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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크리스마스의 프로포즈

 

“날이 찹니다. 공주님.”

 

눈바람에 섞여 네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말이 맞다. 크리스마스가 일주일이 남은 정원은 눈이 소복히 쌓여있었고, 차디찬 바람에 섞여 눈까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쉬이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네가 깨어난 이후로 아버지는 빠르게 자리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였고 신하들은 그에 맞추어 결혼식과 즉위식을 준비한다며 각종 서류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눈코뜰 새 바빠진 건 나 뿐이었다. 마물을 해치우는데 공을 세운 조로는 기사 단장이 되었고 훈련에 잔당 퇴치를 한다며 밖으로 나돌았고 그의 몫의 서류까지 나에게 떠넘겨질 따름이었다.

 

“얼마만의 휴가인데.. 그냥 두어라..”

 

와중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정원은 포인세티아를 새로 심어 꽃잎같은 불긋한 잎과 초록의 조화가 소복히 쌓인 눈 속에서도 그 빛을 발하였다.

 

“조로. 너도 곧 국서인데 네 서류는 네가 가져가야하지 않겠느냐.”

“그, 그게..”

 

사실 안될 말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미천한 출신의 그가 기사단장에 올랐으니 처리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었으며 그에 따른 병사들의 반발까지도 모두 그가 처리해야할 숙제였으니.. 국정의 일과 즉위식, 그리고 결혼식까지도 내 손으로 넘어 오는 것이 수순이었다.

 

“되었다. 해본 말이야. 들어가자.”

 

-

 

걸음을 돌리는 그의 발걸음이 무겁다. 이럴 때 일수록 어깨가 무거웠다. 그토록 멀리서 올려볼 때는 그저 고귀하고 강한 나의 구원자였다. 하지만 가까워진 그는 호수에 떠 있는 백조였다.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리는 사람에 불과했다. 어떻게든 그의 짐을 덜어주고 싶었으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포인세티아가 잔뜩 심어진 정원을 거닐던 그 날도 그러하였다. 내내 서류 속에 파묻힌 그 방에서 너는 겨우겨우 빠져 나왔고 언제나 희고 고왔던 그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살짝 검어보일 정도 였으니...

 

“조로님-!”

 

로이아의 시녀 레이카 였다. 처리할 것이 있다며 먼저 방에 들어가 있으라는 말을 따라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조금은 경박한 그 몸짓에 빠르게 옷을 입고 그를 마주하였다.

 

“공주님께 프로포즈는 하셨어요?”

“프로...포즈?”

“곧 결혼식이잖아요! 그래서 예물을 준비해야하는데 조로님이 선물하셨던 반지라던가 목걸이가 있다면 겹치면 안되니까..! 시녀장님이 알아오라고 하셨는데.. 설마 안 하셨어요..?”

 

결혼식의 예물은 본래 여자가 준비하는 것이 이 나라의 전통이었으나 그것은 남자가 번듯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였을 때의 이야기고 모든 것을 그가 하는 지금, 거창한 예물은 아니더라도 반지는 내가 준비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마물 잔당 토벌을 하고 온 나는 그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이를 어쩌지?!

 

“사실 예상은 했어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잘 준비해보시라구요-”

 

그는 양갈래로 묶은 쪽빛의 머리를 흩날리며 포르르 방문을 나섰다. 너는 내가 이런 것을 준비한다면 사양 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모르게 준비해야지 싶었다. 마침 네가 서류에 파묻혀 있는 것이 미안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성을 벗어나 시내로 나서 핏이 잘 선 정장을 사들이고, 눈에 띄는 수선집을 들어가 디자인 책을 펼쳤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왕실의 기사단장 아니실까?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 그게 공주님께 선물 할 드레스를...”

“어머어머! 안 그래도 며칠 전에 공주님을 생각하며 그린 디자인이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오렌지 빛이 찬란히 흘러내려 금빛을 흩뿌리며 포르르 구름이 그려진 계단을 참새처럼 올라간 간 소녀가 곧 작은 인형을 하나 가지고 내려왔다.

 

“네가 올지 안 올지 모르니까 일단 자투리 천으로 인형에 입혀보았는데 어때-? 공주님이니까 내가 특별히 이런 영광까지 누리게 해주는거야-! 인형이 생각보다 작아서 디테일이 안 살기는 했는데 여기는 이렇게, 요기는 이렇게...”

 

그가 늘어놓는 설명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디자인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그저 아름다운 옷일 뿐이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드레스를 고르고 보석샵에 들러 네게 줄 반지를 골랐다.

 

-

크리스마스가 하루 남은 이브에는 그래도 서류가 많지 않았다. 아니, 그동안 그렇게 처리했는데 많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식사도 사치라 생각해 시녀들이 가져다 주는 디저트로 떼운지도 며칠이었는데, 당연한 일이지.

 

“공주님-! 드레스가 도착했는데 입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드레스는 아직 고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말이냐-?”

“음... 익명의 남성 분께서 보내신 드레스 라네요!”

 

풉... 시녀의 서투른 거짓말에 어쩐지 웃음이 비져나왔다. 조로가 보낸 것이겠지. 요 며칠 너는 내가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 했겠지만 꽤나 분주해 보였다. 괜시리 내 손을 만지작 거렸고 나를 조심스레 안는 그 몸짓에도 어떠한 계산이 보였다. 이제 막 기사 단장이 된 너에게 조금 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 정성이 갸륵하여 애써 모른 체 한 것도 며칠이던가. 드디어 그 결과물이 도착한게지, 싶었다.

 

네가 선물한 드레스는 새하얀 순백이었다. 투명한 천에 금색의 실이 고급스런 자수가 놓아져 있었으며 허리선에 맞추어 곡선을 그린 드레스가 곱게 반대로 곡선을 그려 풍성한 자태를 자랑하였고 상대적으로 얇은 천에도 춥지 않도록 고운 털이 어깨와 소매 끝을 장식하여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공주님..... 눈 내리는 산꼭대기에서 본 풍경보다 훨씬 아름다워요...”

 

그의 말이 맞았다. 검은 흑발에 대비된 드레스는 더욱 그 순백의 자태를 자랑했고 간간히 달린 그 보석이 빛을 맞이하여 화려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오늘 밤 조로는 할 말이 있다며 포인세티아 정원으로 약속을 잡은 날이었다.

 

-

정원으로 이어진 길로 그가 나오기 시작했다, 막연히 그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한 드레스는 생각보다도 더욱 빛을 발하였고 달빛이 어둑한 밤에도 그 옅은 빛을 받아 반짝여 눈이 부셨다. 그리고 밤하늘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그윽히 나를 응시하자 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날의 정장을 빼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땐 그래, 이정도면 되었지 싶었는데 그의 앞에선 그저 무색해질 뿐이었다.

 

“고, 공주님..”

“드레스는 잘 받아보았다. 잘 어울리는 것 같으냐..?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고 짧은 대답을 하였다. 이럴 때가 아니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마침 구름이 걷힌 달빛을 받아 반지가 반짝 빛을 발하였다. 너는 예상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왼손을 내밀었다. 그 고귀한 손을 살며시 쥐고 입을 맞추었다.

 

”저를 국서로 삼는 것은 공주님이지만 프로포즈는 제가 하도록 하지요.“

”조로..“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공주님?“

”물론이야.“

 

남은 한짝에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졌다. 때마침 포근해진 날씨 속에 커다란 함박눈이 하늘하늘 흩날리기 시작했다.

”사랑합니다.. 공주님.“

”나도 사랑한다.. 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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