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든이여, 오늘 무슨 특별한 날인가?”
“응? 갑자기 왜?”
“아니, 거리에 유난히 꽃을 파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구나.”
제이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순찰중인 시내를 둘러보았다.
평소에는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모인 시장이, 오늘은 유독 꽃을 파는 행상인으로 붐비고 있다. 무언가 축제라도 하는 거라면 집안에서도 신전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을 터. 하지만 자신은 들은 바가 없으니, 역시 박식한 이에게 물어보는 것 외엔 방도가 없었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장미를 선물하는 기념일이라고 들었어.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런 기념일도 있느냐?”
“응. 최근에 생긴 모양이더라고. 전통적인 기념일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꽃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념일은 드무니까 다들 즐기는 게 아닐까.”
흐음. 묘한 감탄사를 내뱉은 제이드는 각양각색의 장미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장미에도 여러 색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색이 있었을 줄이야. 흰색이나 노란색 같은 건 그렇다 쳐도, 초록색이나 파란색 장미는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다.
호기심과 흥미, 그것에 패배한 제이드는 결국 순찰 중인 것도 잊고 꽃 가판대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오든은 두 눈을 빛내며 꽃을 살피는 동료를 보곤 따뜻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상대가 솔깃해 할 만한 제안을 해왔다.
“하나 사갈까?”
“응? 하지만 산다 해도….”
“메로스 님께 드리면 좋아할 것 같은데. 모처럼의 기념일이니까.”
“아….”
처음에는 그저 꽃의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긴 것뿐이었는데, 오든의 말을 듣고 나자 괜히 가슴 한 구석이 간질거리기 시작한다.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우왕좌왕하던 그는 주머니를 뒤져 커다란 보석 몇 개를 꺼냈다.
“몇 개나, 아니, 무슨 색이 좋겠느냐? 역시 종류별로 다….”
“진정해 제이드. 양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도….”
“메로스 님 방은 그렇게 넓지 않으니까, 너무 많이 드리면 오히려 곤란해 할지도 모르시고.”
확실히 친우의 말은 일리가 있다. 눈앞의 꽃을 죄다 사버리려 했던 제이드는 잠깐 머리를 식히고 질문의 시작으로 돌아왔다.
“그럼 몇 개가 좋겠느냐?”
“한 다발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한 송이라도 의미가 있을지 모르고.”
“으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제이드가 귀여웠던 걸까. 노점상의 주인은 흐뭇한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야, 누구에게 주려고 그리 고민 중이신가?”
“그게….”
“좋아하는 사람? 그런 건가?”
“어….”
아니라고 부정하기 힘든 질문이다. 덥석 긍정하기도 힘들지만, 그렇다고 부정할 수는 없는. 그런 질문.
아까 전 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제이드는, 오든과 상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누가 시키기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좋아하는 사람이지 않겠느냐! 싫어하는 이에게 누가 선물을 한다고! 애초에, 신전에서 별지기를 싫어할 사람은 없느니라.”
“아아. 그 흰 로브 쓰고 다니는 별지기에게 줄 건가?”
“어, 어떻게 알았느냐?”
“그거야 당신, 가끔 그 별지기랑 야시장 구경을 오곤 했잖아? 내가 기억력이 좋거든.”
의기양양하게 말한 상인은 제가 파는 장미들을 쭉 둘러보더니, 싱싱한 백장미를 한 움큼 꺼내들었다. ‘어디보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능숙하게 꽃을 손질한 상인은 활짝 핀 꽃부터 아직 피지 않은 꽃들 중, 곧 필 것 같은 봉오리들만 골라 앙증맞은 꽃다발을 만들어냈다.
“자. 이걸로 결정하라고. 그렇게 고민하다간 오늘이 다 가겠으니까.”
“이건…, 전부 봉오리지 않느냐?”
“어허. 다 이게 의미가 있는 거라고, 도련님.”
제이드에게 꽃다발을 넘겨준 상인은 고개를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호오.’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시큰둥한 표정을 거두고 감탄한 제이드는, 들고 있던 보석을 상인에게 주더니 저 멀리 뛰어가 버렸다.
“고맙네! 혹시 돈이 모자라거든 다음에 주겠네!”
“음? 아니, 모자라기보다 이건…, 잔돈 받아가야 하는 거 아니오?”
“이런…, 제이드!”
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갑자기 신전으로 돌아가 버리는 걸까. 오든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고 상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잔돈은 제가 전해줘도 될까요?”
“아아. 나야 상관없다만….”
“그런데…, 무슨 소릴 하신 거예요?”
“별 말 안했어, 그냥 꽃말을 좀 말해준 것뿐이지!”
그러고 보니 장미는 색에 따라서 꽃말이 달랐었지. 백장미는 보통 순결과 존경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게 뛰어갈 이유는 되지 않아 보이는데. 오든이 감을 못 잡겠다는 얼굴로 서있자, 상인은 힌트를 살짝 덧붙여 주었다.
“아, 참고로 봉오리는 조금 의미가 달라.”
“네?”
“내가 괜히 봉오리만 골라 준 게 아니라는 거지.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저기요, 이거 얼마예요?’ 다른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상인은 잔돈을 거슬러 주곤 노점으로 돌아갔다.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오든은 대량의 동전만 만지작거리다가 겨우 발걸음을 돌렸다.
우선 순찰을 마무리한 후 돌아가서 제이드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지. 영업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현명한 판단을 내린 그는 정말로 기뻐보였던 제이드의 얼굴을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메로스여!”
시장에서 신전까지 쉬지도 않고 뛰어온 제이드는 곧바로 별지기의 집무실에 들어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어어.’ 책상에 엎어져서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들을 바라만 보던 메로스는 갑작스러운 손님에 놀라 바보 같은 감탄사를 내고 말았다.
이 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걸까. 조금 멍한 얼굴로 제이드를 바라보던 메로스는 한 박자 늦게 상대의 말에 답했다.
“제이드? 순찰나간 거 아니었어?”
“줄게 있어, 잠깐, 들렀도다!”
“…뛰어왔어? 숨이 거친데….”
이렇게 급하게 온 거라면 급한 일이 아닐까 걱정된다만, 표정이 밝은 걸 봐선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닌 모양이다. 나름의 판단을 내린 메로스는 걱정 반 반가움 반의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무슨 일로 왔던, 힘들어 보이는 제이드의 땀부터 닦아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거라도 마실래? 아니면….”
“이거!”
손수건을 꺼내 부드러운 뺨을 닦아주던 그때, 무언가가 제 눈앞에 내밀어진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뺀 메로스는 시야 가득 차오른 새하얀 색들이 제게 유해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장미?”
“받아주게, 선물이네!”
“이걸? 나한테?”
“오늘은 장미를 선물하는 날이라고 들어서…, 그, 그것뿐이었네! 나는 다시 가겠네!”
“엥? 잠깐, 제이드? 제이드?!”
급한 일이라는 게 이거였단 말인가! 메로스는 얼떨결에 받아든 장미 꽃다발과 멀어가는 제이드를 번갈아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꽃이라니.”
오늘이 로즈데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메로스는 주변에 수다쟁이가 많아서, 여러모로 소식이 빨랐으니까. 하지만 설마 제이드에게 꽃을 받게 될 줄이야.
조금만 더 있으면 필 것 같은 앙증맞은 꽃봉오리들을 눈으로 살피던 그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귀엽다니까, 정말로.”
‘그냥 기념일이라 준 거겠지. 괜한 생각 말자.’
선물한 이의 마음을, 그리고 제 품에 안긴 장미의 꽃말을 알 리 없는 메로스는 터덜터덜 제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