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즌 8~시즌 9 사이 시간대 기반
*워킹데드 시즌 8 결말과 관련된 약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마누라 덕분에 산 줄이나 아시지.”
탁한 목소리가 끝을 늘이며 빈정거렸다. 윤은 금방이라도 그 말을 씹어뱉은 남자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딱딱하게 부풀어오른 남편의 팔을 토닥였다. 아직도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위험한 순간에 그와 대릴의 편을 들어주리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방관할 것이고 개중 일부는 건수를 잡아 함께 맞받아치려고 들겠지. 이런 상황에서 알렉산드리아나 힐탑의 동료들이 없는 곳에서 내부의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지나친 모험이었다. 그들은 모험을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릭이 주변 지역의 생존자 공동체를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억지로 천불을 삼켜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남편의 잇새 사이에서 무언가 갈려나가는 소리가 들렸으나 다행이 그 뿐이었다. 윤은 손바닥 아래의 근육들이 다시금 힘을 빼고 무르게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들의 곁을 비웃듯이 느릿하게 스쳐지나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네간이 사라진 생츄어리를 선택한 이들은 크게 몇 부류로 나뉘었다.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희생자의 위치였으나 그들을 이끌었던 네간의 이름이 자신의 주홍글씨가 될 것이라 생각한 사람들, 네간이 건재했을 무렵 어떤 이유에서든 외부에 지나치게 힘을 휘둘렀기 때문에 생츄어리 외의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리라 깨달은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남모르게, 혹은 대놓고 네간의 이름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
그들을 스쳐지나간 남자는 마지막 부류에 속해있었다. 윤은 생츄어리의 로라가 알려준 남자의 이름과 행동들을 기억했다. 공공연하게 릭과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불만을 퍼뜨리고 다니는 남자라고 했다. 네간이 있던 시절을 추앙하고 그가 생츄어리에서 군림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남자. 이제는 알렉산드리아의 지하에 갇혀있는 어떤 사내의 뒷모습을 떠올린 윤이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턱 끝을 굳혔다. 갈 곳 없이 내려놓아야 했던 원망과 분노가 만들어낸 감정들은 어떤 방향으로 비워내고자 해도 결국 살의로 향해 제법 능숙한 연기자였던 그조차 얼굴 표정을 망가뜨리게 만들었다. 숨 대신 허파를 가득 채운 것들이 목구멍의 끝자락까지 밀려들었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이 겨울의 찬 공기 속에서 허옇게 껍질을 일으키며 까실거렸다.
“그런 얼굴 할 바에야 그냥 한 대 치게 뒀으면 될 거 아냐.”
콧등 위로 훅 쏟아지는 목소리에 윤은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글거리며 뒤섞이던 분노가 가신 푸른 눈동자는 전등을 켜놓지 않으면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나뉘어지는 실내에서 새벽의 별처럼 빛났다. 남편의 목덜미 위에서 녹은 은처럼 흘러내리는 전등의 빛무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윤이 대릴의 팔을 덮었던 손을 들어 움푹하게 패인 뺨을 감쌌다. 아무리 감싸도 금새 부르트고야 마는 손 끝에 비슷하게 식은 체온이 닿았다. 윤을 지금까지 지탱해준 것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온전히 따뜻해지지 않더라도 대릴이 자신의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체온의 존재나 여전히 저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푸른 시선 같은 것.
“......아무리 총이 있어도 수 십이랑 싸울 수는 없잖아요.”
“떠들고 다니는 놈이 있다더니 그게 저 놈이었어?”
누그러졌던 눈매가 문득 다시 사납게 좁혀졌다. 릭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다시 생츄어리로 ‘돌아오게’ 된 후에 대릴은 그 누구보다도 네간과 관련된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 곳에 한 번 포로로 붙잡혀있었고 그렇게 붙잡혀 온 이들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부서졌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릴이 그것을 겪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면, 윤은 그것을 겪고 돌아온 이의 곁에 있었기에 알게 되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사람의 등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는 공포에 젖은 얼굴을 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겪은 곳으로 원치 않게 돌아가야 하는 이의 절망과 분노와 피로가 섞인 눈을 마주하면서. 윤은 들썩이며 팽팽하게 굳어지기 시작한 남편의 뺨 위를 손 끝으로 문질렀다. 가볍게 스치고 떨어지는 움직임에 따라 살갗 위로 온기가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니까요.”
온기를 따라 풀어지기 시작하던 눈매가 이번에는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아 윤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복도는 아무리 목소리를 낮춰도 웅웅 벽과 바닥에서 소리를 울려 꼭 거대한 폭소를 터뜨린 것처럼 만들었다. 윤은 옆으로 기대어 있던 품에서 살짝 몸을 떼고 온전히 몸을 돌려 대릴을 마주 보았다. 수많은 것들에 대한 피로와 덜어내지 못한 분노로 마르기 시작한 얼굴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웃음으로 흠뻑 젖은 채 윤이 즐거운 움직임으로 고개를 기울여 대릴과 시선을 맞췄다.
“크리스마스에 전쟁도 한 번 멈췄었는데 사람이라고 못 살려보내겠어요?”
“겨울이라서 그냥 던진 말이 아니었다고?”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보이자 허, 하고 짧은 웃음과도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약탈과 노략이라는 기존의 생존 방식을 포기하고 난 후 생츄어리의 식량 공급 방식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필요로 했다. 약간의 밭농사와 원시적인 수경재배, 그리고 새롭게 시도하는 작물들로는 각 공동체와의 교역을 성사시키기는커녕 내부를 먹여살리는 데에도 빠듯했다. 이런 불안한 식량 사정은 생츄어리에 주로 머무르게 된 대릴과 때때로는 알렉산드리아의 릭을 공격할 좋은 구실이 됐다. 조금 전의 시비도 그런 맥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너희가 이 곳에 온 이후로 우리는 불안해 하게 되었다고, 사실상 다른 놈들과 손을 잡고 우리를 약하게 만든 후에 그대로 내버리려는 것이 아니냐고 외치는.
불안으로 주변을 선동하려던 남자의 시도를 무산시킨 것은 중간에 난입하게 된 윤과 그가 힐탑에서 받아온 원조 물품들이었다.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것처럼 바짝 몸을 긴장시킨 남자들 사이를 파고들어 대릴의 팔목을 도닥이며 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으니 이제 둘 다 그만둬요, 하고 말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힐탑에서는 우리도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던 걸요. 휘말려들어야 할 필요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흩어졌고 대릴과 맞붙었던 남자는 불만스럽게 떠났다. 불씨는 남아있었지만 어떻게든 크리스마스의 이름 아래 상황은 해결된 것이다.
“나도 매기가 알려줘서 알았어요. 그 쪽도 크게 기념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요.”
아직 모든 것들을 제대로 정리하진 못했으니까. 생츄어리의 식량 수급을 위해 도움을 청하러 간 힐탑에서 매기는 그렇게 말했다. 다정하던 오빠의 눈을 닮은 갓난 아기를 품에 안고 조용히 어르며 윤은 친구의 눈을 오래도록 살폈다. 평온한 목소리였으나 눈 속에 켜켜이 쌓인 피로만큼은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사라진 사람들과 잃어버린 공간과 묻어두기에는 너무나 날 것인 감정들이 용감하고 활발하던 농장 처녀의 눈동자에 그런 것들을 쌓아두었으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는 그 모든 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강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너무 낡아 쓸 수 없게 된 포대 자루를 자르고 묶어 물들인 끈들로 주거지 안의 나무들을 장식하고 여기저기에서 향긋하게 옥수수빵을 굽는 향기가 풍기는 힐탑을 창 밖으로 바라보며 매기는 웃었다.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잖아, 적어도 오늘만큼은 우리 모두 작은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지. 나도, 그리고 너도. 선물을 주고받기 보다는 사실상 산타클로스에게 억지를 써서 받을 수 없는 선물을 받아내러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저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웃어주는 매기를 향해서 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함께 웃는 것 뿐이었다.
상황을 알게 되어 어리둥절한 기색이 사라지는 얼굴을 바라본 윤이 다시금 키득거리며 대릴의 뺨에서 손을 떼어냈다. 오래 문질러진 광대뼈 위로 옅게 남겨진 발그스름한 빛이 손이 떨어지자 천천히 제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양손을 뻗어내밀자 대릴은 서스럼없이 함께 그의 양손을 내밀었다. 총을 쥐는 대로 굳은살이 남아 까칠거리는 손 끝이 서로를 살그머니 건드렸다가 입을 맞추듯 서로의 손 틈새 사이로 파고들었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 위를 톡톡 두드리며 윤이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자기랑 허셜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다음 해로 달아두겠대요. 날짜를 알려줄 지저스가 없었으니까 봐주겠다고.”
“대단한 로맨티스트시구만. 아직도 그런 걸 기억을 해?”
“더 칭찬해야 할 걸요. 생각도 못했다고 하니까 이 곳에 사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조금 꾸며보라고 이것저것 챙겨줬거든요.”
“손재주가 좋긴 했었지, 그 녀석.”
힐탑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을 회상하듯 대릴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명에 걸맞게 덥수룩하게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랑하는 지저스는 가끔씩 주디스나 아기 그레이스를 위한 작은 나무 장난감을 만들어주고는 했다. 손이 빌 때면 이것저것 꼬고 비틀거나 깎아내던 그 세심한 손길을 윤 역시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손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고 있었으리라.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들은 밀려드는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찾아내어 그것의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을 무의미하게 여기지 않았으니까.
포대자루를 얇게 잘라 꼬아 만든 색색의 장식끈과 근처에 있는 버려진 기념품 가게에서 찾아낸 플라스틱 별과 수많은 장난감 산타들, 솔방울을 달아 직접 만든 소박한 크리스마스 리스를 챙겨주며 그 곳의 아이들에게 전해주세요, 하고 웃던 온화한 얼굴을 떠올리며 윤은 눈을 깜박였다. 조금은 들뜬 목소리가 입술 바깥으로 오래도록 흘러나왔다.
“우리가 쓰는 방 문에도 장식해두라고 지저스가 따로 챙겨줬어요. 직접 만든 거래요. 겨우살이 가지는 챙겨준다는 걸 일단 괜찮다고 하기는 했는데 지저스 성격이면 아마....”
“......그럼 힐탑에서 더 있어도 괜찮았잖아.”
미지근해진 목소리가 깍지 낀 손 끝으로 툭 굴러 떨어졌다. 윤은 순간적으로 끊긴 말을 따라 턱 끝을 들어 대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차오른 것을 저도 모르게 뱉어낸 것처럼 당황에 찬 눈동자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윤은 대릴이 한 말이 짜증이나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윤의 생존은 언제나 누군가의 속을 살피고 읽어내는 것으로 유지되었다. 모사를 위해 시작한 관찰은 하나의 재능이 되었고 윤은 그 재능을 아낌없이 사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윤이 대릴의 속내를 알게 되는 것은 그런 관찰보다는 정말로 그를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속내에 있는 다정함을 꺼내어 보이는 것에 유달리 서툰 사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외려 멀어지는 것을 선택하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모든 것들이 몇 번이고 송 윤이 대릴 딕슨을 사랑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므로.
해서 윤은 갑작스레 떨어진 말에 화를 내거나 되묻는 대신 움칠 물러난 손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겨 오래도록 붙잡았다. 체온이 뒤섞여 미지근해지는 감촉을 따라 방향없이 흔들리던 대릴의 눈동자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으며 가라앉았다. 희고 푸르게 남은 시선을 따라 윤이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대릴. 부름에 대답하듯 달싹이는 입술 위를 향해 다시 한 번 대릴, 하고 이름을 쏟아붓자 손등 위를 덮은 손가락들이 조금 더 힘을 주어 구부려졌다. 마른 입술 위로 혀 끝을 내어 핥는 시늉을 한 대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네가 있어서 싫다는 건 아니야.”
“그 정도는 벌써 알아요.”
“그냥 난...... 크리스마스니까, 네가 좀 더 나은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름을 부르기 위해 벌린 입 안으로 겨울 공기가 섞인 먼지가 텁텁하게 머물렀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달싹이는 입술의 움직임을 읽은 것처럼 대릴이 비슷하게 어색한 얼굴로 입꼬리를 꿈틀였다. 멋쩍은 웃음을 시도한 것 같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윤은 그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대릴도 윤도 이 곳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은 여전히 망령처럼 남은 남자의 그림자를 발견해야 하는 회색의 공간에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어느 순간에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철문으로 닫힌 골방을 볼 때마다, 이제는 사라져 마땅한 남자의 이름이 기도문처럼 메아리치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랬다.
그러니 힐탑에 조금 더 머물렀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대릴의 말은, 소박하고 작은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날까지 이 곳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그 나름대로의 배려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다정한 장소에서 아직까지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서로 뿐인 외로운 장소로 돌아올 필요가 없다는. 자기 자신은 아직 사랑하지 못하는 장소에 남겨져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고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외로움을 뒤집어 쓰는 것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사람. 딱딱하게 굳어있던 눈꼬리를 늘어뜨린 남편을 향해 윤은 먹먹하게 굳어지는 혀 끝을 달싹여 그 이름을 불렀다. 대릴,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라 비스듬하게 시선을 흘려보내던 남편이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윤은 발걸음을 가볍게 딛어 신발의 코 끝이 서로 닿을 정도로 대릴과의 거리를 좁혔다. 아, 하지만, 하지만 내 사랑. 그 마음이 여전히 서툴러 더욱 다정하기만 나의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걸요.”
윤은 제가 이 곳을 사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오래 전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시멘트와 유리와 철근이 드러나 회색의 겉가죽과 내장 속에 남은 선명한 명암으로 남겨진 거대한 건물에 대해 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감정은 그 안에서 살아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 정도일 것이었다. 이 곳에 성지聖地의 이름을 붙인 이가 그에게서 빼앗아간 것들의 기억이 그 이상의 감정을 허락하지 못할 테니까. 이미 생츄어리에서의 밤은 윤에게 불면의 다른 이름이나 마찬가지였다. 생츄어리에서 보낸 짧고도 긴 밤 동안 윤은 오래도록 상실에 뿌리내린 감정들과 그것을 먹고 자란 악몽에 시달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에는 대릴 딕슨이 있었다. 빗줄기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던 새벽 별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자, 능숙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먼지와 진흙을 뒤집어 쓰는 사람, 그리하여 송 윤―윤 딕슨이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된 다정한 사람이. 세상이 뒤집히기 전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온 세계를 뒤덮었던 어느 캐럴의 가사처럼, 윤의 크리스마스에는 대릴 딕슨이 있으면 충분했다. 그만 있다면 사랑할 수 없는 장소여도, 그곳에 사랑하지 못한 이들이 가득하더라도 괜찮았다. 크리스마스에 필요한 것은 언제나 사랑이었고, 윤에게 있어 사랑이란 대릴 딕슨의 존재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었으니까.
언제고 눈을 맞추어주기 위해 기꺼이 숙여주는 그 품을 향해 팔을 뻗으면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카락이 덮인 목덜미가 품 안으로 안겨들었다.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는 것을 끌어안 듯 간절하게 허리를 감싼 팔의 감촉을 따라 가늘게 웃음을 터뜨린 윤이 먼 곳에서 맥박이 들려오는 목줄기에 뺨을 기대어 문질렀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사랑하는 이의 삶이 흐르는 소리는 언제나 자장가를 닮아 있어 잠이 들 것처럼 안온한 기분이 들게 만들고는 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당신이었으니까,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에는 당연히 당신한테로 돌아와야죠.”
그렇죠, 하며 동의를 바라듯이 속삭이면 잠깐 숨을 삼키고 있었던 듯 고요하던 머리 위에서 숨을 삼키듯 나직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서로 엉기며 관자놀이로 쏟아진 대릴의 머리카락이 잘게 떨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눈꼬리 옆의 얇은 살갗을 간지럽게 스쳤다. 허리를 감았던 팔이 마치 춤을 추기 위해 몸을 끌어당기듯 등줄기를 타고 올라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어 조금 더 꼭 서로를 밀착하게 만들었다. 코 끝을 파묻은 남편의 낡은 셔츠 옷깃에서는 언제나처럼 허리 꺾인 나뭇가지의 풋내와 아침마다 숲을 뒤덮는 물안개의 향기, 그리고 화약의 쇳내와 담배 연기가 이리저리 뒤섞인 냄새가 났다.
“이런 얘기를 하면 매번 못 이길 걸 아는데도 하게 된단 말이지.”
“이번에도 모르는 척 해줄까요?”
“그렇게 얘기한 시점에서 모르는 척이라고 보긴 좀 그렇지 않냐?”
동의하듯 키득거리는 이마 위로 까실하게 수염이 덮인 턱 끝이 문질러졌다. 윤은 여전히 웃음으로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추어올리며 언제고 빠져나오기 어려운 품에서 가볍게 물러났다. 생츄어리는 하나의 건물 안에 수없이 많은 복도가 얼기설기 엉켜있어 한 번 사람이 빠진 복도에는 다시 인기척이 들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숨겨야 할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들켜 민망할 짓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온전히 두 사람만이 공유하고 있던 순간을 타인에게 굳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둘 중 누구에게도 없을 터였다. 윤이 한 발을 물러서는 순간 아쉽다는 듯이 짧게 꿈틀거렸으나 천천히 감싸안았던 어깨를 놓아준 대릴 역시도 비슷한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대신하듯 그 옆자리에 나란히 서면 손등이 마주 닿고 살갗이 닿는 움직임을 따라 새끼 손가락 끝은 가만히 엉겨든다. 당연스레 섞이는 체온이 사랑스러워 온 손 끝이 간질거렸다. 목 안쪽으로 바글거리며 솟아오르는 것들을 간신히 억눌러 삼킨 윤이 그럼, 하고 웃음이 가득하게 섞인 목소리로 운을 뗐다. 힐탑에서 받아왔다는 것들을 함께 살펴보려는 요량이었는지 발끝을 반 쯤 떼고 있던 대릴이 눈썹 끝을 들썩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런 말 다시는 못하도록 벌칙이라도 하나 주는 걸로 할까요?”
“......질색할 만한 것밖엔 생각이 안 나는데.”
“캐럴 부르기라든가.”
“내가 그 정도로 잘못을 했다고?”
온 얼굴을 찡그려 질색하면서도 엮인 손 끝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기꺼워 윤은 이번에야말로 깔깔 소리를 높여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진심으로 난처하다는 얼굴을 한 대릴이 그런 윤을 바라보다 남은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더 뒤섞듯 헝클어뜨렸다. 그치지 못해 남은 웃음으로 헐떡대며 윤이 반 쯤 우는 목소리로 그냥 캐럴이잖아요! 하고 외치자 엉망이 된 머리 아래 좁아진 미간이 아예 달라붙을 지경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바람 빠지는 목소리로 대릴이 투덜댔다.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놈의 캐럴을 불러.”
“저번에 ‘열이틀 간의 크리스마스Tweleve Days of Christmas’ 흥얼거리는 거 다 들었어요.”
“금반지 다섯 개Five golden rings까지 가지도 못한 건 못 들었고?”
“뭐 어때요. 사랑하는 사람My true love는 있는데.”
어차피 금방 확인하고 애들한테 장식품 건내주러 같이 갈 거면서. 가볍게 엮인 손 끝으로 허벅지를 찌르면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부글거리기라도 하듯 숨을 삼키고 있던 대릴이 마치 그 손짓으로 구멍이 나 바람이 빠지는 것마냥 한숨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들썩이는 입 안에 투덜거림이 가득한데도 저를 내려다보는 눈에는 온기가 가득한 것이 좋아 윤은 턱 끝을 어깨 아래로 숨기며 키득거렸다. 내가 다시는 그런 소리 하나 보자고. 항복처럼 중얼거린 대릴이 무르게 풀어진 입가를 한 채 엮인 손 끝을 가볍게 잡아 끌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윤은 자신이 받은 선물을 생각했다. 앞으로 남은 모든 크리스마스에 받아야 할 것들보다도 값진 존재를, 어떤 장소와 어떤 사람들의 틈에서도 그 존재만으로도 축복의 날을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의 옆에 있는 다정하고 서툰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해서.
그림자와 햇살로 만들어진 건반 속으로 나란히 선 그림자가 헤엄쳤다. 나직하게 잠긴 목소리로 크리스마스의 첫 날에 사랑하는 이가 내게 선물을 보내왔다오, 하고 어색하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겨울의 서늘한 공기를 오래도록 울렸다. 언제나처럼 아주 다정한, 다정한 크리스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