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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크리스마스는 예년보다 기온이 높을 것이라는 기상 캐스터의 말에, 엄채은은 일찌감치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포기했다. 오히려 이번 크리스마스엔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눈과 비는 한 끗 차이였지만 전혀 다른 감상을 안겨주곤 했다. 그리고 채은은 바닥에 소복하게 쌓이는 겨울의 함박눈이 좋았다. 무릇 겨울이라면 겨울만의 낭만이 있어야 했다. 안타깝게도 빗방울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는 원치 않았다. 때문에 일찍이 그녀는 허묵에게 제안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는 거 어때요? 허묵은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세어보자면…, 사실 생각보다 다양했다. 같이 늦잠을 자는 일조차도 허묵과 함께라면 특별했다. 같이 크리스마스 티를 구매해 마셔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고, 특선 영화를 보며 팝콘을 먹는 일도 즐거울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게임을 해 볼까? 아냐, 게임은 교수님이 다 이겨버리고 말 거야. 상상을 나열할수록 채은의 고민이 깊어졌다. 졸업 직전의 마지막 시험을 남겨 두고도 허묵과의 데이트를 우선으로 고민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속내를 금방 알아차리고 만 허묵은 검지로 채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쿡 찌르고는 웃었다. 우선은 눈앞의 과제를 해치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학생?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다. 주문제작 케이크가 완성되었다는 베이커리의 안내 메시지가 채은의 핸드폰 화면 위에 떠올랐다. 그녀의 옆에는 작지만 열심히 꾸민 트리와 선물 상자 모양의 향초가, 냉장고 안에는 허묵과 함께 고른 와인이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혼집은 나름대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로 빛났다. 밤새 그와 마주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도 보며 둘만의 작은 파티를 할 심산이었다. 이제 케이크만 여기에 곁들여진다면 완벽했다. 한눈팔지 말고 바로 다녀와야지. 옷을 두 겹 세 겹 껴입고는 집을 나서려는 그녀를 뒤에서 붙잡은 것은 서재에서 막 나온 허묵이었다.

 

어디 가요? 허묵이 학기말 과제를 검토하는 중에 몰래 다녀올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실패할 줄이야. “크리스마스 케이크 주문한 거 픽업하러 가요.” 허묵은 웃으며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추울 텐데, 같이 가요.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당연히 날씨는 두 번째 이유였고 그저 채은이 준비한 선물을 먼저 보고 싶은 것이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마땅한 명분도 없었기에 채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오히려 좋았다. 허묵과 함께하는 길이라면 그 길까지도 충분히 데이트가 되곤 했으니까.

 

주문한 케이크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하얀 생크림에 생딸기가 여러 개 올라가 있는, 여느 베이커리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케이크였다. 가장 오리지널한 모양이면서 동시에 채은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이기도 했다. “겨울엔 역시 이런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한 판으로 사서 먹어 줘야 속이 후련해지더라고요.” 언제나처럼 논리정연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채은의 말이라면 응당 따르고야 마는 허묵이었다.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이리 줘요, 무거울 테니 내가 들게요.” 허묵은 한 손으로는 케이크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채은의 손을 잡았다. 그 어떤 것도 쥐고 싶지 않았던 남자의 두 손은 어느덧 사랑하는 여자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지우고 싶지 않고, 가질수록 더욱 쟁취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거리는 크리스마스의 느낌을 물씬 풍기며 반짝거렸다. 일기예보대로 조금 따스한 크리스마스이긴 했지만, 다행히 비 소식은 없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거리에 나와 일 년에 한 번뿐인 축제를 즐겼다. 광장의 커다란 트리에 소원 종이를 적어 거는 사람들, 눈사람 모형 앞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들, 레스토랑이 모인 식당가로 걸어가는 가족들. 희망과 축복이 가득한 풍경 속에 두 사람은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이대로 밖에서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두 사람이었다. 채은은 허묵과 단둘이 보낼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그 마음은 허묵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그 역시도 미소 지으며 잡은 손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사람들이 많네요, 케이크가 찌그러지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갈까요? 그럼에도 발걸음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밤은 아주 기나길 것이었으니. 그러니 지금은 이 축제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만끽하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걷는 발끝이 오늘따라 더욱 포근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채은의 두 눈이 크게 뜨인 것은 신발 앞코에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아 닿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따뜻한 크리스마스, 그 위에 내려앉은 포근한 눈은 기적처럼 찾아온 뜻밖의 선물이었다. 채은은 곧 고개를 들었다. 더 많은 눈송이가 하늘에서 살랑살랑 흩날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하얀 눈꽃들은 마치 여름의 반딧불을 연상케 했다. 채은의 표정이 밝아졌다.

 

“올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오기 힘들 거라더니, 기적이네요!”

“그러게요.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죠.”

 

조금 더 보고 들어갈까요? 채은에게 허묵이 제안했다. 이미 어린아이처럼 방긋 미소 짓고 있던 채은은 밝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이윽고 손을 뻗어 눈송이를 받아냈다. 손바닥 위에 차분히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는 체온에 녹아 금방 사라졌지만, 기적과도 같은 이 밤은 오랫동안 두 사람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었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기적들이 존재한다. 칠십 칠 억의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비로소 만나 하나가 된 것처럼.

 

“이번 크리스마스 소원도 비밀인가요?”

“당연하죠!”

 

엄채은은 특별한 매개에 소원을 비는 습관이 있었다.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 그녀는 소원을 담았다. 내년도, 내후년도, 교수님과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아도 이루어질 소원이었다.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소원을 소원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외에 그녀가 바라는 것은 없었다. 허묵과의 안온한 일상, 그와 함께할 찬란한 앞날. 그것이 그녀의 전부였고, 그것을 전부로 삼는 그녀가 허묵에게는 전부였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온기가 부드러웠다. “놓고 싶지 않네요.” 허묵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평생.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무릇 말로 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들이 있는 법이었다. 허묵의 손에 실린 든든한 힘이 그 말을 대신했다.

 

어쩌면 엄채은은 더 이상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낭만을 옆에서 함께 이룰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미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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