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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사이 함박눈이 내려 쌓이기는 했지만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시기를 생각해보자면 제법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날씨가 급작스레 나빠질 일은 없겠구나, 하고 쉬운 예상이 가능했다. 아침에 일어나 이를 파악한 화빈은 기분이 매우… 울적했다. 약속이 있는 날마다 높은 확률로 좋지 않았던 날씨가 오늘따라 누구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좋은 것을 보니 아무리 무던한 화빈이라도 골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침대 위가 아니라 밖에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있을 시점이었던지라 더욱 그랬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해 경위를 따질만한 일조차 없었다. 분명 어젯밤에는 몸 상태가 괜찮았는데 자고 일어나니 몸살 기운과 함께 약간의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추운 밖에 나가 돌아다닐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가볍게 생각하자면 계절이 겨울 한복판이었으니 가벼운 감기겠다만, 그걸 하필 크리스마스에 정확하게 맞춰 걸리는 게 도화빈다웠다.

만나기로 한 사람은 화빈의 연락을 받자마자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하루를 꽉 채워 맞춰놓았던 계획을 취소하고 병문안을 약속했다. 기실 감기가 옮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본인 때문에 약속이 취소됐다는 미안함 때문에 거절할까 싶었으나 그런 말을 하기에는 두 사람은 충분히 연인이었으며, 상대방은 그 속을 미리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따 보자며 씨 유 레이터, 하고 쐐기까지 박아버렸다. 좋은 말로 눈치가 좋고, 나쁜 말로는 심하게 약았다고 평할만한 말투였다. 그런데도 기분이 슬며시 좋아지는 건, 제 연인의 영악한 다정에 알게 모르게 길들었기 때문일까.

 

매켄지는 화빈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도착했다. 한 손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들어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고, 다른 손에는 감기에 걸린 사람에게 필요할 만한 약이나 물건, 그리고 프랜차이즈 가게의 죽이 들려있었다. 남을 챙겨본 역사가 없을 것이라 예상되는 사람이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나, 하다가 화빈은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화빈이 매켄지에게 병문안을 갔을 때 준비해갔던 것들과 내용물이 비슷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것까지 귀여워하면 안 되겠지. 작은 웃음을 갈무리한 화빈이 매켄지에게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밖에 추웠죠?”

“I’m okay. 차 타고 와서 괜찮아요.”

 

그래도. 화빈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작게 덧붙이자 매켄지가 금세 빙글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픈 건 화빈이에요. 장난스러운 말투로 걱정을 전하며 오른손을 들어 화빈의 얼굴을 슬며시 감쌌다. 열이 오른 얼굴 위에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바닥이 닿으니 처음에는 차가웠고, 온도가 적응되니 시원한 감각이 퍽 좋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싶으면서도 아늑한 서늘함에 한쪽 뺨을 조금 오래 내어주었다. 온도를 공유하는 화빈이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린 사이에 매켄지가 제 손가락 끝에 닿은 귓바퀴를 간질이는 장난질을 쳤다.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화빈이 고개를 들자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다.

매켄지는 이따금 화빈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고는 했다. 그 행동이 화빈을 오롯이 눈동자 안에 담아놓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주변에 널려있는 젤리라고 명명된 것들을 살피기 위해서인지까지는 가늠하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고. 또 가끔은 그렇게 살핀 후 먼지를 털어내듯 무언가를 쳐내고는 했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그 행위가 옛날에 자신에게서 젤리를 뜯어갔던 개차반 같은 짓거리와 결이 다르다는 것만 명확하게 알았다. 그래도 과거는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화빈은 이럴 적마다 기묘한 감각에 휩싸이고는 했다. 이유 모를 열병이 난 자신을 내버려 둔 그가 미웠고, 연인을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준 그가 사랑스러웠다.

알지는 못해도 서로 딴생각이나 하던 두 사람은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시선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었다. 매켄지도 이를 눈치챘는지 살갑게 눈을 휘며 웃더니 천천히 몸을 숙였다. 명백히 스킨십을 하려는 듯한 몸동작에 화빈이 재빨리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명백한 제지에 매켄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불쌍한 척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Even it's Christmas?”

“크리스마스여도요. 감기 옮으면 어떡하려고요.”

 

단호하게 밀어내는 말에 매켄지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이유에 대해 납득했다기보다 화빈의 보인 거절을 받아들인 것일 터다. 하마터면 분위기에 휘말릴 뻔한 화빈은 모르는 척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열이 오른 것도 같다.

 

“케이크 먹을까요?”

 

화빈이 다급히 주제를 돌리자 매켄지가 비실비실 웃으면서 동조했다. 좋아요. 초콜릿케이크인데, 음, It's not sweet? 달지 않다던데. 화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한국에서 디저트가 맛있다고 할 때 쓰는 말이에요. 짙은 초콜릿 가루가 잔뜩 얹어진 동그란 케이크 위에는 나름 크리스마스랍시고 산타나 트리같이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설탕 코팅을 입힌 과일들과 함께 잔뜩 올라가 있었다. 두 명은 화빈의 집에서 만나면 항상 하듯이 약간 좁게 느껴지는 소파에 붙어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크리스마스였으니 전부 짐작이 갈 법한 영화들만 줄줄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게 또 낭만이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시간을 죽이다 보니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벌써 검어진 후였다. 약을 먹고 따뜻한 곳에서 한참을 쉬었더니 몸 상태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매켄지도 사이마다 상태를 확인했으니 그도 알고 있겠지.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니 잠깐이라도 나가자고 할까, 화빈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화빈.”

“네?”

“크리스마스여도요?”

 

바로 곁에서 소곤대는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묻어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진심이 아닌 말은 아니었다. 능청스러운 애정의 속삭임에 화빈이 눈을 두 번 느리게 깜빡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눈을 감은 후에는,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다시 뜨지 않았다. 매켄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주 짧은, 하지만 그렇게만 표현하기에는 농도가 짙은 고요가 지나고 화빈이 다시 눈을 뜨고 나서 내내 생각하던 한 가지를 말했다.

 

“그런데 이 케이크, 솔직히 너무 달아요.”

“I think so, too.”

 

서로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특별한 날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케이크는 지나치게 달아도 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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