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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모델이자 배우로서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어떤 날에는 혹독한 날씨에도 야외촬영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에는 몸 상태와 관계없이 무대 위에 올라야 할 때도 생긴다. 그리고 때때로, 어쩌면 아주 자주, 촬영 스케쥴에 따라 새벽에 일터로 나가거나 아주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일도 있었지.

25일의 자정이 20분도 지나지 않은 늦은 밤. 잡지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 빌은 곧바로 폼피오레 기숙사로 가지 않고 고물 기숙사로 향했다. 원래라면 늦게 돌아온 만큼 바로 자러 가야 했지만, 아까 전 아이렌에게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아무런 답장이 없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 시간에 잘 리가 없는데.’

 

평소 상대의 자는 시간을 잘 알고 있던 빌은 혹시 아이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냥 크리스마스를 대비해 일찍 잔 거라면 상관없지만, 혹시 곤란한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추위에 약한 아이렌이니 가볍게 앓아누운 걸지도 모르고, 갑자기 누군가가 쳐들어 와 시달리는 중일지 모르지 않나.

하지만 그 섬세한 걱정이 무색하게도, 빌을 기다리고 있는 건 다소 황당한 풍경이었다.

 

“……너, 뭐 하고 있니?”

 

추위를 뚫고 도착한 빌이 본 것은, 고물 기숙사 밖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아이렌이었다.

맨손으로 주변의 눈을 싹 긁어모아 커다란 눈사람을 만든 그는 얼어붙은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반겨주었다.

 

“선배, 언제 돌아오셨어요?”

 

새파랗게 질린 입술과 새빨갛게 부은 손은 보기만 해도 체온을 떨어지게 만든다. 빌은 자신의 상태도 인지하지 못하고 눈을 즐기는 후배를 경악한 눈으로 훑어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연락을 안 받는 건가 걱정했는데. 설마 애도 아니고 밖에서 노느라 그런 거였다니…….”

“저는 애 맞는데요. 겨우 16살이라고요.”

“말대꾸하지 말고.”

 

애초에 아이렌은 정말 16살이 맞을까. 1학년으로 입학하긴 했지만, 언행을 보고 있자면 도무지 그 나이대 애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문 빌과 달리, 아이렌은 상기된 얼굴로 제 작품을 자랑했다.

 

“이거 봐요, 귀엽죠?”

 

아이렌이 만든 눈사람은 제대로 얼굴과 팔도 만들어져 있었다. 돌과 나뭇가지로 엇비슷하게나마 사람의 형상을 갖춘 눈사람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정성을 들인 게 보이는 결과물을 살펴본 빌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눈사람이 아닌 아이렌의 손끝이었다. 이 추위에 그대로 노출된 새빨간 손은 눈이 녹아 만들어진 물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장갑은 어디 두고 이러고 있는 거니?”

“급하게 나오느라 안 꼈어요.”

“세상에.”

 

저게 말이 되나. 아니, 아이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에는 예민하게 굴면서 본인에 대해서는 무던한 후배이니, 한가득 내린 눈에 홀려 무작정 뛰어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언젠가 아이렌이 ‘자신이 살던 곳은 눈이 거의 내리지 않던 지역이라 눈이 오면 설렌다’라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빌은 꽁꽁 언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가죽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선명한 냉기에, 아까까지 플래시 세례를 받았던 고운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손이 얼음장이 됐잖아. 동상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괜찮아요. 선배도 손 시릴 텐데…….”

“나 참, 지금 누가 누구 걱정을 하는 거야?”

 

계속해서 표정이 좋지 않은 빌이 신경 쓰이는 걸까. 아이렌은 잡힌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걸 눈치챈 빌이 손을 더 꽉 잡는 바람에 탈출 시도는 그대로 무산되었다.

제 손에 비하면 작은 차가운 손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던 그는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겨우 상대를 놓아주었다.

 

“손 녹이고 핸드크림 꼭 바르도록. 정말이지, 이렇게나 조심성이 없다니. 안 그래도 추위에도 약하면서. 지금이 몇 시인데 밖에서 놀겠다고 나온 건지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예요?”

“응? 글쎄. 아, 자정 조금 넘었던가. 얼른 자러 가야 하는데.”

“그럼 25일이네요.”

 

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대화 중이던 아이렌은 가지런히 손을 모으더니, 꼭 기도하는 듯한 모습으로 생긋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빌 선배.”

 

뜬금없는 인사지만, 적절치 못한 인사는 아니다. 갑작스러운 크리스마스 인사에 말문이 막힌 빌은 속없이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가운 날씨에 붉어진 뺨. 생기 없는 입술이 그리는 호선. 눈밭에 있으니 밤하늘보다 더 새까맣게 보이는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붓꽃 색 눈동자까지.

엉망진창이지만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미소를 보고 있자니 실소가 절로 나온다. 빌은 제가 왜 웃는지도 모르는 채,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헤헤, 제가 1등으로 말해준 걸까요?”

“……그렇게 되겠네.”

“음. 별거 아니지만 1등 하니 좋네요.”

 

그렇지. 자신보다 위도 앞도 없다는 건 꽤 짜릿한 기분을 들게 하니까. 다른 누구보다도 저 흐뭇함에 대해선 잘 안다. 그렇기에 빌도, 아이렌의 첫인사를 가져가기로 했다.

 

“너도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렴, 아이렌. 나중에 크리스마스 파티에 늦지 않게 오고. 안 그래도 그게 걱정되어서 연락한 거였는데 이렇게 직접 말하게 되었구나.”

“네. 알람도 맞춰둘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감기 걸려서 뻗진 않을까 걱정되는데.”

“하하, 설마……. 에취!”

 

말이 곧 씨가 된다는 건 이런 걸까. 아이렌은 망연자실해져 할 말을 잃었다.

일이 이리될 걸 예상했던 빌은 멋쩍게 웃는 아이렌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단호하게 고물 기숙사를 가리켰다.

 

“당장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씻고 자도록.”

“아니, 저는…….”

“내가 끌고 가주길 바라서 사양하는 거니? 널 들쳐업는 건 일도 아닌 거, 알지?”

“들어갈게요, 들어가요!”

 

빌은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그걸 아는 아이렌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더니 ‘안녕히 주무세요!’라는 인사만 남기고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다.

현관문이 꼭 닫히고 내부의 불이 꺼졌다 켜지는 것들을 전부 본 후에야 돌아선 빌은 차가운 바람에 식은 제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후우.”

 

과연 내일 아침 아이렌은 무사히 일어날 수 있을까.

차갑게 얼었던 손 온도를 기억하고 있는 빌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폼피오레 기숙사로 돌아갔다.

 

*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파티 준비를 위해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는 폼피오레 기숙사에는 웃음소리와 콧노래가 가득 흘러넘쳤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잘 꾸며진 연회장을 점검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평화로운 현장. 솔선수범해 기숙사생들을 이끌던 빌은 복도를 지나가는 민첩한 인영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잠깐. 루크, 파티 준비는 마쳤어? 어디 가는 거지?”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가려던 루크는 예리한 빌의 질문에 우뚝 멈춰 섰지만,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선 그는 오늘 날씨처럼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답했다.

 

“아, 빌. 나는 금방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걱정은 안 된다만, 어딜 다녀오는 건지는 궁금한데.”

“그냥, 잠깐 산책?”

 

그럴 리가 있나. 루크 헌트는 다들 바쁘게 일하는데 저 혼자 잠깐 산책 다녀올 정도로 실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여러모로 수상함을 느낀 빌은 성큼성큼 루크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루크는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려 하기 무섭게 바람처럼 복도 너머로 달려갔다.

 

“후후, 얼른 다녀올 테니, 그리 노려보지 말아줘. 부사감으로서 의무를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 그럼!”

“잠깐, 루크!”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처럼 잽싸게 달려가는 루크를 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무작정 쫓아가기엔, 사감도 부사감도 없이 남겨진 기숙사생들이 걱정되었지.

잠깐 사이에 머릿속으로 모든 계산을 마친 빌은 연회장을 바삐 돌아다니는 모건을 불렀다.

 

“모건, 나는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기숙사를 부탁할게.”

“예? 제가요? 지금 당장?”

“그래. 잠깐이면 돼. 괜찮지?”

 

어차피 모건은 거절하지 못할 거다. 그는 공공의 이익이 되는 일은 제가 조금 불편하더라도 쉽게 수락하곤 했으니까. 그 누구보다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후배를 믿고 있는 빌과 달리, 갑자기 부탁받은 모건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조금 뒤 겨우 제 운명을 받아들였다.

 

“아, 알겠습니다.”

 

마치 벌이라도 받듯 중책을 떠맡는 선배가 안쓰러워 보인 걸까. 테이블에 식기를 놓던 로랑은 제 옆에 있던 에펠과 팔짱을 끼곤 모건의 뒤로 바짝 다가가 섰다.

 

“다녀오세요, 사감! 이곳은 모건 선배와 저, 에펠이 책임지겠습니다. 후후.”

“응? 잠깐, 나도?”

 

갑자기 끌려 나온 에펠은 황당해하며 로랑과 빌을 번갈아 보았다. 어쩌다 보니 늘어난 책임자에 어깨를 으쓱인 빌은 후배들을 좀 더 믿어보기로 하고 루크를 찾아 떠났다.

잠깐 사이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 루크를 쫓는 건 힘든 일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빌은 상대가 갈만한 장소를 알고 있었다.

 

‘어디 있을지 감이 온단 말이지.’

 

오늘 밤 아이렌에게 다녀온 후 기숙사 담화실에서 아직 잠들지 않고 있던 루크와 마주쳤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빌은 가볍게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아이렌이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않고 눈밭에서 논 걸 이야기했던 게, 설마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거의 확신한 채 고물 기숙사로 향한 그는 현관을 향해 다가가다가, 익숙한 모자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음?”

 

어제 아이렌이 만들어 둔 눈사람 옆. 낯선 눈사람 하나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다.

루크의 모자를 쓴 채 아이렌의 눈사람과 딱 붙어있는 새로운 눈사람을 본 빌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 쳤다.

 

“하.”

 

무슨 애들도 아니고. 유치하게 이게 뭔가. 기분 나쁠 정도로 딱 붙어있는 눈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던 빌은 매지컬 펜을 꺼내 쌓인 눈들을 향해 마법을 걸었다.

 

“그럼, 실례할게.”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기숙사 안으로 들어간 빌은 예의상 인사한 후, 건물 안쪽에서 들리는 두 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니, 저는 정말 괜찮다니까요. 밥도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오. 하지만 아이렌 군, 내가 오기 전까지는 침대에 누워있기만 했잖아? 자. 식기 전에 먹도록 해. 감기에는 역시 닭고기 수프지!”

 

역시 감기에 걸린 건가. 그것보다, 아주 수발을 들고 있지 않나. 닭고기 수프는 대체 언제 챙겨서 가져온 건지 모르겠고, 어이가 없어서 한숨도 안 나온다.

 

“응? 뭐야. 너도 온 거냐고.”

 

들리는 대화에 집중하고 있자니 이 기숙사의 둘 뿐인 기숙사생 중 한 명……, 아니, 한 마리가 제게 다가왔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내리깐 빌은 대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갯짓하며 물었다.

 

“역시 우리 부사감이 먼저 왔나 보지?”

“뭐, 보다시피. 정말이지 귀찮은 녀석이라니까.”

 

그림이 말하는 대상인지 루크인지 아이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림을 앞장세워 아이렌 방으로 향하는 빌은 지난 밤 새파랗던 입술이 짓던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이렌은 많이 아프니?”

“그건 나도 잘 모른다고. 꼬붕은 뭐든 괜찮다고 하니까.”

“그건 그렇지. 정말이지, 무리하는 데엔 도가 튼 애라니까.”

 

하지만 아픈 이를 너무 나무랄 생각은 없다. 꾸짖는 말은 이미 밤에 많이 해뒀으니까. 다만 루크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구체적인 목적지도 보고하지 않고 냅다 도망간 부사감은 사감이 제대로 혼을 내줘야 도리가 서지 않겠나.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금발을 발견한 빌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물었다.

 

“루크.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에 앉은 아이렌에게 수프를 먹여주던 루크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런. 역시 들킨 건가.”

“당연하지. 어제 당신이 나한테 아이렌 이야기를 들은 이상, 아침 일찍 어딘가 간다면 당연히 여기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겠어?”

 

루크가 얼마나 아이렌을 생각하는지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안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마치 희귀동물을 생포하려는 사냥꾼처럼 계속해서 그를 주시하고, 호의를 표하고, 상대의 반응을 즐겼지. 그리고 아이렌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루크가 싫지 않은지, 자주 그와 어울려주고 때때로 도발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다. 마냥 다정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기에 더 가까운 관계. 빌은 둘의 사이를 쭉 그렇게 평가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침 일찍 여기부터 오다니.’

 

마치 고물 기숙사 앞 눈사람들처럼 사이좋게 붙어있는 둘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불편해진다. 얼른 상황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그는 어제와 달리 온몸이 뜨끈해 보이는 아이렌을 향해 물었다.

 

“아이렌, 몸은?”

“루크 선배가 호들갑을 떠는 거지, 저는 괜찮아요.”

“……그래, 네게 물은 내가 잘못이지. 루크, 아이렌의 상태는?”

“잠깐, 뭐예요 그 반응…….”

 

제 의견이 무시당한 아이렌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 추위에 대충 걸쳐 입고 나가 놀면서도 괜찮다고 한 아이렌인데, 어찌 저 대답을 믿을 수 있겠나.

빌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는 루크는 가장 객관적인 판단을 전해주었다.

 

“가벼운 감기야. 열이 약간 나지만 그리 심해 보이진 않아. 약을 먹고 쉰다면 오후의 파티에는 올 수 있겠어.”

“쉰다면, 이구나?”

“그렇지.”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렌에게로 향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미 시선에서 압박을 느끼고 있는 그는 식은땀으로 젖은 긴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푹 쉬고 갈 테니까, 두 분 다 돌아가셔도 되어요.”

 

거짓말을 하는 건 싫어하는 아이렌이니 저 말을 믿어주고 싶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결국 빌은 약간의 수고를 들이더라도 감시역을 붙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 함께 온 그림에게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그림, 아이렌을 잘 감시해 주겠어? 이 바보가 무리하지 않도록 말이야.”

“뭐야, 이 몸에게 뭔가를 시키다니. 이 몸은 꼬붕의 보호자가 아니라…….”

“파티장에 참치 통조림을 준비해 둘게.”

“맡겨달라고, 어이!”

 

그래. 이 말에 넘어갈 줄 알았다. 단순한 그림의 언행에 피식 웃은 빌은 루크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아, 이토록 조용한 압박이 또 있을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악력에 헛웃음을 흘린 루크는 수프가 든 그릇을 테이블에 올리고 일어났다.

 

“자, 그럼 우리는 돌아가도록 할까. 빌.”

“그래야지. 모건에게 맡겨두고 왔지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울 수는 없으니.”

 

돌아가는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차피 아이렌과는 크리스마스 파티 때 다시 만날 수 있으니, 이 퇴장이 아쉬울 수는 있어도 미련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빌을 따라 기숙사 밖으로 나온 루크는 아까 전 제가 눈사람에게 씌워둔 모자를 거둬가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까와는 달라진 풍경을 눈치채고 멈칫했다.

 

“으음?”

 

아까는 두 개였던 눈사람이 지금은 셋이 되어있다. 아이렌이 만든 눈사람이 가운데 오도록, 제가 만든 눈사람의 반대편에 만들어진 눈사람을 발견한 루크는 모자를 쓰는 것도 잊고 빌에게 물었다.

 

“이럴 수가, 빌. 이건 혹시?”

 

그의 예상이 맞은 걸까.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눈사람을 힐끔 본 빌은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린 채, 대신 모자를 거둬 상대에게 내밀었다.

 

“……그냥 만들어 본 거야.”

“후훗, 그렇구나. 그렇단 말이지.”

“잠깐. 뭐야 그 수상한 웃음?”

“아무것도 아니야, 빌. 그냥 기뻐서 그런 거지.”

 

뭐가 그리 재미있는 걸까. 루크는 웃음을 꾹 삼키며 제 상징이나 다름없는 모자를 받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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