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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눈 소식은 없었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올 때쯤, 하얀 눈은 연모시에 깜짝 선물처럼 찾아왔다. 아이들도, 연인들도 모두 제각기 무르익어 가는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즐기던 무렵이었다.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잃고 헤매는 건 엄채은, 그녀뿐이었다. 옆에 선 허묵은 인파에 그녀가 쓸려가지 않도록 그녀의 허리를 둘러 감고 있던 참이었다.

 

“잠시 실례. 이러다 흩어지면 곤란해지니까요.”

 

말끔한 얼굴만큼이나 단정한 옷차림과 매너 있는 태도. 머릿속에 그린 듯한 이상형이 눈앞에서 저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니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애써 합리화하며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곧 허묵이 채은의 손을 잡고 제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에 가냐는 물음에 허묵은 그저 비밀에 부치며 덧붙였다. 분명 실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01.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묵과 카페에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어딜 가나 연인들로 북적여 기분이 퍽 이상했다. 누군가의 눈에도, 우리가 연인처럼 보일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은 덤이었다. 감히 꿈꾸지도 못할 생각을 하다니. 허묵은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먼 존재였다. 일개 학부생이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교수를 마음에 담는다는 일은 그런 일이었다. 언제나 마음을 고쳐 먹고 긴장해야 했다. 긴장을 늦추는 그 순간엔, 들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위태로이 유지하고 있는 이 관계마저 깨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렇기에 엄채은은 오늘 그를 만난 순간부터 줄곧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었다.

 

“자, 여기요. 오늘 자리에 책이랑 펜까지 챙겨오다니 제법인데요.”

“그… 그야 당연하죠. 교수님 책에 사인받자고 만난 자리인걸요.”

“그런가요? 나는 그것만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좀체 이완이 되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속도 모르고 이런 소리를 하는 허묵 때문에.

처음 연락을 취한 건 허묵이었다. 이제 곧 종강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말을 튼 허묵은 곧바로 그녀와 만날 날을 잡았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계획된 것이냐고 묻고 싶은데. 그럼 교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 것 같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냥 우연이라면. 나를 조금도 이성으로 신경 쓰고 있지 않음을 확인받는다면. 그만한 비참함이 또 있을까. 죄 없는 얼음컵 속의 얼음을 빨대로 콕콕 눌러 찍었다. 책 앞면엔 허묵의 필체로 사인과 함께 짧은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메시지를 제대로 읽으려 했을 때, 허묵은 웃으며 책머리를 덮었다.

 

“이건 집에 가서 천천히 읽어봐요. 지금은 나한테 집중하고.”

 

…이런 말을 계속하는 허묵에게 조금의 사심도 없다면 그건 그거대로 유죄라고, 엄채은은 굳게 생각했다.

 

*

 

기념일의 연 레스토랑은 100% 예약제로 운영된다. 때문에 오늘 연 레스토랑에 입장할 수 있다는 건 허묵이 일찌감치 오늘의 저녁을 예약해 두었다는 의미가 됐다. 여기 예약하기 힘들었을 텐데…. 조그마한 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허묵이 웃으며 대답했다. 채은 학생을 만나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죠. 우리 첫 데이트인데.

 

첫 데이트.

그 단어에 어쩐지 강세가 들어간 듯 네 글자에 불과한 것이 채은의 귀에 콕 박혔다. 평범한 학생과의 만남을 모두 데이트라고 부르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제게 특별한 학생임을, 인정받고 확인받고 싶었다. 밀어낸다고 밀려나는 감정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한 사랑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순간 그 마음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감추기 어려울 정도의 감정이 되는 순간을, 채은은 도무지 견디기 어려웠다.

 

“채은 씨가 양식을 좋아할 것 같아서. 혹시 맞혔나요?”

“네에. 양식 좋아해요. 피자나 파스타.”

“앞으로 참고해야겠네요.”

“교수님도 좋아하세요? 파스타도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어떤 게 제일 입맛에 맞으세요?”

“입맛이라… 글쎄요.”

 

무어라 말을 더 얹으려는 사이, 파스타와 스테이크가 상 위에 예쁘게 차려졌다. 허묵은 능숙하게 포크로 파스타 면을 말아 채은에게 건넸다. 포크를 받아들려 했지만, 허묵은 포크를 내주는 대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 해요.’ 먹여 주겠다는 뜻이었다. 허묵의 채근에 결국 입을 벌려 받아먹긴 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묘했다. 주위의 다른 연인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여서.

 

허묵의 언변 덕분에 이야기에는 금방 물꼬가 트였다. 영화나 책 이야기만으로도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대화했다. 영화 이야기를 할 때면 허묵은 매번 끝자락에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랑 같이 봐요. 다음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올랐다.

 

레스토랑의 창가 자리에서 내려다본 눈 내리는 연모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눈 소식이 없음에도 찾아온 눈은 마치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멋진 날, 좋은 사람과, 맛있는 음식까지 곁들여진 오늘은 누가 봐도 최고의 날이었다. 가슴까지 들떠 심장이 두근두근 급박하게 요동쳤다. 기분 좋은 어색함과 설렘이 모순적이게도 한데 섞였다. 조금 받아마신 와인 탓인지, 조금 취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02.

 

 

취했으니 데려다줄게요.

지하철로 몇 정거장뿐이니 지하철을 타고 가겠다는 채은의 말을 한사코 정중하게 거절한 허묵은 그의 차 조수석으로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차량에선 아무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깨끗했다. 허묵의 행실처럼. 딱 있어야 할 것만 있는 차량에선 은은한 히터 기운만이 맴돌았다. 차에 오르기 전, 허묵이 원격 리모컨으로 미리 틀어 둔 것이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오늘만 해도 이런 충동만 몇 번인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외부 강연과 행사로 두 번 얼굴 마주한 다른 학교 교수와 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음에도 허묵은 그녀를 각별한 사람 대하듯 했다. 안전 벨트까지 꼼꼼히 채워 준 후 허묵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운전대를 잡았다. 눈 내린 도로는 조금 얼어 미끄러웠고, 그의 차는 조심스럽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도로를 내달렸다.

 

“예대 근처에 자취 중이라고요.”

“네, 집은 연모시랑 멀어서, 고등학생 때부터 집에서 독립했어요. 고등학교도 연모고등학교 다녔거든요.”

 

너무 TMI인가. 좋아하는 사람이 물어보는 질문에 곱절은 얹어 대답하는 게 뒤늦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허묵은 그에 즐겁게 맞받아쳤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으면, 외롭지는 않았나요? 채은은 고개를 약하게 내저었다. 부모님도 자주 찾아오셨고, 친구들도 있었는걸요. 혼자 지내는 게 이젠 더 익숙해요. 그렇군요. 그리고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제 말을 듣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서일까, 채은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가락은 자꾸만 눈치 없이 꼼지락거렸다.

 

*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식과도 같은 법칙이 아니던가. 어느덧 연모예술대학교 후문에 도착했고, 근처 한 주차장에 차를 댄 허묵은 또 조수석 문을 손수 열어주며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려주었다. 펑펑 내리던 함박눈이 어느새 쌓인 건지 거리는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채은이 지내는 원룸은 꽤 좁은 길에 있어 차를 타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큰길에서 내려줘도 된다는 채은의 만류에도 허묵은 기어코 이번에도 한 발짝 더 배려했다. 그 배려가 부담스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조금 더 저의 시간 속에 스며들었으면 했다.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허묵과 시간을 함께할 핑계가 없을 거라고 여긴 탓이다.

 

“어두운 길목이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 해요.”

“난 당신이 더 걱정인걸요. 집에 들어갈 때마다 위험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물론 있긴 한데…, 어쩌겠어요, 익숙해져야지. 실제로 익숙해지기도 했고요.”

“바보. 가뜩이나 혼자 지내면서 자기를 돌보는 일에 이렇게 소홀하면 어떻게 해요.”

 

대답할 말을 고르다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처음 떠오른 대답이 너무 낯부끄러운 까닭이었다. 그럼 교수님이 도와주시면 되죠. 설레발을 치는 말이지 않을까 싶어 금세 목구멍 밑으로 내려보냈지만.

 

거의 처음 만나 처음 서로를 알아가는 자리인데 바로 집이 위치까지 알려버렸다. 채은의 원룸 아래에는 가로등 하나가 포근한 노란 빛을 내고 있었고, 그 빛을 받은 눈송이들이 하늘하늘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허묵이 먼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 즐거웠어요. 들어가서 푹 쉬도록 해요.”

“…네. 교수님도 더 늦기 전에 어서 들어가세요. 오늘… 저도 재미있었어요.”

 

한껏 긴장한 모습만 보인 것 같은데. 오늘 나름 괜찮았나. 즐거웠다고 하니 어느 정도 합격점에는 도달하지 않았을까. 어디로 보나 빠지는 거 없어 보이는 허묵 교수였으니, 그 말이 굉장히 후하다고 여긴 채은이었다. 허묵의 커다란 손이 채은의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냈다. 옷 위에 쌓인 눈의 모양새가, 마치 채은이 눈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오늘 허묵은, 채은을 ‘관찰’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감정에 무딘 그에게마저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표현에 헤픈 그녀를 보고, 유일하게 색(色)으로 보이는 그녀에게서 이 미지의 정답을 찾고 싶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녀를 불러들인 건 반쯤은 우연이었다. 후에 이브인 것을 확인한 허묵은 그녀의 일정을 고려하여 날을 미룰까도 고민했지만, 부러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채은에게서 날짜를 조정하자는 메시지가 오지 않음에, 허묵은 확신했다. 그녀가 제게 존경과 동경 그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음을.

 

하지만, 그 감정에 자신은 어떤 감정으로 돌려줄 수 있을까.

그건 또 다르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얼굴에 감정을 꽃피우고 있는 그대로 자기 마음을,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여자. 남자는 그만큼의 감정을 돌려줄 자신이 없었다. 아직 채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해서였다. 호기심, 탐구욕, 이내 느껴지는 건 정복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름 모를 감정이 똬리를 틀었다. 때 묻지 않은 채은을 제 욕심으로 망가트리지 않겠다는, 이, 무언가를 아끼는 듯한 이 감정은….

 

“채은 씨.”

“네?”

 

나긋하고 다정한 부름. 채은은 제 이름이 이토록 감미로운 것이던가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리 기억할 것이다. 남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성정을 겨우 이기고 고개를 들어 허묵을 바라본다. 우수에 젖은 깊은 눈 속에는, 엄채은, 오롯하게 그녀만이 담겨 있었다.

 

“아직 확신하기는 어려워요. 당신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거든요.”

“…….”

“하지만 이 감정이, 남들이 일컫는 ‘사랑’의 시발점이라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될 거예요.”

 

연신 깜박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빛나는 두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허묵은 그녀의 머리를 넘겨 주고, 목 뒤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싫다면, 도망칠 기회를 줄게요.”

“…….”

“나는, 한 번 잡은 것은 놓치지 않아요.”

 

그 말에 여자는 무서워 줄행랑을 칠지도 모른다. 사귀기도 전의 남자가 하는 말치고는 제법 살벌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야 했다. 저와 하나의 이름으로 묶인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욱 두려운 일이 될 테니. 여자는 여전히 저를 응시한다. 그러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을 피한다. 도망치려는 걸까.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여전히 제 품에 있었다. 어느샌가 가까워진 둘은, 가로등의 불빛을 배경 삼아 서로에게 안긴 모양새가 되어있었다.

 

“채은 학생. 나한테 사랑을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이윽고 첫눈처럼 서로의 입술에 온기가 포개어진다. 잠깐이었지만 분명하게 서로의 체온이 오갔다. 좋은 사람과, 더없이 멋진 날이었다. 서로의 관계에 다른 ‘이름’을 붙인 허묵과 엄채은, 그들의 이브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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