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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리지널 감독생 역하렘 드림이지만 카림은 따로 드림주가 있습니다. (가볍게 언급만 됩니다)

* 감독생 외 오리지널 재학생이 다수 등장합니다.

 

 

00.

 

물욕 없는 이의 선물을 준비하는 것은 고된 일이다. 특히 그 대상이 평소 마음에 둔 상대라면, 두 배로 고역이 되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심지어 상대 몰래 준비하는 선물이라면? 난이도는 극상으로 올라가 버렸지.

 

그렇다. 이 이야기는, 그 고역을 겪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2학년 재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에 대한 회고록이다.

 

 

01.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는 각자 기숙사별로 개최하기로 한 후, 사감들과 부사감들은 12월 초부터 분주하게 파티 준비를 하느라 동분서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파티에 필요한 물품과 먹고 마실 것 준비, 그리고 소소한 이벤트 개최까지. 아직은 노는 게 좋을 나이의 소년들은 학교에서 준 예산으로 최대한 즐겁게 기념일을 보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고, 주말에는 직접 시내로 가 필요한 걸 사기도 했다.

 

“음? 이건…….”

 

그건 크리스마스가 일주일 정도 남은 주말. 파티 준비를 위해 각 기숙사의 사감과 부사감이 시내로 다 같이 외출했던 때의 일이었다.

파티에 쓸 쿠키와 관련된 문제로 근처 제과점으로 간 트레이를 두고 옥타비넬의 두 인어와 동행중이던 리들은 커다란 쇼핑몰 앞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멈춰 섰다.

앞서가던 이가 멈춰 서면 자연스럽게 뒤따르던 이들도 멈춰 서게 된다. 아줄은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리들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리들 씨.”

“여기. 크리스마스 기념 세일을 하나 본데.”

“예? ……아하.”

 

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현수막에는 요란한 세일 광고가 적혀있었다. 아줄은 제법 파격적인 할인가에 눈썹을 까딱이더니, 슬쩍 제이드에게 속삭였다.

 

“여기, 고가의 브랜드도 취급하는 곳이었지요?”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섬에서 제일 큰 가게 중 하나이니까요.”

“그럼 구경하고 가도록 할까요. 뭔가 구매하지 않더라도, 둘러보는 건 공짜니까요.”

 

두 인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바로 앞에 있는 리들은 그 말을 대강이나마 들은 모양이었다.

북적이는 가게를 슬쩍 훑어본 리들은 자신도 뭔가 흥미가 가는 게 있는지 옥타비넬의 둘에게 먼저 권유해왔다.

 

“어차피 급한 일은 없으니, 잠깐 들릴까? 트레이에겐 여기로 오라고 하면 되니까.”

“좋습니다. 사람이 많은 게 신경 쓰이지만, 못 들어갈 정도로 북적이는 것도 아니고요. 제이드, 당신도 갈 거죠?”

“물론입니다. 그럼, 들어가죠.”

 

빠르게 의견을 하나로 모은 셋은 빠르게 행동에 나섰다. 성큼 들어선 가게 안에는 지역 주민들부터 같은 학교 학생들, 그리고 로열 소드 아카데미 학생들까지 다양한 손님이 가득했다.

어떤 손님이 어떤 물건을 사는지 살피는 아줄과 그런 아줄의 뒤를 따라가며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는 제이드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지만, 리들은 조금 달랐다. 손님 사이를 이리저리 빠져나가며 어느 매대 앞에 도착한 그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어라, 리들 씨. 무언가 사실 게 있습니까?”

 

쇼핑에 열중인 리들을 먼저 눈치챈 건 제이드 쪽이었다. 어차피 시장조사를 하느라 바쁜 아줄을 내버려 둔 채 급우에게로 관심을 돌린 그는 리들이 구경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아, 제이드.”

“뭘 보고계신건가 했는데, 장갑이었군요. 이참에 하나 새로 사실 건가요?”

“아니, 내 걸 사려는 건 아냐.”

 

검은 가죽장갑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그는 다소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이드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리들이 집어 든 장갑들의 사이즈가 각기 다른 걸 눈치채었다.

과연, 누군가에게 선물하려는 건가. 실용성 있는 장갑이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금방 상대의 의도를 눈치챈 제이드는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과연. 선물용 제품을 보고 계셨던 거군요. 누구에게 선물하실 겁니까?”

“그게, 음……. 아이렌에게 사줄까 해서.”

“아이렌 씨에게?”

 

리들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과연. 그래서 고민 중이셨던 거군요. 아이렌 씨는 평소 장갑은 착용하지 않으시니, 사이즈를 모르실 테니까요.”

“애초에 끼고 다닌다고 해도 내가 사이즈를 알 일은 없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흐음.”

 

제이드는 부드러운 흰 손등을 떠올리고 침음 했다. 아이렌은 평소엔 감각이 둔해진다고 장갑을 끼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가끔은 다른 학생들의 장갑을 한 번씩 껴보거나 쇼핑몰에서 여성용 장갑을 둘러보며 관심을 보이긴 했었다.

리들도 그걸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숙녀답게 장갑을 끼고 다니는 게 보기 좋지 않을까 생각해서 선물하려는 걸까. 어느 쪽이라도 제가 훼방을 놓을 사유는 아니긴 하지만, 기분이 묘한 것도 사실이었다.

급우의 선택을 도와줄까. 아니면 슬쩍 모른 척할까.

잠깐 고민하던 제이드는 리들의 호의가 제게 큰 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장갑들 사이로 손을 뻗었다.

 

“리들 씨, 이걸로 사도록 하세요.”

“응?”

“아이렌 씨 손이라면 이 사이즈가 딱 맞을 겁니다.”

 

제법 확고한 발언이다. 리들은 너무나도 확신하며 추천하는 제이드를 보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제이드가 아이렌의 손 사이즈를 알고 있는가. 그게 신경 쓰였으니까.

 

“꽤 확신하는구나, 제이드?”

“그거야 아이렌 씨의 손이라면 많이 잡아봤으니까요. 눈대중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아. 이런, 괜히 말했다.’ 리들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도움을 받았음에도 어쩐지 머리에 열이 오른 리들은 제이드가 골라 준 장갑을 받았다가, 곧바로 똑같은 사이즈에 다른 제품으로 바꿔 들었다.

 

“조언 고마워, 제이드.”

“뭘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아이렌 씨가 기뻐하면 좋겠군요.”

 

묘하게 날이 선 리들의 목소리를 웃어넘긴 제이드는 다시 아줄에게 돌아갔다.

손님 구경은 그만두고 목도리를 둘러보던 아줄은 어느새 돌아온 자신의 부사감을 곁눈질로 반겼다.

 

“어디 갔다 왔습니까? 제이드.”

“리들 씨랑 있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건성으로 답하는 아줄은 살펴보던 보라색 캐시미어 목도리를 곱게 개어 매대에 도로 올려놓았다. 누군가의 눈동자 색을 닮은 그 목도리에 시선을 빼앗긴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아이렌 씨에게 선물할 겁니까?”

“네?”

“아. 그냥 물어봤습니다. 목소리 색이 꼭 아이렌 씨 눈동자 색과 닮아있어서요.”

 

제이드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리들의 쇼핑을 도와줬던 걸 떠올리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줄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갑자기 저 혼자서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이렌 씨 선물이라면 진작 준비해뒀습니다. 저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만약 아이렌 씨에게 선물할 거라면 이 목도리보다는 좀 더 좋은 걸 사줄 겁니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아이렌 씨 선물은 준비했습니까?”

 

과연. 아줄이 신경 쓰고 있는 건 이거였나.

제이드는 슬쩍 드러난 상대의 본심을 꼬집지 않고, 원하는 정보를 순순히 알려주었다.

 

“저도 준비해뒀습니다. 평소 차에 관심이 많으셨으니, 티포트 세트를 준비했지요.”

“그렇습니까? 하긴, 아이렌 씨도 홍차를 좋아하시죠. 라운지에 오시면 늘 홍차를 주문하시고.”

 

다행히 선물이 겹치진 않았는지, 아줄이 안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노골적인 안심에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삼킨 제이드는 예의상 자신도 같은 것을 물어봐 주었다.

 

“아줄은 그럼 뭘 준비했습니까?”

“비밀입니다. 당신과 같은 건 아니라는 것만은 말해두죠.”

“후후, 그럼 25일까지 기다려야겠군요.”

 

어차피 크리스마스까진 얼마 남지 않았고, 당장 알아내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여유로운 제이드는 즐거운 마음으로 상대의 선택을 상상해 보았다.

아줄이라면 아이렌에게 무엇을 사줄까. 아무래도 너무 비싼 걸 사줄 것 같진 않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싼 물건으로 대충 때울 것 같지도 않았다.

 

“아줄, 제이드. 트레이에게 연락이 왔어. 가게 앞에 있다고 하는데.”

 

그때. 리들이 작은 쇼핑백을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가 무엇을 샀는지 알고 있는 제이드는 저도 모르게 씩 웃어버렸다.

 

“그럼 나갈까요? 저는 더 둘러볼 게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이만 나가지요. ……음? 리들 씨, 뭔가 사셨군요?”

 

아줄의 물음에 ‘아’하고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리들은 괜히 제이드를 한 번 흘겨보았다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돌아섰다.

 

“그냥, 세일하는 김에 샀어. 얼른 나가자. 여긴 너무 붐비니까.”

 

아이렌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 게 부끄러운 걸까. 참으로 쌀쌀맞은 대답이다. 제이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먼저 나가는 리들을 보며 웃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아줄은 왜 저러냐는 듯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02.

 

“아, 진짜! 레오나 씨는 저한테 월급을 따로 줘야 한다고 생각함다!”

 

사감인 레오나를 대신해 시내에 나온 러기는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불평했다. 파티에 필요한 물건이 이것저것 든 쇼핑백은 그리 무겁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잡동사니가 든 탓에 부피가 제법 있어 이동할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고생 중인 러기와 동행하던 쟈밀은 바닥에 떨어질 뻔한 물건을 도로 쇼핑백 안으로 넣어주며 한숨 쉬었다.

 

“너도 고생이군, 러기. 차라리 정말 부사감이었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쟈밀 군에게 그런 말을 들자니 기분이 묘하네여. 쟈밀 군도 고생 중이잖아여?”

“그건…….”

 

말을 하다 만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늘어선 노점상 중 한 곳에서 파는 물건을 구경하는 카림에게로 향했다. 오늘 외출의 목적은 이미 잊은 건지 수공예 액세서리를 구경하는 카림은 가게 주인과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사사로운 수다를 나누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난 이제 익숙해졌거든.”

“하하, 그건 더 슬프네여.”

 

뭐, 어느 쪽의 처지도 딱하긴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서로를 불쌍해할 때가 아니긴 하다. 쟈밀은 늦지 않게 쇼핑을 마치고 집합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기에, 카림을 독촉하러 다가갔다.

 

“카림. 슬슬 돌아가야…….”

“쟈밀, 이것 봐! 예쁘지?”

 

들뜬 얼굴로 상대의 말을 끊은 카림은 반짝거리는 귀걸이를 보여주었다. 쟈밀은 눈앞에 들이 밀어진 보라색 큐빅과 초승달 장식이 달린 귀걸이를 보곤 입을 다물었다가,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좋고 귀한 물건은 잔뜩 가지고 있는 도련님의 주제에, 그다지 고가가 아닌 수공예 제품이 예뻐 보이긴 하는 게 신기하다. 하지만 솔직한 제 생각을 내뱉을 수는 없었던 쟈밀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게 마음에 들어? 살 거면 빨리 사서 가자고. 집합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음. 그러게, 살까? 얼마 안 하기도 하고! 내가 쓰기엔 좀 귀여우니까, 아이렌에게 줄까?”

“뭐?”

 

그 말을 들은 쟈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귀걸이, 카림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럼 처음부터 아이렌에게 사줄 생각으로 보고 있던 걸까.

 

‘아니지. 카림이라면 이런 걸 선물할 생각을 하진 않을 거야.’

 

금전 감각이 남들과 다른 카림이라면 이런 걸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하진 않을 거다. 그리 친하지 않은 기숙사생에게도 비싼 물건을 선물하는 그가, 친한 후배에게 본인 기준으로 푼돈이라 생각하는 가격의 액세서리를 선물할 리 있나.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쟈밀은 결국 지레짐작하기보다는 속 시원하게 묻는 쪽을 선택했다.

 

“혹시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주게?”

“음? 아냐! 아이렌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진작 준비해 뒀지! 이사르 걸 사면서 같이 샀어!”

“……아, 그래.”

 

역시 그랬나. 그것보다 여자친구 걸 사면서 후배 선물도 같이 산다니, 그래도 되는 건가. 같은 물건만 아니라면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뭘 샀는지는 조금 궁금하다. 좀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이렌을 위해서 산 선물 쪽이 궁금했다. 이사르 건, 뭐, 알아서 하지 않겠나. 자기 여자친구인데, 어련히 좋은 걸 사줬겠지. 집안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으면서도 어찌어찌 비밀연애를 이어나가는 카림과 이사르에 제 나름의 존경을 표한 쟈밀은 당장 제게 닥친 일에 대해서 집중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아이렌은 평소 물욕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흥미로워하는 건 많아도 뭔가 하나만 파고들지는 않았고, 필사적으로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있는 사람도 아니었지. 이런 타입의 사람은 선물을 준비할 때 큰 고민 없이 무엇을 줄지 고를 수 있어 편했지만, 쟈밀은 오히려 그런 점을 불편해했다.

 

‘뭐가 제일 괜찮은지, 다른 누군가와 선물이 겹치진 않을지 신경 쓰인단 말이지.’

 

머리카락이 기니 머리끈을 사준다? 그런 건 너무 단순하고, 인상적인 선물도 되지 못할 거다. 그렇다면 평소 좋아하는 디저트나 음료는 어떠한가. 그건 결국 먹고 마시면 사라지니 오래 기억에 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류는? 이쪽은 취향에 안 맞으면 정말 옷장 속의 짐만 되니 더욱 선물하기 곤란했다.

 

‘어차피 뭘 줘도 고맙다고 할 테니,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할 걸 주고 싶은데 말이지.’

 

아아, 그냥 친한 후배라고 생각하고 선물한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을 텐데. 그냥 후배가 아니니 이렇게 골치 아픈 게 아닌가. 이렇게 고민만 하느라 아직 선물을 사지 못했는데.

잠깐 사이에 108개의 번뇌를 맛본 쟈밀은 수공예 제품이 있는 테이블을 훑었다.

 

“쟈밀도 하나 사게? 아이렌에게 사줄 거야?”

“……그냥 둘러보는 거야.”

 

굳이 여기서 사지 않더라도 어떤 걸 선물하면 좋을지에 대한 힌트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겠나. 귀걸이와 반지, 작은 키링과 목걸이 등등을 훑어보던 쟈밀은 결국 지갑을 여는 대신 카림을 끌고 갔다.

 

“안 살 거면 가자고. 러기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차! 러기도 함께 와있었지!”

 

‘다음에 또 올게!’ 귀걸이를 내려놓으며 상인과 인사한 카림은 쟈밀과 함께 러기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 드디어 왔슴까.”

 

먼저 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러기는 피식 웃으며 둘을 반겨주었다. 잠깐이나마 사지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걸까. 쇼핑백을 잠깐 바닥에 내려놓고 쉬고 있던 그는 주섬주섬 짐들을 챙기며 일어났다.

 

“기다리게 했군, 가자고.”

“괜찮아여. 어차피 지금 가도 늦진 않을 테니까. 아슬아슬하게 세이프겠죠, 시시싯.”

 

키득키득 웃으며 앞장서는 러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 사뿐한 몸짓에 본능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쟈밀은 빠르게 상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아까는 없던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음?’

 

커다란 쇼핑백 사이 삐죽 튀어나온 작은 쇼핑백은, 대충 봐도 나중에 쑤셔 넣은 티가 역력했다.

아아, 제가 못 말리는 사감을 데리러 가 물건 앞에서 망설이는 사이 약삭빠른 하이에나는 아무래도 무언가를 결정한 모양이다. 어쩐지 무료하게 기다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설마 그사이에 쇼핑을 마쳤을 줄이야.

 

‘……방심할 수가 없는 녀석이라니까.’

 

뭐가 샀는지 슬쩍 쇼핑백을 뺏어 열어보고 싶지만, 러기도 운동신경은 좋으니 괜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찜찜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던 쟈밀은 마른세수로 표정을 정돈했다.

 

 

03.

 

그 무렵, 사감과 부사감 외에도 여러 학생을 데리고 나온 디아솜니아 기숙사 사람들은 소품샵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음, 이건 우리 기숙사 분위기랑은 안 어울리겠지만 아주 귀엽군! 저건 색이 디어솜니아의 상징색과 비슷해서 사는 게 좋겠어. 아차, 그러고 보니 양초도…….”

 

그 가게 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사버릴 기세로 이것저것 잡아 드는 릴리아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그에 비해서 신중하게 물건을 고르는 말레우스는 상대가 고른 물건을 꼼꼼히 살피며 어떤 걸 사야 할지 선별하였다.

 

“릴리아. 그렇게 많이 사면 예산을 초과할 텐데.”

“으음, 그렇지? 그러면…….”

 

각자 쇼핑하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어느 쪽도 이 시간을 즐기는 건 명백했다. 말레우스의 호위 겸 짐꾼으로 따라온 실버는 진지하게 상의하면서 파티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즐거워 보이셔서 다행이군.’

 

학생이 직접 파티 준비를 해야 하다 보니 번거롭다 여기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무래도 제 걱정은 기우인 듯하다. 왼손에 든 짐을 고쳐 든 그는 릴리아가 든 바구니를 대신 받아주려고 다가가려다가, 매대와 스치듯 발이 부딪히고 말았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매대의 가장 가장자리에 있던 물건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그야말로 아찔한 순간. 호위 일을 하느라 반사신경이 좋은 실버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우선 손부터 뻗었고, 다행스럽게도 추락을 막아내었다.

 

“이런.”

 

자칫하면 아까운 예산으로 상품값을 변상해야 할 뻔했다. 물건이 망가지는 걸 겨우 막은 실버는 제 손에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확인하였다.

 

‘이건……, 보관함인가?’

 

떨어질 뻔한 물건은 도자기로 만든 작은 보관함이었다. 장신구나 작은 소품을 넣어 보관하기 딱 적당한 크기에 귀여운 장식이 달린 그 상품은, 재질 때문인지 크기에 비해선 약간 묵직했다.

중간에 잡아서 다행이지, 이런 게 바닥에 떨어졌다면 반드시 박살 났을 것이다. 실버가 안도하며 물건을 살피고 있자, 함께 외출한 세벡이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뭐냐, 그 녀석에게 사줄 거냐?”

“응?”

“아이렌, 그 녀석 말이다.”

 

갑자기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지. 실버는 의아함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래? 난 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고르나 했지. 그것보다, 한눈팔지 말고 제대로 말레우스 님을 경호하도록!”

 

따끔하게 일갈한 세벡은 먼저 선배들의 곁으로 가버린다. 실버는 왜 세벡이 그런 오해를 하였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제가 손에 든 이 제품이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물건임을 떠올려냈다.

제가 여자에게 선물을 준다면 그 대상은 단 둘뿐이다. 그 중 한명은 이런 귀여운 디자인을 쓰기엔 연세가 지나치게 많은 편이고 이런 디자인을 선호하지도 않았으니, 남은 건 역시 아이렌밖에 없긴 했지.

세벡의 추측을 이해한 실버는, 이 보관함을 들고 있는 아이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이렌이 좋아할까?’

 

자신보다 후배이지만 어른스러운 그이니, 이런 디자인은 부담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소 고양이를 귀여워하거나 아기자기한 그림을 그리는 걸 보면 의외로 이 물건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상상일 뿐이긴 하지만, 아이렌과 이 연보라색 보관함은 꽤 잘 어울렸다. 선물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단 의미였다.

어쩌면, 이 보석함을 떨어뜨릴 뻔한 건 운명이 아닐까.

논리적이진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든 실버는, 조용히 지갑 안을 확인하고 상품을 챙겼다.

 

 

04.

 

쇼핑갔던 이들이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적지 않은 물건을 사 들고 돌아온 아줄은 기숙사에 들어서자마자 의자에 드러누워 있는 플로이드를 발견하고 버럭 소리쳤다.

 

“플로이드! 혼자서 놀지 말고 짐이라도 옮기십시오!”

“응?”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아줄과 제 형제가 돌아온 것도 몰랐던 플로이드는 죄악감이라곤 1g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웃었다.

 

“아, 이제 왔어? 고생이네~, 아하핫.”

“태평하게 웃지 마십시오. 혼자만 쏙 빠져놓고!”

“그렇지만 나는 사감도 부사감도 아니니까?”

 

핑계 하나는 그럴싸하다. 하지만 그게 혼자서 놀 완벽한 이유는 되지 못할 텐데, 어찌 저리도 당당하단 말인가. 아무런 직책도 없음에도 이번 쇼핑에 함께했던 사람들을 떠올린 아줄은 설교를 퍼붓기 위해 숨을 들이마셨지만, 급히 담화실로 뛰쳐나온 옥타비넬의 분위기 메이커가 그 잔소리 폭탄을 막아냈다.

사감의 기분을 상하게 해봐야 자신에겐 하등 좋을 게 없는 걸 아는 멜로드는 얼른 아줄이 들고 있는 쇼핑백을 낚아채 갔다.

 

“어서 오세요, 선배들. 짐은 제가 들 테니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후우.”

 

지금 중요한 건 짐을 누가 드느냐가 아니라, 플로이드만 업무에서 쏙 빠져나간 것이지만……. 후배가 이렇게까지 비위를 맞추는데 역정을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줄은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 제 방으로 돌아갔고, 제이드는 평화롭게 끝난 상황에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 미소의 의미를 모르는 플로이드는 가까이 다가온 형제에게 물었다.

 

“제이드, 왜 웃어? 밖에서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어?”

“흐음, 글쎄요.”

 

지금 이 미소의 원인은 외출 때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밖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긴 했지. 아이렌의 선물을 고르느라 고민하던 리들의 심각한 얼굴을 떠올린 제이드는, 불쑥 제 피붙이도 무언가 준비하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플로이드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준비했습니까?”

“선물? 우리 사이에 굳이?”

“그 대답을 보아하니, 누구의 것도 준비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플로이드라면 크리스마스 선물은 굳이 챙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생일도 기분에 따라 챙길지 말지를 결정할 이니, 이 반응도 특별히 놀랍거나 의아하지 않다.

그 점은 후배조차도 동의하는지, 멜로드는 소리죽여 웃으며 동의해왔다.

 

“하긴, 플로이드 선배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이미지는 아니긴 하죠. 아이렌도 기대 안 할걸요?”

“음? 아기새우?”

 

흥미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며 자그마한 화면에 신경을 집중하던 플로이드가, 그제야 무언가 관심이 간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심심풀이로 하던 게임을 끈 그는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제이드는 아기새우 선물 준비했어?”

“예. 아줄도 준비했을 겁니다.”

“소라게 군은?”

“저도 준비는 했죠. 거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친구 사이니까?”

 

크리스마스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벌써 준비를 마쳤단 말인가. 다들 참 부지런하다. 플로이드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녀석들도 준비했으려나?”

“그럴 겁니다. 리들 씨도 준비했더군요.”

“흐음…….”

 

그 말은, 모두가 준비했는데 자신만 준비하지 않은 건가.

평소라면 ‘다들 하는데 자신만 하지 않는다’라는 게 그리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게 자신의 아기새우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플로이드는 다른 이들의 선물을 행복한 얼굴로 받아줄 아이렌을 떠올리더니, 곧바로 스마트폰을 이용해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갔다.

 

“좋아, 나도 뭔가 사줄까.”

“오, 어떤 걸로 사줄 거예요?”

“소라게 군에겐 안 알려줄 거야. 사실 제이드에게도 알려줄 생각 없지만.”

“이런, 저에게도 비밀로 하시는 건가요.”

 

‘제이드! 이리 와보세요!’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자니, 성실한 아줄이 믿음직한 부사감을 불러냈다. ‘이런, 이런.’ 해야 할 일이 아직 산더미임을 아는 제이드는 별다른 불만 없이 자리를 떴지만, 호명되지 않은 멜로드는 자리에 남아 플로이드에게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근데 정말 뭘 사줄 거예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 소라게 군?”

“그거야 혹시 선물이 겹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서로에게 손해이니까?”

“왜? 아기새우는 내가 뭘 선물해 줘도 기뻐할 테니, 난 상관없는데.”

“……푸핫, 그러게요. 선배랑 선물이 겹칠 다른 누군가만 불쌍할지도.”

 

이 선배의 확신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플로이드의 말대로, 아이렌은 눈앞의 이 남자가 주는 선물이라면 독약이라도 기뻐하며 받는 여자였으니까.

플로이드 리치야 이 학원에서 유일하게 아이렌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지 않는 남자일 테다. 그 사실이 딱히 부럽진 않지만 대단하다곤 느끼는 멜로드는 조용히 상대의 쇼핑을 구경했다.

 

 

05.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아, 굳이 인식하지 않더라도 속절없이 흘러간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까지 약 10분 남은 늦은 밤, 아줄은 파티장으로 변한 담화실의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자러 가려다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막 방을 나오는 플로이드와 마주쳤다.

 

“음? 플로이드, 어디 갑니까?”

“아기새우한테 선물 주러.”

“예?”

“원래 크리스마스 밤에 선물 가져다 놓는 거 아냐?”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어이가 없어진 아줄은 엉터리로 포장된 상자를 힐끔거리며 헛웃음 지었다.

 

“당신이 무슨 산타클로스인 줄 압니까?”

“아기새우는 산타보다는 날 더 기다릴걸, 아하핫.”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그것보다, 저렇게 확신할 수 있다는 게 참 얄미웠다.

기가 찬 아줄이 잠깐 말을 멈춘 사이, 목적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인 플로이드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럼 다녀올게, 금방 올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잠깐만요, 플로이드!”

 

이런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온단 말인가.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 텐데. 아줄은 힘으로 상대를 잡을 수 없는 걸 알기에, 방 안에 남아있는 제이드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다.

 

“제이드, 당신이 좀 말려…….”

 

하지만 아줄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으니. 제이드는 상식인에 가깝긴 하지만 완전히 상식인이 아니었고, 아이렌에 관한 일에는 자주 제어장치가 풀린다는 거였다.

깔끔하게 포장한 상자를 챙겨 든 제이드는 상쾌한 얼굴로 인사했다.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아줄.”

“예?”

“그거야, 이런 재미있는 이벤트를 플로이드만 즐기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후후.”

 

‘그럼, 이만.’ 길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가는 제이드는 순식간에 복도 너머로 사라진다.

어이가 없어진 아줄은 멍하니 서서 곰치들의 등만 바라보다가, 급히 그들을 쫓아갔다.

 

“잠깐, 당신들!”

 

그러나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무래도 아줄 뿐인 모양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복도에 나와서 통화 중이던 멜로드는 그 모든 꼴을 보았던 것인지, 바쁘게 제 앞을 스쳐 지나가는 아줄에게 얼른 조언했다.

 

“잠깐만요, 사감. 그냥 사감도 선물 챙겨 들고 가는 게 어때요?”

“네?”

 

한 시가 바쁜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줄은 어이가 없단 듯 되물었지만, 멜로드는 스마트폰의 마이크를 막고 진지하게 조언해 주었다.

 

“무슨 선물을 준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추위에 망가지는 물건이 아니라면 그냥 전해주고 오세요. 막을 수 없으면 합류하는 게 이득이잖아요? 리치 선배들이 어디 말려지는 존재들이었나요?”

“…….”

 

후배의 말이 맞았다. 오래전부터 그들을 보아온 자신이니까, 저 말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다.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아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더니,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며 자신의 방으로 가버렸다.

 

“하아…….”

 

보아하니 무엇이 더 이득인지 저울질이 끝난 모양이다. 계산적인 아줄의 현명한 선택을 진심으로 기뻐한 멜로드는 마이크를 가린 손을 떼어내고 통화 상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 사이스. 미안. 선배들이 아이렌 고물 기숙사에 산타 놀이하러 가시려고 해서 반겨주다 보니 그만. 응? 그게 무슨 소리냐고? 그게…….”

 

하지만 그게 하나의 소동이 될 줄 어찌 알았겠나.

멜로드는 그저 잠깐 통화를 멈춘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었지만, 그 통화 대상이 사이스 클럽인 것이 문제였다.

 

“야, 옥타비넬 선배들이 벌써 아이렌에게 선물 주러 갔나 봐.”

 

수다스러운 사이스는 흥미로운 옥타비넬의 소동을 같은 방을 쓰는 학생들에게 말해주었고, 그 학생들은 이 재미있는 일을 친한 이들끼리 떠들었으며, 깊은 밤 소란스레 숙덕거리는 이야기는 잠들지 않고 있던 리들의 귀에도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사이스?”

 

그렇다. 한 번 번지기 시작한 소문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를 달려간다.

하츠라뷸 안에서 맴돌던 소문은 어느새 다른 기숙사에도 번졌고, 그 소문을 들은 지기 싫어하는 학생 대부분은, 결국…….

 

 

06.

 

“꼬붕, 대체 이게 다 뭐냐?”

 

차가운 바람이 부는 크리스마스 아침. 파티를 기대하며 일찍 일어난 그림은 방 한가득 쌓여있는 선물상자들과 자신보다 일찍 일어난 아이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현관 앞에 놓여있었어. 아무래도 선배들이 두고 갔나 봐.”

“선배들?”

“응. 선물 상자에 적힌 이름들 보니, 다 선배들 뿐이더라고.”

 

아이렌은 선물상자 위 붙어있는 카드나 작은 메모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무슨 기묘한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들고 온 선물은 전부 2학년 학생들이 보낸 것이었다.

 

“어디 보자, 뭐가 있으려나.”

 

상자를 옮겨놓기만 했을 뿐 뜯어보진 않았던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상자부터 뜯어보았다. 제 팔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곰치 인형이 든 그 선물 상자에는, 익숙한 필체로 적힌 메모가 붙어있었다.

 

“아기새우에게……, 이건 플로이드 선배 건가 보네. 하하. 귀여워라.”

“꼬붕, 이 담요는 누가 준 거냐?”

“어디 보자, 그건 카림 선배 선물이네. 이건 쟈밀 선배 선물이고.”

 

폭신폭신한 담요 옆, 작은 선물상자를 열어본 아이렌은 이국적인 문양의 모빌을 보고 감탄했다. 색색의 투명한 장식이 달린 그 모빌은,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와, 예쁘다.”

 

나중에 저녁에 창가에 걸어두어야지. 그리 결정한 아이렌은 조심스럽게 선물상자에 모빌을 도로 넣어두었다.

아이렌을 도우려는 걸까. 아니면 그저 궁금해서 제가 열어보고 싶은 걸까. 옆에서 또 다른 선물을 열어본 그림은 세련된 원피스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꼬붕, 여기 옷도 있다고! 같이 들어있는 편지를 보니, 그 문어가 보낸 것 같은데?”

“그래? 아줄 선배가?”

 

제 사이즈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궁금하지만……, 아줄이라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었겠지. 그의 정보력을 잘 아는 아이렌은 작은 쇼핑백에 든 머리핀을 꺼냈다. ‘자그마한 선물이라 죄송함다.’ 핀 사이에 끼워진 메모를 보아하니, 이건 러기가 보낸 모양이었다.

아아, 죄송하다니.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자신은 이렇게 챙겨준 점을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도 얼른 선물을 전해주고 싶네.”

 

아침부터 가슴이 따뜻해진 그는, 아직 열어보지 못한 상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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