와 처음 만난 건 한창 언니를 찾아다닐 시절이다 보니, 저런 질문부터 나오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살며시 고개를 저은 미염은 문득 그와의 첫만남을 떠올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무작정 집을 떠나 대책 없이 마그마단 조무래기들을 수소문 하고 다닐 때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언니도 만나지 못하고, 만난다 해도 제대로 화해하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생각하는 걸 그대로 언니에게 말하면 되는 거야. 두려워하지 마.’
그 격려의 한마디에 제가 얼마나 큰 용기를 얻었는지, 윤진은 아마 모르겠지. 물론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 마음을 알게 되는 건,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냥, 슬슬 집에 가야 할까 싶어서….”
“그렇구나. 돌아갈 거야? 아쉽네.”
“아, 아니. 확정은 아니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포켓몬 센터의 숙소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 같기도 해서….”
“음…. 돌아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는 거구나?”
어떻게 이렇게 빙빙 돌려 말했는데도 딱 맞추는 걸까. 미염은 고개를 번쩍 들고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러면 제 놀란 표정이 다 보이겠지만, 어차피 제 마음도 눈치 채는 사람이니, 보이지 않는다 해서 표정을 못 읽을 리도 없다. 그리고 미염은 낯가림이 심하긴 했어도, 해봤자 소용없을 짓을 할 정도로 바보 같은 사람은 아니었지.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까지 여기 머물러도 좋지 않을까? 난 네가 떠나면 쓸쓸할 것 같은데.”
“…정, 말요?”
“응. 네가 있어서 저 애들도 얼마나 기뻐하는데.”
윤진은 제 포켓몬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아, 빈말이라도 참으로 듣기 좋은 소리다. 귀 끝 까지 얼굴이 빨갛게 물든 미염은 횡설수설 손을 내저었다.
“하, 하지만 너무 오래 포켓몬 센터 숙소의 방을 차지하는 것도 좀…!”
“그럼 우리 집에서 같이 살래?”
“네?!”
‘관장님! 도전자예요!’ 비명 같은 미영의 물음에 답한 건 루네시티 체육관 소속의 트레이너였다. 아무리 인생은 돌발 상황의 연속이라지만,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돌아갈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어깨를 으쓱인 윤진은 왕콘치와 밀로틱을 몬스터볼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진지하게 권유한 거니까, 잘 생각해 봐.”
상대가 얼마나 놀랐는지 감히 짐작도 못할 윤진은, 그렇게 한 번 더 제 발언에 못을 박고 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미염은 얼빠진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슬그머니 제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진심이겠지, 이거…?’
제가 저 거절을 제안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어쩌다 보니 생긴 더 심각한 고민에 미염은 다시 바다만 바라보며 한숨을 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