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를렌 르블랑은 나이에 비해 영민한 소녀였다. 타고나기를 영리하게 태어나기도 했지만, 주변 상황들이 그녀로 하여금 일찍 의젓해지게 만들었다. 르블랑 가의 상속녀라는 “직함”을 달고 태어난 건, 피할 수 없는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타인에 의해 조각조각 나뉘어, 가장 작은 흠결마저 파헤쳐지고 한없이 증폭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삶이었다. 어린 시절의-지금보다도 더 어린 소녀였을 적의-마를렌은 부모님이 어째서 사람들 앞에만 가면 평소보다 더, 얌전하게 있으라고 어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입술을 뾰로뚱하게 내민 아이는 혼자 투덜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총명한 소녀였기에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마를렌 르블랑’이라는 아이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였던 탓이었다. 그 관심이 좋아하는 색깔이나 즐기는 놀이, 가장 좋아하는 홍차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관심이 아니었다는 점도, 마를렌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부잣집에서 태어난 꼬마 아가씨의 건방진 콧대를 납작하게 짓누르기 위해 눈에 켜고 그녀를 이리저리 흔들어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마를렌의 유년 시절에서 박탈당한 추억들이 몇 있었고, 그중 하나가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말도 안 되는 선물-대체 아홉 살 소녀에게 백화점 상품권을 주는 산타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을 받았을 때부터 풍성한 수염의 배불뚝이 할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불호(不好)에 가까웠다.
그래서 마를렌에게 크리스마스는 큰 의미가 없었다. ‘크리스마스 따위는 정말 싫어!’라며 토라진 딸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수염을 단 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 뒤로는 더더욱.
* * *
“크리스마스는 전부 상술에 불과해. 이맘때가 되면 다들 지갑을 여니까.”
마를렌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팔짱을 단단하게 낀 채 이어 말했다. 우리 엄마도 명절이 가까워지면 일부러라도 더 할인하시는걸. 단정하게 묶인 검은색 양 갈래가 그녀의 고개를 따라 흔들렸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할 일 없는 어른들이나! 어린애들이나! 기대하는 거야!”
그러자 그녀의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샬럿이 아주 약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물빛 정수리를 바라보던 마를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샬럿? 샬럿은 낯가림이 심해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는 때가 부지기수였다. 가장 믿고 의지하는 마를렌에게조차도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순간들이 간혹 있었다. 작년 겨울, 눈이 내리는 골목에서 처음 샬럿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다. 그치만…저는 기대되는걸요…….
“응, 뭐라고?”
소곤거리느라 동그랗게 말린 입술을 향해 마를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하게, 샬럿이 대답했다.
“그야, 이번은 언니랑 처음 지내는 크리스마스니까요…….”
* * *
“그러니까, 샬럿이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기게 해주고 싶단 말이죠?”
소피아가 조용히 찻잔을 찻잔 받침접시 위에 올려놓으며 웃었다. 내 도움이 필요하고요? 어머나, 기뻐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우아한 동작을 눈으로 따라가던 마를렌은 마찬가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주 작은 딸각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차분한 척, 소녀가 도도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래요. 샬럿에게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특별하니까, 그만큼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해주고 싶어요. 근데 샬럿이 낯선 어른을 무서워하고, 그리고 지금… 다른 사람들은, 바빠요. 그래서 아줌마한테 온 거예요! 어차피 한가하잖아요!”
끝에 쏘아붙이듯이 날아간 문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말을 주워 담는 대신, 마를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소피아는 짙은 녹음의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을 뿐이었다. 소녀는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렸다.
마를렌은 소피아 홀든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자기가 좋아하는 ‘다이무스 아저씨’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렸기 때문이다. 다이무스의 아내가 남편을 만나러 헬리오스에 오던 그날, 열한살 소녀의 첫사랑은 그렇게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끝났고, 마를렌은 한동안 퉁퉁 부은 눈을 숨기지 못했다. 마를렌은 방긋 웃는 소피아의 얼굴과 자기 입맛에 딱 알맞게 탄 차, 그리고 나중에 샬럿에게 가져다주라고 따로 챙겨준 과자 세트에서 느껴지는 호의와 다정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흥! 괜한 쑥스러움이 심술의 탈을 쓰고 불쑥, 솟구치려다가 말았다.
침묵 속에 앉아있던 소피아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23일에 ‘호두까기 인형’ 공연이 있는데 샬럿 양과 마를렌 양이 나와 함께 보러 가면 되겠어요. 티켓이 석 장 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이제 곧 생길 예정이에요. 풍성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나긋하게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 물론 두 분이 원한다면요.”
“…좋아요.”
가볍게 꺼내는 듯한 제안이었지만, 마를렌은 크리스마스 시즌의 발레 공연 표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특히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해서 연말에 유난히 인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제법 진지한 소피아의 태도에, 마를렌은 기분이 좋아졌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 ‘다 괜찮을 거다.’고 입에 발린 말이나 하거나 그녀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치부하거나, 당사자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일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러지 않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곁눈질로 흘깃, 보던 마를렌은 다시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홍차가 딱 알맞은 온도로 식어있었다.
“그럼, 이거 데이트네요?”
품위 있는 귀부인답지 않게, 소녀마냥 키득거린 소피아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해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