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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드림 커플의 2세가 언급됩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언급됩니다

*워킹데드 시즌 11까지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 및 관계가 언급됩니다.

 

만들어진 지 백 년이 다 되어가는 흑백 영화의 호들갑스러운 대사 사이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막 손에 쥐었던 머그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윤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슬슬 교체할 때가 되었는지 가장자리가 희끄무레하게 번진 전조등 불빛이 차고 쪽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제 연락을 받고 바로 출발한 모양이었다. 하긴, 조금 여유롭게 굴었다가 일이 틀어지면 차 안에서 옴싹달싹도 못하고 갇혀있어야 할지도 모르니까. 설마하는 마음으로 여유를 부렸다가 예정에도 없이 아이들이 깨는 바람에 두 시간은 뜬눈으로 버텨야 했던 작년의 일이 생각나 윤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오래도록 함께 한 이들은 서로의 걸음 간격까지 알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차고에 차를 넣고, 뒷자리에서 짐을 꺼내고, 현관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역시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짐을 놓치거나 하는 돌발상황이 있어도 오차 범위 내에서라면 충분했다. 그리고 일부러 미끄럽지 않은 포장을 골랐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입어 느슨해진 니트 카디건의 소맷단을 정리한 윤은 느긋하게 문을 열었다. 고생했어요. 혹시라도 잠든 아이들을 깨우게 될까 한없이 속삭임에 가까워진 인사말이 축축한 겨울 공기 속으로 부연 자국을 남기며 퍼져나갔다.

 

"캐럴한테 선물은 잘 받아왔... 어머?"

 

찬 공기를 가늘게 꿰어가며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멈칫 굳어 낮은 층계참으로 떨어져내렸다. 제법 부피가 있는 짐은 옆구리에, 그다지 크기가 크지 않은 짐은 반대편 손에 단단하게 쥐어들고 있던 이의 어깨가 예고없이 호되게 걷어채이기라도 한 것처럼 움칠 튀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윤은 마치 짓궂은 장난이라도 치듯 가늘게 뜬 눈으로 눈 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현관 등의 아래에 서있는 터라 마주하게 된 본래의 푸른 빛이 흰 빛에 잡아먹힌 눈동자에 드물게도 간절함이 어려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간절함으로 넘어가 줄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이 있지 않은가. 부러 한 쪽 발에 체중을 실어 반항적인 자세로 몸을 기울인 윤이 과장된 자세로 팔짱을 꼈다. 도대체. 짧게 떨어진 의문사에는 짐짓 비딱해진 몸과는 달리 솔직한 웃음이 가득 묻어났다. 도통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는 상황을 한탄하고 싶은지 눈 앞에서 길게 흘러나온 한숨이 서걱대며 얼기 시작한 손 끝으로 떨어졌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됐어요?"

"젠장, 진짜 한 번을 안 넘어가주는구만."

"그렇지만, 당신이 고작 30분만에 산타가 되어서 돌아왔잖아요."

 

뺨을 간질이듯 뻗은 손 끝에 겨울 습기로 축축해진 플라스틱 섬유가 엉겨붙었다. 일부러 ‘산타’ 라는 단어를 단어를 똑똑 소리내어 분명하게 발음하자 으레 ‘산타클로스’ 하면 떠올릴 희고 덥수룩한 가짜 수염을 얼굴에 붙인 채 산타클로스의 붉은 모자까지 머리에 눌러 쓴 대릴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려 손 끝을 피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언제나의 대릴다웠다. 입 안으로 잔뜩 솟아오른 웃음을 틀어막듯 입술을 말아물고 가짜 수염을 손 끝으로 매만지는 윤을 복잡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남편이 또다시 긴 한숨과 함께 턱을 끄덕였다. 체온이 섞여 도리어 건조해진 숨결이 손등 위로 미끄러졌다.

 

“일단 들어가자고. 또 크리스마스부터 감기로 앓고 싶지 않으면.”

 

이번에는 알콜 덕분에 뜨끈해진 몸만 믿고 밖에 나서는 바람에 온종일 침대 위에서 끙끙 앓았던 크리스마스를 기억해낸 윤이 앓는 소리를 낼 차례였다. 윤은 조금 아쉬운 몸짓으로 수염의 흰 끝자락을 만지던 손을 뗐다. 현관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서자 평소보다 무거운 걸음으로 현관에 들어온 대릴에게서 겨울의 젖은 쇠냄새가 풍겼다. 양 손에 아이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라 부실 채권이라도 억지로 떠맡은 것 같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윤은 자꾸 입 안을 간질이는 웃음을 삼켰다. 현관과 아이들이 있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제법 가까웠다. 마음껏 웃었다간 아이들이 깰지도 몰랐다.

 

루돌프도 썰매도 거대한 선물 보따리도 없이 소박한 두 손으로 쥘 수 있는 선물만 이고 진 채로 집 안에 걸어들어온 산타클로스는 현관과 이어진 다용도실을 지나 거실로 들어설 때까지 필사적으로 침묵했다. 영겁처럼 느껴지는 그 짧은 거리 속에서 윤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모자도 얼굴에 붙어있는 수염도 잊어버리기를 바라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지. 그와 길다면 길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 두 아이가 있는 지금껏 대릴은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 때 분장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분장이라면 치를 떨며 도망치는 성향은 아니었고 할로윈 때라면 아이들이며 윤에게 그럭저럭 어울려주기는 했지만 그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산타가 되어서 온 것이다. 그것도 윤이나 아이들의 등떠밈도 없이. 억지로 들른 서점에서 기대도 없이 재미있는 책을 찾아낸 어린아이처럼 윤의 눈동자가 문득 가늘게 휘었다. 그 와중에 또 옷은 갈아입을 생각이 없다는 듯 꼭꼭 챙겨입은 펑퍼짐한 점퍼-나갈 때 입고 나갔던 바로 그것-이 자꾸 목 안을 간지럽혀 웃음이 끓었다.

 

거실 테이블 위 머그잔 안에서 흘러나온 시나몬 향기가 난방기의 따뜻한 바람을 타고 온 거실을 채웠다. 행여라도 발소리를 죽여 다가온 아이들이 보게될까-크리스마스만 되면 아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예민하고 날렵해졌다-거실을 등진 소파 맡에 선물들을 내려놓은 대릴이 윤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한 번 길게 앓는 소리를 냈다. 모든 희망이 부서진 사람이나 낼 법한 소리였다. 선물 포장지가 뜯어지기를 기대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윤을 향해 대릴이 손을 내저었다. 알았다고, 말하면 되잖아. 목소리로 빚어지는 모든 문장들에서 침울함이 뚝뚝 떨어져내렸다.

 

"릭이 준거야. 그 인간, 아주 작정을 했던데."

"릭이요? 대체 뭘 했길래?"

 

이미 법적 성인이 되어 방학이나 된 칼은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나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칼과는 나이 차가 크게 나는 딸 주디스나 미숀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RJ는 그들의 아이들과 나이대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만큼 크리스마스가 되면 잔뜩 들떠 산타클로스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아래의 어린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기인 만큼 릭은 늘 크리스마스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결혼 전, 윤과 함께 살기 전의 대릴마저도 가끔은 그 열의에 휘말려들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릭의 아이들과 놀아주다 비슷한 과정을 거쳐 초대되어 온 윤과 멀뚱히 마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릭을 잘 아는 대릴의 입에서 무려 ‘작정을 했다’는 소리까지 나오다니. 윤은 흥미진진하게 대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기운이 딸려나가기라도 하는지 대릴이 둔한 몸짓으로 미간을 주물렀다. 그러나 몸짓에서 느껴지는 탈력감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소리가 번져있었다. 이곳에서의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본인도 캐럴의 집에서만큼은 제법 분위기를 타 즐거워한 것이 그대로 읽히는 웃음이었다.

 

"그 집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갔어. 에제키엘한테 분장까지 받고."

 

마치 눈에 보이듯 선하게 그려지는 광경에 윤이 숨을 뱉어내듯 짧게 웃었다. 아무런 준비없이 연극 무대에 던져져도 성황리에 공연을 마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캐럴의 파트너가 최근 무대 분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윤도 알고 있었다. 할로윈이면 제법 실감나는 분장을 해주어 친구들의 아이들은 물론이요 이웃의 아이들에게까지 인기를 끌었다는 소문이 친구들 사이에서는 자자했다. 그런 에제키엘에게 얼굴을 맡겼다니. 과연 작정을 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 싶었다.

 

문을 열어준 미숀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오랜만에 돌아온 집에서 동생들을 위한 공범으로 합류한 칼은? 크리스마스 오후에는 모두 그린 농장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 때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윤은 마치 놀리듯 턱 끝을 까딱였다. 장난기에 푹 젖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발치로 흘러들어 복사뼈 끝자락을 간질였다.

 

"당신도 기왕 하는 김에 분장도 받고 오지."

"이것도 집에 오기 전에 떼고 오려다 말았는데 분장은 무슨..."

 

뒤통수 즈음에 둘러묶은, 가짜 수염을 고정하기 위한 줄을 퉁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우그러든 미간 사이로 험악하게 그어진 세로 주름이 가시가 잔뜩 돋은 맹수처럼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가시돋은 태도에 질려 화가 났거니 넘겨짚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바로 마주하고 있던 윤은 멈칫하는 기색도 없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날 한 점 서있지 않고, 구겨진 눈가 끝에는 짜증이나 분노 대신 멋쩍음과 어색함이 어른거리는 것이 그대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정 반대의 다른 것으로 감추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것보다는 과장스럽게 부풀리거나 날을 세우는 것이 익숙했던 대릴의 과거가 남긴 버릇이었다. 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점차로 그의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던 아주 오래된 버릇, 서툴던 시간의 흔적. 손 끝에 담긴 감정이 들킨 것을 알게 되어 쑥스러워진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자꾸 웃음을 터뜨리는 윤을 앞에 두고 퉁명스러운 척 구는 것이 어려웠는지 결국 덥수룩하고 흰 수염 아래로 피식 웃어버린 대릴이 손 끝으로 둥글게 휘어진 윤의 입가 끝을 엉망으로 문질렀다. 아주 귀에 걸어놓지 그래. 그러면서도 정작 문지르는 손길에는 어떤 타박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애정만이 가득해 윤은 간지럼을 피해 도망다니는 어린아이처럼 몸을 가볍게 뒤채며 키득거렸다.

 

움츠리는 몸을 쫓아가는 시선과 집요하게도 뺨을 문지르는 짓궂은 손 끝을 피하던 걸음을 멈춰세운 것은 대릴의 발 끝에 닿은 선물 포장지가 바스락대는 소리였다. 어린애들처럼 장난에 열중하던 두 사람은 웃음섞인 숨소리를 비집고 들어온 그 가느다란 소리를 따라 멈칫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제 머리 위에 얹은 붉은 고깔모자와 얼굴 위의 흰 수염이 생각난 것인지 대릴이 윤을 쫓느라 잔뜩 수그러진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림자는 물러났지만 숨소리 섞인 웃음소리가 여전히 윤의 뺨 위로 가루눈처럼 흩어졌다.

 

양 손 가득히 들려 집 안으로 들어왔던 두 개의 크고 작은 선물들이 다시 그의 손에 들렸다. 때는 크리스마스의 새벽, 붉은 옷 대신 점퍼는 포기하지 못한 어설픈 산타라고 하더라도 바쁘게 움직여야 할 때다. 최대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손 안의 선물들을 단단하게 고쳐 쥔 대릴이 윤을 향해 소리 죽여 물었다. 애들은?

"자고 있어요. 스콧이 낮에 여기저기 잔뜩 데리고 다녔대요. 지금은 업어가도 모를걸요."

"오, 내가 드디어 밀러 영감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걸 받는 모양인데."

 

대릴. 타박하듯 부르는 이름을 따라 현관과 이어진 계단을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린 남편이 목을 긁는 듯한 소리를 섞어 킬킬 짓궂게 웃었다. 웃음 소리를 따라 가볍게 떨리는 점퍼의 견장을 깨물듯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역만리 떨어진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던 자신을 딸처럼 아껴준 사실상의 수양아버지와 남편의 사이가 가까워질 일은 올해에도 요원한 듯 했다. 한 해의 목표였던 가족 대화합은 올해도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래도 둘이서 대화라는 걸 하는 게 어디야. 딱히 도움은 되지 않은 글렌의 위로를 떠올린 윤이 쓰게 웃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티격태격 치고 받는 게 두 사람 나름의 친밀함일지도 몰라. 제발 그랬으면. 반 쯤은 포기나 자기 암시에 가까운 생각을 하던 윤은 문득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는 남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의 짓궂은 웃음은 겨울 입김의 환상인 것처럼 벌써부터 잔뜩 소리를 죽인 걸음으로 걷고 있는 등. 어릴적 부모님이 두고 간 이불 맡의 선물이 기뻤다는 그의 이야기에 그럼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해주자고 선뜻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윤은 발 끝을 살짝 든 걸음으로 이제 막 첫 번째 계단 위로 발을 옮긴 대릴을 따라잡았다. 가볍게 점퍼의 끝단을 쥐면 어떤 경계도 담기지 않은 푸른 새벽별의 눈동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아뇨, 생각해보니까 산타한테도 작은 선물 하나 정도는 줘야할 것 같아서."

 

가늘어진 눈매를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시선은 대충 ‘또 그 놈의 산타’ 같이 툴툴대는 말이겠지. 흰 수염으로 덮여 평소보다 더욱 관록있어 보이게 된 얼굴을 다시 한 번 찬찬히 훑어보며 윤은 가만히 웃었다. 손을 뻗어 감싼 뺨이 조지아의 습기 어린 겨울 공기로 살짝 서늘하게 끈적였다. 한 발을 계단 위에 올려둔 채로도 기꺼이 몸을 틀어 그와 시선을 마주한 대릴이 순하게 길들여진 사냥개처럼 순순히 손 끝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숙여주었다. 익숙하게 마주한 코 끝이 미지근한 체온을 옮기며 가볍게 문질러졌다. 느릿하게 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속눈썹이 가늘게 팔락여 눈가의 움푹한 가장자리를 간질였다.

 

"그리고 나도, 선물을 받기만 하면 미안하니까요."

 

아이들을 위한 ‘산타클로스의 크리스마스 선물’ 은 언제나 늦은 밤, 아이들의 머리맡에 놓였다. 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비밀을 지킬 수 있도록. 때문에 사실 진심을 다한 릭의 분장도, 릭과 캐럴의 합심에 질 수 밖에 없었던 대릴의 어설픈 분장도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윤은 알고 있었다. 완벽한 산타클로스 분장을 했다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울 수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아이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금방 알아차려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 분장을 해도 금방 들키게 될 것이 뻔했다.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사진이야 찍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백화점이며 대형 상가에서 만나는 산타클로스로도 충분할 터였다.

 

그러니 이 어설프게 눌러쓴 붉은 모자와 엉성하게 매듭지어 묶은 흰 수염은 결국 집에서 기다리는 그의 ‘공범’을 위한 것인 셈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계획을 함께 세운 사람, 그리고 잠들지 않고 크리스마스의 깊은 밤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위한 선물. 에제키엘의 분장까지 받아 산타클로스가 된 릭을 보고 그를 맞이한 미숀과 칼은 잔뜩 웃음을 터뜨렸겠지. 방에서 잠들어 있을 아이들을 깨울까 싶어 마구 웃다 서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고 소리 죽여 키득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대릴과 윤이 그랬듯이. 즐거움을 온 몸에 두르고 선물이 되어 돌아온 다정한 산타클로스와 함께.

 

손장난을 치듯 손 끝에 닿는 귓바퀴의 서늘하고 얇은 피부 위를 톡톡 두드리자 가만히 이마를 맞대어 주고 있던 대릴이 문득 장난스럽게 콧등을 구겼다. 들켰다, 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기도 했고 반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돌리고 싶은 얼굴이기도 했다. 윤은 모르는 척 눈을 깜박이며 대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니까. 혀 끝으로 말을 골라내느라 느릿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림처럼 짧게 접혔다 펴진 눈가 끝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대충... 내년에도 또 이 꼴을 하란 뇌물이시다?"

"그것까진 생각 안 했는데, 당신이 원하면 어쩔 수 없겠죠?"

 

내가 내 무덤 팠구만. 목을 울려 웃은 대릴이 코 끝으로 가볍게 윤의 콧등을 쓸었다. 옅은 담배 냄새와 겨울 바람이 묻어난 숨결이 입술 위로 물길처럼 떨어져내렸다. 묶인 손 대신 다정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켜진 현관 스탠드의 불길을 따라 윤의 뺨과 머리타래를 가만히 매만졌다. 마주 닿았다 떨어진 이마와 코 끝으로 아주 오래도록 체온이 번졌다. 윤이 손 끝으로 가볍게 그의 귓바퀴를 감쌌다. 메리 크리스마스. 언제나 함께했던 크리스마스의 모든 순간들처럼 가득한 사랑을 담아.

 

"메리 크리스마스, 대릴."

"...메리 크리스마스."

 

짧은 인사와 함께 겨울에 온기를 빼앗겨 미지근해진 입술이 맞물렸다. 시나몬과 레몬, 졸인 사과 향과 젖은 쇠비린내가 뒤엉킨 연초 내음이 웃음으로 젖은 숨과 함께 뒤섞였다. 어설픈 산타클로스와 산타클로스의 공범이 선물을 주고 받은, 언제나처럼 행복으로 가득 찬 고요한 크리스마스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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