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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님의 세계에는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있대. 들은 적 있어?”

“…없어.”

 

 

피가로는 들고 있던 붉은색 모자를 매만졌다. 현자의 이야기를 듣고 클로에가 만들어준 모자로, 현자가 살던 세계에서 산타클로스 모자라고 불리는 모양이었다. 피가로는 모자를 직접 쓸 생각은 없었지만, 모자에 관심을 보이자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미틸의 눈빛에 넘어가 그대로 쓴 채 하루종일 마법관을 돌아다닌 참이었다. 날짜로 따지면 크리스마스 이브인 오늘, 어린아이는 재우고 어른들의 시간이 오자 피가로는 모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문득 떠오르는 모습에 연락도 없이 제 앞에 앉은 이의 집에 멋대로 찾아가고만 것이었다. 만약 현자가 오지 않았다면 더 이상 얼굴 볼 일이 없었을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서로 다시 볼 수 있어 다행이라거나 다시 얼굴을 내미는 게 뻔뻔하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지금도 불쑥 그를 찾아간 이유에 대해 물으면 피가로도 정확히 답하는 건 어려웠으나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라서, 그저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할아버지 얘기에 문득 그가 생각났다고 대꾸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맞는 말이지. 타인에게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자신보다 제 이야기에 무뚝뚝하게 답하는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 편이었다. 막상 그의 행동을 참고 하려고 해도 그닥 도움은 되지 않았던 터라 손을 놓은지도 오래였지만. 이렇게 보니 오즈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게 있다면 그도 결국…

 

 

“피가로.”

“응? 왜?”

“볼 일은 그뿐이야?”

“아하하, 그럴리가. 크리스마스는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네가 인간들의 특별한 날을 챙길 줄 몰랐는데.”

“너랑 오즈는 가끔 날 매정하게 볼 때가 있어.”

 

 

나 나름 좋은 마법사인데 말이지. 피가로는 속으로 생각했다. 직접 입으로 내뱉으면 돌아올 눈초리가 싫기도 하고, 이런 건 타인한테 들어야 의미가 있는 말이기도 하였다. 가끔 상대에 따라 농담처럼 말하는 때도 있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피가로에게 있어 농담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유리엘 블랙, 이라는 마녀. 세계의 최강자라고 불리는 오즈보다 오래 살고, 피가로와 비슷한 시간대를 살아온 마녀는 그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밀리지 않는 강한 마녀였다. 피가로는 그가 현자님을 도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자의 마법사로 선택 받지도 않았고, 북쪽 마법사였기 때문에 제멋대로 굴면 굴었지 타인에게 쉽게 손을 빌려주는 마법사라고 보기 어려웠다. 인간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손길이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그는 현자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현자의 마법사라는 이유로 도와주는 이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건 피가로의 오만이겠지만. 유리엘은 제 평생 가장 오래 앉아있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피가로를 노려보았다. 그런데도 피가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피가로.”

“알고 있어, 유리엘. 네가 현자님에게도, 현자님의 세계에도 관심 없다는 거.”

“알면 왜 여기서 이러고…”

“그렇지만, 유리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피가로는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

 

 

“…난 널 도와준 적 없어.”

 

 

유리엘은 저와 키가 비슷한 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이세계에서 마법사들이 사는 세계로 와 현자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그가 이곳에서 지낸지 이제 막 한달이 지난 날이었고, 늙은 쌍둥이들이 다짜고짜 찾아와 제게 현자를 부탁한 일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채였다. 현자가 살아온 것에 비해 유리엘은 1500년을 넘게 산 마녀였다. 이제는 세는 걸 관뒀으니 2000년에 가깝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날이 춥고 험한 북쪽에서 1000년을 넘게 산 마법사들은 그만큼 강함을 의미했다. 그렇게 강한데도, 아직까지 현자의 마법사로 선택 받아 살아온 적은 없었다. 무작위로 선택 받는 자리이니 그는 어떠한 관심도 없었지만, 막무가내인 쌍둥이들 덕분에 유리엘은 제가 살아온 날만큼의 많은 현자들을 만났었다. 유리엘은 그들을 돕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냉정한 분위기에 무뚝뚝한 말투를 가진 외관과 달리 정이 많은 마녀였다. 정이 많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강함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저 현자도 떠나고 말겠지. 약한 마법사와 인간은 죽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현자는 떠난다. 강한 마법사가 짓는 성도 여러 번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자신 빼고는. 차가운 말투에도 현자는 웃어보였다.

 

 

“그래도 도움이 많이 됐어요. 감사해요.”

 

 

짧게 살아가는 인간에게 저런 말은 순수한 감정을 담은 말이겠지. 한 두번 겪은 일도 아니었다. 제가 아무리 현자를 보호하고, 아는 지식을 나눠도 모든 건 변할 것이다. 변하는 게 두려웠다면 그들이 현자를 맡겼을 때, 강하게 나서야 했을까. 가장 많은 이별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런 말에 넘어가는 유리엘은 강하지 못한 마녀였다.

 

 

*

 

 

“현자님이 고맙다고 했어. 크리스마스니까 모처럼 선물도 주고 싶다고 했고.”

“네가 올 필요없었어. 부탁한 늙은이들은 따로 있잖아.”

“스노우님과 화이트님은 밤에 못 움직여. 알잖아.”

 

 

한마디도 지지 않는 모습에 유리엘은 한숨을 쉬었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비겁한 자식. 그를 비하할 온갖 욕이 떠올랐으나 내뱉지 않았다. 이런 말에 흔들릴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피가로가 말없이 사라진지 100년이 흘렀다. 워낙 내키는대로 움직이는 성격이었고, 약한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소식없이 죽을 일은 없다고 믿을 수 있었다. 오즈의 세계정복을 도울 때도, 파우스트라는 제자를 만났을 때에도 피가로는 간혹 돌아와 그가 겪은 삶을 늘어놓았고, 마을을 영 떠나지 않던 유리엘은 그정도에 만족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라고, 적어도 유리엘은 생각했다. 멀리 떠나도 돌아올 정착지. 오랜 시간 만나지 않아도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친구. 피가로가 없는 시간에 유리엘이 외로움을 느끼듯이, 유리엘이 없는 시간에 그도 외로움을 느끼는 줄 알았다. 그러니 돌아왔던 것이라고. 증명할 필요없는 유대감이 있다고. 하지만 유리엘은 알고 있다. 알아차리고 말았다. 영원한 건 없다. 모든 건 변한다. 아마, 나 자신을 빼고는. 유리엘이 피가로를 다시 만났을 때는, 그가 남쪽 마법사라는 호칭 아래 현자의 마법사가 된 다음이었다.

 

 

“…이제와 뻔뻔하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야. 넌 원래 그런 성격이니까.”

“내가 원래 어떤데?”

“도망가는 걸 잘 하지. 아닌 척도 잘 하고.”

“하하, 그런 비겁자 같은 표현은 관둬줄래?”

“그 늙은이들은 내가 너를 떠난 줄 알아. 상처준 게 나라고.”

“…상처 받았어? 나한테서?”

“그럼 넌… 아, 그래. 넌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였군.”

“그렇지 않아, 유리엘.”

 

 

아니, 그게 맞아. 피가로. 유리엘은 평소 작은 목소리에 힘 없는 말투를 쓰는 마녀였다. 말하기도 귀찮고, 죽어나가는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으니 어느새 정착한 말투였다. 그런 그가 지금은 피가로를 향해 단호히 말하였다. 그게 맞아, 피가로.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기 위해 떠나는 녀석이니까. 스노우와 화이트가 알고 있듯이 유리엘은 자신이 평생 돌봐온 마을을 떠난 적이 있었다. 하필 그때 피가로가 돌아왔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오해가 생길만한 일이었지만,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는 여전히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착한 아이한테 선물을 주러 왔을 뿐이야, 정말로.”

“오만하구나. 네 눈에 나는 아직 자라지 못한 소녀인거니?”

 

 

결국 유리엘은 언제나 제 목에 걸려있는 마도구에 손을 쥐었다. 피가로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마법을 쓰려고 한다는 의미였고, 어쩌면 싸워야 할 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힘으로 굴복시키기에 이제 자신은 너무 늙은 마법사인데 말이지. 피가로는 양손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힘 없는 척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러면 루틸이나 미틸한테는 곧장 통하던데, 어떠려나. 확신은 가지지 못했지만, 유리엘은 피가로가 믿는 마법사 중 하나였다. 무어라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함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함이 느껴지자 그제서야 피가로는 유리엘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리엘?”

 

 

이곳은 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피가로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가 사라지겠다 마음 먹는다면 영영 찾아내지 못할 장소였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 정말로, 피가로는 그와 다시 만나 평소처럼 얘기하고 술 한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감님들의 말처럼 먼저 사라졌다고 느낀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오해를 풀지 않고 찾지 않은 건… 피가로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앞에 놓인 커다란 소파에는 언제나 유리엘이 앉아 있었다. 그의 반대편에도 소파가 항상 자리잡고 있어 피가로는 그와 대화할 때, 매번 같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지금 일어난 그 자리 그대로. 피가로는 허공에 대고 그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화난거야? 미안해.”

“비위 맞춰주려고 하지 마.”

 

 

그러자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어느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집 안 전체에서, 따스한 난로에서, 늘 앉아있던 의자에서. 피가로는 그 말에 대꾸할 수 없었다. 그가 왜 화났는지 알 수 없었고,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그가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급하게 내뱉은 말인 것도 어느 정도 맞았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해주며 살아왔다고 다짐했는데 왜 여전히 알 수 없는 게 많은 걸까. 아무런 답도 없자 또다시 유리엘이 목소리를 내었다. 이는 피가로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힘 없고, 작은, 건조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선물을 줘, 피가로. 네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것 말야.”

“모습은 보이지 않을 셈이야?”

“보여야 안심이 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네 존재는 느껴져.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구나.”

“그래, 그럼 됐어. 내게 선물을 줄래?”

“네가 원한다면, 물론이야.”

 

 

폿시데오. 익숙하게 주문을 외우자 방 안에는 작은 결정이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엘은 모습을 감춘 상태인데도 손을 뻗어 제 손에 닿은 작은 결정을 바라보았다. 눈보다는 작은 별조각처럼 생긴 결정이 제 손에 금방 녹아내리는 게 눈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북쪽 마녀인 유리엘과 북쪽 출신인 피가로가 지겹도록 본 눈이, 눈처럼 느껴지는 결정을 그가 지금 유리엘의 집 안에 내리게 하고 있었다. 유리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작 그에게 보일리가 없겠지만.

 

 

“…여기는 북쪽이야, 피가로. 내리는 건 지겨워.”

“알고 있어. 현자님의 세계에도 눈이 내린대. 가끔은 집을 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쌓이지만, 때로는 보고 웃음이 나올만한 다정한 눈이 내리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 …”

“보여주고 싶었어. 눈이 다정하게 내린다는 얘기에 네 생각이 났어. 넌 다정한 마녀니까 말이지.”

“말솜씨는 여전하구나, 피가로.”

“하하, 고마워. 지금 내 옆에 있지? 네가 느껴져.”

“그래, 네 옆에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유리엘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엘은 피가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모습이었다. 집 안에 별조각을 내리게 하는 것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마법을 사용하는 그들에게 있어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부른대.”

“겨우 눈이 내릴 뿐이야. 우리는 그걸 기념하지 않아.”

“알고 있어. 그렇지만, 지금 이곳에서 너와 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거야.”

 

 

그렇다고 진짜 눈이 내리면 재미없으니까, 바꿔봤어. 피가로는 능청스럽게 답하였다. 여전히 그가 왜 화가 났고, 제 선물에 기분이 풀렸는지 고민했지만 일단은 그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하였다. 2000년에 가까이 살아오면서 많은 게 변했다. 사람도 잔뜩 만나보고, 많은 일을 해보고, 변하지 않는 건 없었다. 하다못해 오즈마저도 변해 지금은 저보다 한참 어린 마법사에게 쩔쩔 매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건 없어, 유리엘. 떠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야. 피가로는 제 어깨에 닿은 온기를 느끼며 그리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마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준비된 소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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