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고서에 적혀있던 그걸, 사람의 이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당신을 칭하는 이름에서는 허무와 쓸쓸한 한기가 흘렀으니까, 듣자마자 대번에 당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예는 비천한 존재니까 이름도 고향도 가족도 남김없이 앗겨야만 한다. 우리 같은 노예 중 일부는 그런 것이 피에 물든 손에 마땅히 떨어지는 벌과 같다고도 여겼다. 죽은 줄 알았는데? 무심결에 그렇게 뇌는 내 앞에서, 지체 깨나 높으신 마법사라는 늙다리는 금색 실이 기묘한 모양을 그리며 수놓아진 로브 자락을 가벼이 흔들고 손을 몇 번 내저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에는 수정구슬이 들려있었고, 곧이어 당신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날개뼈 언저리를 덮는 길이로 잘려져 있었지만 그것에 감도는 자색은 1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가 레지스탕스로 추정되는 무리들에게 협력한다는 정황이 몇 차례 제국군에 의해 포착된 정황일세. 그를 찾아서 생포해 오라는-”
하도 발음이 새어 저게 사실은 저주의 주문이 아닌가 의심되는 늙다리의, 박쥐 울음소리같은 중얼거림 뒤에서 영주는 뒷짐을 지고 창 밖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 늙다리가 하는 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늙다리와 함께 온 남자가 제국에서 그를 생포하는 데에 내건 포상을 읊어주는 대목에서 흘금흘금 이 쪽을 곁눈질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주인의 눈길이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체 하면서 나는 그 늙다리에게 툭 던졌다.
“그런데, 마법사 님.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마수가 아니고 인간 한 명인데요. 저희 전문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데?”
“그 자가 무어라 불리는지를 읽었다면 그 자의 위험성은 충분히 알 텐데. 능력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그의 생포를 명할만치 이번 사태는 결코 가볍지 않네.”
“…….”
“자네가 그와 한때 알던 사이라고 해서 손 끝의 힘을 무르게 주었다간, 다음에 학살당하는 것은 자네가 될 게야.”
명심하게. 그는 레비아탄의 경지조차도 뛰어넘은 자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 늙다리는 영주의 지인이기도 했다. 영주에게 거두어져 창술을 배운 시간동안 나는 약 십 센티미터는 족히 컸고, 그 시간동안 늙다리가 저택을 방문하는 일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영주가 아닌 나를 용건이 있답시고 찾아 부른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용건은 그것으로 끝이었고 그 이후로는 사담이 이어졌으므로 나는 예를 갖추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가 데려온 사병 몇을 제치고 바깥으로 휑 나가보면 방금 전의 주제일랑 잊어버리라는 양 천진한 푸른 장미가 막 봉오리를 올리고 있었다. 마치 1년 남짓 전의 그 때처럼. 그래, 당신 머리가 허리께에 닿을만치 길었을 적에.
드래고니안 랜서가 되었어도 기본적으로 우리의 소유권은 제국, 그리고 우리를 거둔 영주에게 있었다.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마수를 사냥하고 국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번견의 일을 갖게 되고서는 영주는 우리들에게 퍽 관대해졌다. 하지만 그는 그런 명망의 변화보다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표정이 겨울 하늘처럼 무척 엷어도, 가끔 그의 붉은 눈이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을 좇으면 그가 무엇에서 휴식을 얻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꽃에 구멍 나겠어요.”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는 나보다 반 뼘 정도 키가 컸고, 말수도 적어서 어쩐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무뚝뚝한 형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연 말을 높이는 것은 경외심이라기보다는 입이 저절로 그리 움직였다고 말할밖에. 그는 처음에는 그 호칭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지만, 몇 번 반복되는 경칭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며 내 말에 가끔 드물게 응했다. 장미도 푸른 품종이 있던가? 목소리가 굉장히 나직했었으니까, 돌아보면 그것은 그저 혼잣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 왜 그렇게 신이 나서 대답을 했던 걸까. 지금은 쑥밭이 되었을 내 고향마을이, 장미로 유명했었기 때문인지. 내가 보다 잘 아는 것을 궁금해하니까 가르쳐주고 싶어서였는지. 쓸데없는 오지랖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가끔 제국 귀족가에서 마법이나, 그 외의 모종의 방식으로 꽃을 다양한 색으로 물들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눈을 나른하게 깜빡였다. 그만큼 가격대 또한 비싸다는 말을 덧붙이자 얼마 정도인지를 흘리듯 물었다가, 내가 내놓는 답에 잠깐 눈이 둥그렇게 변한 모습, 그때만큼은 나보다 동생이 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어지간한 금화 몇 푼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고,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길이 없는 푸른 장미. 그렇기에 불가능과 동시에 기적이라는 꽃말이 붙었다는 마지막 말에는 살짝 웃었던 것도 같다.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워낙에 잘생겼으니까 우수에 찬 얼굴도 멋지다는 생각만을 그저 했는데.
날 때부터 가진 자에게만 달라붙는 기적도 기적이라면.
어쩌면 영원히 답을 듣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이성적으로 인과를 따지는 것보다는 직감이 이끄는대로 오해하는 것이 마음 편할 때가. 그리고 씁쓸하게도, 높은 확률로 그것은 정말로 정답이었다고. 그렇기에 당신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 저택의 문턱을 다시는 넘지 않을 것을 안다. 내가 이 임무가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아는 것과 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