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왈츠] 이상 :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상태.
w. WaltZ
* BW 엔딩 이전의 이야기. 원작과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
당신은 늘 이상에 가까웠습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과 반할지라도 가여운 아이들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또 그들을 위한 방패가 되어주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지시면 안 돼요.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그를 버렸고, 내 신은 결국 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내게 남은 제 친구들을 남긴 채로. 그렇게 떠나버렸다. 당신이 있던 위가 아닌 아래 밑바닥에서 기다리던 나와 이 여린 아이들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다시는 찾을 수 없게 꼭꼭 숨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당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뿐이었고 당신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딜 수밖엔 없었다. 난 그저 그런 존재였으니까.
* * *
그를 만나기 전, 난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부모님께 받은, 혹은 직접 잡은 포켓몬들을 한 마리씩 들고 파트너란 이름 아래 여행길에 오르고 포켓몬 리그에 도전할 때 난 그저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엔 없었다. 조금만 햇볕을 쬐며 걸어도 금세 휘청거리며 정신을 놓아버리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니 부모님의 극진한 관심 아래 난 철저히 혼자가 되어갔다. 그런 상황에 포켓몬이 무슨 말이야. 그냥, 지금으로 만족해야지. 포켓몬은 TV를 통해 보는 거로 충분해.
처음 제 포켓몬을 만난 날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세찬 비가 쏟아지던 여름이었다. 쌍용시티 곳곳에 깔린 배수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듯 바닥엔 질척거리는 빗물들이 퍼져있었는데 마을이 이럴 정도면 분명 강가는 불어나서 넘실거릴 게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내 방 창문은 지금의 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종종 이런 날이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그 아이를 보기 전까지.
어디에서부터 휩쓸려 왔는지 모르겠지만 급하단 건 알고 있었다. 다급하게 하나뿐인 비옷을 걸치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면서도 쏟아지는 빗물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를 밟아가며 강가로 향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네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벌써 하류까지 떠내려간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 강 한가운데 모여있는 바위틈 한가운데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널 보았다. 안색이 파리한 게 독 타입 포켓몬에 당하기라도 한 것인지 넌 금방이라도 숨을 멎을 거 같은 얼굴로 강가에 선 날 올려다보았다. “ 구해줘. 도와줘. ” 넌 마치 내게 이리 말하는 거 같았고 그런 네게 홀린 듯 난 어디선가 긴 나뭇가지를 구해와 너에게 뻗었다. 넌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점점 제게로 다가오는 나뭇가지의 끝 부분을 잡았고 난 온 힘을 끌어모아 천천히 널 거친 물속에서 건져내었다.
만약 내가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진 상상하기도 싫었다. 색색거리며 숨을 내뱉는 넌 내 품에서 축 늘어진 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이대로 비를 맞고 있다간 영원히 아득한 꿈 자락으로 가버릴지도 모를 일이었고. 하지만 너 역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의 포켓몬이었고 지금도 축 처져 있는 몸과는 다르게 날 바라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아까 그리 처절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가 맞는 지도 의문이었고. 그렇지만 방법은 없었다. 우비 주머니 깊숙하게 넣어둔 몬스터 볼을 꺼내어 원래 제 크기로 키웠다. 훗날 이 아이를 다시 야생으로 돌려보내야 하더라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겠지. 볼 안에 들어가 있으면 체력이 바닥나도 기절하진 않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네 머리에 몬스터 볼을 가져갔다.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네 몸체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굳게 닫힌 볼이 몇 번 움직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첫 포켓몬을 이런 식으로 잡게 될 거로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렇다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마을에 하나뿐인 포켓몬 센터로 발을 놀렸다. 적어도 간호순 언니께 너를 부탁하기 전까진 쓰러지지 말아 달라고 빌며 힘껏 땅을 굴렀다.
두 손에 네가 있는 몬스터 볼을 꽉 쥐고 제 몸에 부닥쳐오는 빗줄기를 뚫고 달렸고, 숨이 가쁘더라도 쉴 수 없었다. 턱 아래까지 숨이 막혀오고 토기가 올라오며 이제 한계라고 생각할 때 가까스로 포켓몬 센터가 내 눈에 보였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리를 놀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센터와 가까워지며 이윽고 안에 들어섰을 때 저 멀리서 놀라 한달음에 달려오는 간호순 언니가 보였다. 그리고 내밀었다. 제발 널 살려달라고. 그 이후론 까마득한 어둠만이 남아 어떻게 되었는지 더 기억나진 않지만. 가까스로 누군가 널 품에 안았던 것만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이었다. 아 역시 많이 무리했나 봐.
* * *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에 눈을 떠보니 낯이 익은 천장이었다. 목이 메 물이라도 마실까 해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니 네가 저 멀리 벽 구석에 숨어, 아니 사실 숨은 건지는 모르겠다. 구석에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흠칫하며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고. 너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침대 옆 서랍장에 가지런히 놓인 물병을 집어 그 옆 컵에 물을 따라 마시니 나름대로 정신이 또렷해지며 침대 머리맡에 자리 잡은 몬스터볼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네 몬스터 볼이지 않을까 싶었다. 옆에서 꼼지락거린 건 분명 너였을 텐데 어째서 아직도 한구석에 붙어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간호순 언니께서 널 무사히 치료한 모양인지 전보다 생기 넘치는 얼굴과 움직임이었다.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 곤율랭. 나는 왈츠야. 카게노 왈츠. ”
그림자 왈츠. 사실 이름으론 특이하지만 그래도 예쁘지? 하며 천천히 낮은 자세로 널 향해 갔다. 갑자기 다가가면 놀랄지도 몰라. 봐, 지금도 잔뜩 겁먹은 모양인걸. 몸이 덜덜 떨리는 게 많이 무서운 모양이었다. 조심스레 네 앞까지 다가가 무릎을 꿇어앉은 채 널 향해 손을 뻗으니 네가 눈을 질끈 감은 것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쉬, 괜찮아. 괜찮아. 당장은 힘들겠지만 네가 원한다면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게.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않으면 좋겠다. ”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넌 감은 눈을 뜨며 날 바라보았다. 아직 잔뜩 겁이 담긴 눈빛이었지만 적어도 아까보단 편해진 듯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길에 제 머리를 부비적거리기도 했으니 조금 친해진 거겠지?
“ 역시 나랑 널 여기까지 데려온 건 역시 부모님이려나. 내려가면 잔뜩 혼날지도 모르겠다. 곤율랭, 그래도 같이 내려갈래? ”
내 말에 넌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널 보며 한번 웃어준 뒤 손을 뻗어 널 들어 올리니 살짝 경직되는 게 다시 굳어진 거 같았지만 이내 편한 자세를 찾았는지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자리를 잡고 날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얘 꽤 무겁네. 손이 벌써 부들부들 떨리는 게 안고 다니려면 운동이라도 해야 하려나.
2층 내 방에서 내려와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이 잔뜩 화가 나신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이마를 짚으셨고 아빠는 ... 더 말하기가 힘드네. 저건 직접 봐야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이어진 잔소리는 내 품에 안긴 곤율랭의 꼬르륵 소리에 가까스로 끊어졌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같이 듣고 있자니 같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 번씩 날 바라보았고 나도 힐끔거리며 네 머리를 다시금 쓸어주었다. 그것도 잠시 배가 고픈지 작게 꼬르륵 소리와 함께 제 가죽을 들어 올려 부끄러운 얼굴을 숨기는 거 같았지만 귀여우니 뭐. 덕분에 부모님도 그제야 곤율랭 너에게 관심을 가져주셨고 조금 늦었지만, 저녁밥을 위해 잔소리를 무사히 넘겼으니 될 일이었다.
“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곤율랭. ”
감사의 의미로 볼에 입을 맞추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내 품에서 내려와 한 발짝 두 발짝 집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마치 탐색하는듯한 모양에 난 네 뒤를 따라 같이 집안을 거닐기 시작했고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맞추며 걸으니 금세 집 안의 분위기도 좋아졌다.
“ 간호순 씨가 말하기를 그 아이 꽤 멀리서부터 떠내려온 모양이더라. 네가 잡았다니 별말을 안 하겠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그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거나, 리그에 도전하겠다는 그런 건 절대 허락 할 수 없으니 그리 알아라. ”
“ 응? 그치만 이미 난 곤율랭과 약속한걸. 원래 있던 곳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기로. 그치? ”
아빠와 나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넌 내 다리에 찰싹 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렇게 벌써 정들면 나중에 헤어지기 힘든데. 그렇지만 빤히 내게 붙은 널 이제 와 밀어내기엔 이미 정이 들어버린 터라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날 떠나기 전까지 영원히 품에 안고 있어야지.
“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아직 몸도 약하고 지금 집을 나서기엔 너무 늦었어. 포기하거라. 그 곤율랭은 간호순 씨에게 부탁하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 ”
“ 그건 아빠 생각이지. 내가 예전처럼 마냥 약한 아이도 아니고 이제 다 컸는걸. 그리고 곤율랭은 내 포켓몬이야 아빠. 간호순 언니 포켓몬이 아니라. 그러니까 나랑 함께할 거야 쭉. ”
이미 친구인걸. 처음 너와 눈을 마주했을 때부터 느꼈어. 아, 네가 내 첫 번째 친구구나. 앞으로를 함께할. 너도 그걸 느꼈으니 지금처럼 내게 머물러 주는 거잖아. 이게 아주 잠시뿐이더라도. 그치? 우리가 같은 맘이었으면 좋겠다.
“ 일주일 정도 쉬다가 나설까 해요. 그때까지 곤율랭에 대해 공부도 좀 더 하고, 주박사 님이 정리하신 도감 책도 좀 읽고. ”
“ 카게노 왈츠! 아빠 말 똑바로 듣지 못, ”
“ 당신도 참. 뭐 어때요. 이제처럼 품 안에 가둬둘 나이는 지난 지 오래라구요. 제 친구랑 함께 떠난다는데 응원해줘야죠. 물론 왈츠는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왈츠에겐 곤율랭이 있잖아요. ”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복슝열매를 하나 들고 곤율랭에게 다가갔다. 곤율랭은 엄마가 다가오자 흠칫 놀라며 내 다리 뒤에 숨었지만, 엄마는 그에 개의치 않고 너를 향해 웃어 보였다.
“ 곤율랭. 아직 배고프더라도 이거 먹으면서 조금만 참으렴. 내가 아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줄게. 그리고 앞으로 우리 왈츠를 잘 부탁해도 괜찮을까? ”
엄마가 이 말과 함께 복슝열매를 너에게 내밀자 넌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손을 뻗어 열매를 받았다. 와삭, 거리며 열매를 먹던 넌 다시 내 다리를 꼭 붙잡았고 엄마는 그거로 답이 충분한 것인지 그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넌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
1주일이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너와 함께 거리를 거닐자 마을 사람들은 반갑게 웃으며 네게 인사했고 넌 부끄러운 듯 내 다리 뒤로 숨기 일쑤. 가끔은 품에 널 안고 다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넌 어리광 부리며 내게 매달렸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없는 내 앞에서만큼은 명랑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세상에 둘도 없는 애교 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면 금세 무서워 숨어 버리기도 했지만, 그 모습마저 내겐 귀여울 따름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찌나 용감한지 포켓몬 배틀을 용맹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이리저리 다쳐도 금세 웃으며 내게 달려와 안기는 넌 내게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두 번 다시 놓고 싶지 않은 그런.
한 번은 다른 사람들이 물었다. " 다른 야생 포켓몬도 잡아 보는 건 어때? " 으음. 그 질문에 난 그저 눈을 휘어지라 접으며 웃어 보였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언젠가 새 포켓몬을 잡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새로운 아이와 함께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직 난 너로 충분해.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좋겠다.
* * *
환한 빛이 일었다. 너의 몸을 감싼 빛들이 일렁이며 꿈틀거렸고 내 허리보다 작던 너의 몸체는 서서히 몸짓을 키워갔다. 나보다 작은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꽤 자란 모습에 얼굴 가득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언제쯤 진화할까 늘 궁금했는데 우리 여행의 끝자락에 드디어 빛을 발하는구나. 뇌문시티를 앞둔 지금 넌 진화를 이루어내었다. 한 발짝 더 강해진 모습에 감격스러워 널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자 넌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날 더 꼭 껴안아주었다. 전처럼 널 내 품에 안아 들고 다닐 순 없겠지만 이젠 더 듬직한 네가 날 안아줄 수 있겠구나.
그 어떤 포켓몬보다 멋지다. 곤율거니.
감격스러운 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나에 대한 소문은 아마 좀 더 다르게 변하려나. ‘ 곤율거니 하나만을 데리고 다니는 그림자의 선율. ’ 이름이 왈츠인지라 어느 순간 붙여진 이상한 소문이었다. 당시엔 다른 포켓몬들은 잡지 않고 곤율랭만 데리고 다녔는데 너 하나로 모든 포켓몬 트레이너를 꺾어 나간지라 가끔은 도전자라며 나타난 사람들도 있었다. 악을 쓰고 밟아 주었지만. 목표는 리그에 도전하는 게 아니다 보니 체육관들은 무시한 채 내 뇌문시티까지 오는 길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정이었다. 뇌문시티까지 오는 길은 험난했으며 그 사이 너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는 좀 더 단단해졌다. 아니,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넌 항상 내게 웃어주며 네 의사를 표현했지만 난 그런 널 보며 마냥 웃을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닐까, 혹여 내가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건 아닐까. 포켓몬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기에 대강 짐작한 것뿐이라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여느 트레이너라면 한 번쯤은 겪을 시기를 난 온종일 겪고 있었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지만 난 너를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이런 마음인데 나중에, 정말 헤어질 때가 다가온다면 널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네. 이런 마음 가져서 미안해. 이기적이어서 미안해.
뇌문시티를 지났다. 4번 도로의 초입에 서자 묘하게 네가 얼굴이 굳어진 걸 우연히 봐버렸다.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제대로 알고 싶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그저 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이마를 맞대었다. 영원히 이 순간이 지속하길 바라며. 그렇게 빌었다.
너의 발걸음을 점차 급해졌다. 마지막에 가서는 뛰다시피 걷던 널 난 그저 아무 말 없이 쫓아갈 수밖엔 없었고. 가족을 보고 싶어하는 널 오랫동안 보며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이 모습이 아마 네가 지금까지 가졌던 마음일 거야. 어쩔 수 없지. 예상했잖아. 뭘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이야. 처음부터 약속했던 거잖아. 내가 먼저 말했잖아. 내가.
가증스러웠다. 결국, 난 내 욕심으로 널 여기까지 데리고 왔구나. 나름 운명이라고도 생각했다. 너와 내가 만난 건 운명이야. 하지만 운명은 처음 내가 널 강에서 구했을 때, 그때까지가 운명적이었다. 포켓몬 센터에 데려가고 우리 집으로 데려오고, 함께 여행을 시작하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난 혼자 있기 싫은 내 욕심으로, 나도 포켓몬을 가지고 싶단 욕심으로 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사실 널 구하던 당시에 회복약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엔 구해주고 말려는 게 맞았지만 널 품에 안았을 때 모든 건 달라졌다. 내 호의가 의도된 호의라는 건 넌 영원히 모르겠지. 그러면서도 내 죄책감을 덜기 위해 가족에게 돌려보내 줄게, 라는 약속을 무작정 내뱉고 말았어. 난 널 이용한 거야.
“ 네 가족이야? 다시 만나서 다행이다. 그치. ”
곤율거니는 무사히 제 가족들을 찾았다. 이미 곤율랭에서 진화해버린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가족들은 너를 잊지 않았고 다시 돌아온 널 환영해주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너 역시 기뻐했고. 아, 이게 네가 내린 답이구나. 이제 알겠다. 그럼 앞으로의 너에게 방해되는 난 사라져줘야겠구나. 안녕이라고 말을 해야 하는구나.
이젠 끝이구나.
* * *
“ 포켓몬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서 찾아와봤더니, 혹시 저 아이는 네 포켓몬이니? ”
남자는 싸늘히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제 가족들을 만나 기쁨을 나누던 곤율거니를 피해 몸을 숨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는 듯한 네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귀를 틀어막았다. 울부짖는 소리 역시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네가 있을 자리는 내 옆자리가 아니잖아. 곧 잊어버릴 감정이니까.
“ 너를 찾은 저 소리를 들으면서도 여기 있는 거면, 넌 저 아이를 버린 걸까. 가냘프게 울며 네 이름을 부르는 저 아이를. ”
“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
“ 너야말로 저 아이를 제대로 모르는 거 아닐까 싶은데. 저토록 주인을 찾으며 울부짖는 포켓몬을 난 본적이 없어. ”
“ 주인이 아니야. 친구라고 나랑 곤율거니는. ”
“ 친구라서 버린 걸까. 모순이지 않아? ”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가 한 행동은 결국 널 버린 일이었으니. 내 멋대로 판단하고 결과를 내려서 끝내는 네게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하지 않고 몸을 숨겼다. 정말로 네가 나 대신 가족들을 택할까 두려워서 떠나버렸다. 당신의 말처럼 모순이라면 모순이겠지. 근데, 어째서 당신은 곤율거니가 뭐라 말하는지 아는 거야.
파트너인 나조차 알지 못하던 그 아이의 진심을.
“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듯한데 이쯤하고 모습을 드러내. ”
아니면 저 아이는 널 그리워하기는커녕 영원히 널 증오할지도 모르겠지. 어느 포켓몬이 자신을 버린 인간을 그리워하겠어. 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어. 그러니까 모습을 보여. 저 아이의 슬픔을 달래주라고.
남자는 내 등을 떠밀었다. 분명 그의 팔엔 힘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았지만 내가 느끼기엔 무겁기만 한 힘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몸을 내비치자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리던 너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얼굴을 하며 내게 달려와 안겼고 놓치기 싫다는 듯 제 팔에 힘을 주어 날 끌어안았다. 아, 이건 딱 보아도 알겠다. 지금 넌 내게 화를 내고 있어.
“ 어디를 갔다 온 거야. 날 두고 가버린 줄 알았어. ”
“ ... 뭐라구요? ”
“ 저 아이가 네게 하는 말이야. ”
남자는 잔잔하게, 아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나도 모르는 이 아이의 마음이라고. 만난 지 단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네가 어떻게 아는 거야.
“ 난 포켓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또 제대로 된 대화도 가능하지. 그러니 날 믿고 물어보고 싶은 걸 모두 물어봐. 그리고 그 이후에 결정해. 네가 하려던 모든 걸. ”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남자의 눈은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 같진 않았고 아니, 내가 그냥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 이제 내가 쓸모없어져서 날 버린 줄 알았어.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사라지는 게 어디 있어. ”
곤율거니는 내 앞에서 성을 내며 제 목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내게 전해주는 남자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 그래서일까 남자를 따라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곤율거니의 눈을 보며 말했다.
“ 내 이기심에 널 데리고 있는 게 아닐까 늘 생각했어. 가족들에게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나 때문에 그게 계속 늦춰지는 게 아닐까. ”
“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없잖아. 난 왈츠의 친구인걸. 그래서 더 어리광부리며 네게 매달렸는데 몰라줬구나. 내 잘못이야. 미안해. ”
알고 있었구나. 내 불안이 너에게 전해졌구나. 이 말을 듣자 벅찬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이기심에 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거지. 그 키를 가늠할 수 없었다.
“ 나는 왈츠가 좋아. 가족들을 다시 만나서 기뻤지만, 그보다 왈츠와 함께 여행하는 게 더 좋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게 해줘. ”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네 마음과 내 마음은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난 눈물을 글썽이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난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곤율거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 물어보고 싶은 말들은 가득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테니 더 확인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렇지만 일부러 말을 아꼈다. 네 진심을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받고 싶진 않았거든. 분명 저 남자는 내게 은인이나 다름없지만 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한걸.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한번 바라보곤 몬스터볼을 꺼내 곤율거니를 그 안으로 돌아오게 했다. 오늘은 조금 편하게 쉬는 게 좋겠지 싶어 내린 결정이었고, 곁에서 같이 길을 걷고 있는 이 남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기도 했다.
“ 나는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을 거야. ”
“ 뭐? 나 아직 아무것도 안 물어봤는데. ”
“ 그래. 그치만 물어볼 거잖아. ”
그건 그렇지. 남자는 묘하게 말을 아꼈다. 이따금 근처의 야생 포켓몬들의 얘기를 들어줄 뿐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잘 없었다. 심지어 난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 있잖아. 넌 이름이 뭐야? ”
“ ... N. N이라 불러. ”
“ 특이한 이름이네. 나도 별반 다르진 않지만. 그럼 N? 오늘은 포켓몬 센터에 도착하기 어려울 거 같으니 야영을 하는 게 어때? ”
N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괜찮은 곳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우자 N은 익숙하지 않은 듯 근처를 배회했다. 야영은 처음인가. 사실 생각해보면 포켓몬 트레이너도 아닌 거 같은데 말이야.
“ 조로아. 이제 나와서 이거 좀 먹어. ”
N은 나지막이 조로아라는 이름의 포켓몬을 불러내었다. 몬스터볼을 꺼내는 줄 알았지만,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 조로아라는 포켓몬은 인근에서 부스럭거리며 천천히 저를 들어냈다. 그리고 그 포켓몬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포켓몬이었다.
“ 진짜 조로아야? 세상에. 너 진짜 흔치 않은 포켓몬을 잡았구나?! ”
“ 잡은 게 아니야. 조로 아는 내 친구일 뿐이지. ”
N은 짐짓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곤 어쩐 일인지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N은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듯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고, 곁에 자리 잡은 조로아의 얘기를 시작할 땐 가만히 조로아의 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마지막 할 말을 고했다.
“ 나는 플라스마 단의 왕이야. 그리고 내 목표는 모든 포켓몬의 해방이다. 네 곤율거니조차도 모두. 더는 포켓몬들이 상처 입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난 내 이상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지.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가 포켓몬 해방이라는 이상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생각만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가 내게 말해준 제 과거는 비참했다. 비참하다는 이 말 한마디로도 차마 다 표현되지 못할 과거였다. 그는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과거로부터 이어진 자유의 억압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휘둘리는 거조차. 하지만 난 그의 이상에 동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진화한 곤율랭과 여행을 떠나는 날부터 포켓몬 트레이너들에게 휘둘려지는 포켓몬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일까. 분명 좋은 트레이너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포켓몬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포켓몬들의 해방, 어쩌면 좋은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냥 그 이상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그의 이상이 실현되면 난 곤율거니와 헤어져야 하니까.
“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처음인데. 어째서 네겐 이런 얘기를 쉽게 할 수 있는 걸까. 만난 지 단 하루도 되지 않은 사람인데. ”
“ 글쎄. 난 어디에도 있는 그림자라서? 농담이지만. ”
아 왠지 조로아가 이 말에 비웃은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N은 내 말에도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날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내 눈을. 그게 조금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저 시선은 느껴지는데 어쩌지.
“ 난 아마 그래. 두 번째야. 이상한 감정을 들게 한 사람. ”
“ 나 말고 한 명이 더 있다는 거네? ”
“ 그래. 그 아이도 너와 같았어. 그 아이가 데리고 있던 포켓몬이 말했지. 너무 좋다고. 처음 들어본 소리였다. 그래서 배틀을 통해 목소리를 좀 더 들었는데 변함없었어.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다시 떠나왔는데 이번엔 널 만났지. 네가 내게 두 번째로 마음을 동하게 한 자다. ”
“ 그 말은 난 네게 특별한 사람이라는 거야? ”
N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웃긴 소리지. 정말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특별한 사람이라니. 애초에 나조차도 N에게 아무 감정은 없는데. 지금이라도 정정해야겠다.
“ 그래. 조금은 특별해졌지. 그러니 왈츠, 나와 함께 내 이상을 지켜봐 주지 않을래? 나의 성으로 널 초대하지. 좀 더 너와 곤율거니의 소리를 듣고 싶다. ”
이상하게도 난 그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여서 그랬을까, 그저 이런 분위기에 취해서 그랬을까.
* * *
바람이 일었다. 큰 소리도 울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울렸다. 분명히 이 소리는 위에서, 당신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소란이리라. 하지만 난 아무 곳도 가지 못한 채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을 수밖엔 없었다. 당신은 한사코 나를 밖으로 내보내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옆은 아니지만, 근처에 머물러 주길 바랐다. 그래서 난 한구석에 숨어 그가 내게 맡긴 조로아와 함께 그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끝맺음 역시 바라보았다.
당신은 떠나기 전 나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홀연히 전설의 포켓몬 위에 올라타 구름 사이로 사라졌다. 모든 이들을 남겨두고 그렇게 떠나버렸다.
당신은 늘 이상에 가까웠습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과 반할지라도 가여운 아이들을 위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또 그들을 위한 방패가 되어주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망가지시면 안 돼요.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게도 그를 버렸고, 내 신은 결국 제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내게 남은 제 친구들을 남긴 채로. 그렇게 떠나버렸다. 당신이 있던 위가 아닌 아래 밑바닥에서 기다리던 나와 이 여린 아이들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어쩌면 다시는 찾을 수 없게 꼭꼭 숨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당신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뿐이었고 당신이 사라져 버린 자리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딜 수밖엔 없었다. 난 그저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제 마음 한 번 제대로 고백해볼걸. 그의 마음을 좀 더 들어줄걸. 나는 왜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걸까. 이미 그는 이곳을 떠나고 없는데.
“ 왈츠, 일어나세요. ”
“ N은 저희에게 당신을 부탁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요. ”
버베나와 헬레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들은 내게 한없이 다정했다. 어쩌면 그들이 더 슬플지도 모를 텐데 나를 위로했다. 그래, N과 난 특별한 사이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으니까.
“ 오늘이 지나면, N이 제 뜻을 이뤄낸다면 고백하고 싶었어요. ”
“ 알아요. 당신은 늘 저희에게 그 말을 해왔으니까. ”
“ N도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예요. ”
“ 알고있어도. 그래도 말하고 싶었는데. ”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대의에 혹여 내 감정이 방해라도 될까 꾹 눌러 삼키고 있던 이 감정을 모든 것이 끝난 오늘 고백하고 싶었다. 결국, 내 바람으로 남았지만.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넘쳤다. 손으로 거두어도 끊임없었다.
오죽했으면 내겐 늘 도도했던 조로아마저 가까이 와줬을까. 곤율거니야 말할 것도 없고. 마냥 이 자리에 주저앉아 울 수는 없었다. 나는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N을 찾아야 했다. 그를 찾아서, 찾아서 ... 뭘 해야 하지.
“ 답은 분명 왈츠, 당신 마음속에 있을 거예요. ”
“ 우리는 괜찮으니 그 아이를 찾아 다시 데려와 주세요. ”
“ N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이곳에서 멀리, 먼 어느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 당신이 찾아와주길 바라며. ”
이 말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미래의 일은 지금 생각하지 않기로. 널 찾아가기로. 나는 다짐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