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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후의 시간대 기반

*웹소설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에 대한 전반적인 약한 스포일러 포함.

해당 작품을 열람할 예정인 분께 주의를 요합니다.

 

 

한가로운 오후였다. 평소대로 국왕과의 식사 자리를 가졌고, 그렇게 피망 하나 없어 만족스럽기 짝이 없는 고기 식사를 마친 칼리안이 느긋하게 차가운 민트차를 마시는 그런 평화로운 시간. 그 사이에 조그만 금이 생기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하루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로셸 경이 나를 만나고자 했다고."

"예. 왕자님. 발칸의 일에 대해 보고를 전하러 온 듯하였습니다. 오찬 이후 시간이 남지만 일단 요청을 드리겠다고만 했고요."

"그래.“

 

사실 조용한 체르밀 궁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끄러웠던 왕자들의 속사정을 보자면 일상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런 것은 차치하고 감상적인 표현을 사용해보자면 지금은 일상의 조그마한 귀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란델 형님은 텐실로 가서 왕세자 위를 잇고. 완두콩은, 뭐. 이건 아무래도 좋나. 아무튼 그렇게 기이하리만치 평화로운, 이제는 익숙해진 칼리안으로서의 인생에 있어 이방인이랄 자는 따까리, 그러니까 파란머리 말고. 빨간머리 따까리, 이 놈 뿐이었다.

 

"도대체 또 무슨 시름을 더해주려 하는 건지."

 

애초에 너 왜 아직도 안 나가고 있느냔 말이다. 제온을 물리치기까지의 협력이었을 텐데 그것이 끝났음에도 남아있는 것을 보니 바라는 게 참 많아진 듯하였다. 그것을 기껍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말아야 할지. 그것을 분간하기 어려워졌다는 상념을 하며, 눈을 내리뜨고 있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로셸 경에게 들어오라고 전해줘."

 

그런 뜻을 석찬 이전에 얀에게 전달하였다면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배려였다. 무슨 말을 해주든 일단 들여는 보내줘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마법사들에게는 추위를 가시게 해줄 마법도 존재하였지만, 그것과 기다리는 시간의 무료함은 별개니까. 이것은 그런 생각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로셸이 들어오며 간단한 예를 보였다. 그러고는 잠시 칼리안의 의사를 보는 듯 가만히 있었다. 차를 마시던 칼리안이 말을 허가한다는 듯 눈짓하자 그제야 입이 열렸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팔이 잘렸을 터였던 발칸 대원의 신체 수복 이후 이어진 재활 훈련의 척도와 전투를 겪으며 스러진 일원의 자리를 대신할 보충 인원의 훈련 현황 등, 현재 발칸의 상황에 대한 설명과 필요한 것에 대한 사항이 조리 있게 정리되어 로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발칸의 일은 더 이상 플란츠가 맡지 않았다. 응당 칼리안이 받아야 할 것들이었으니 모든 일이 끝난 이후에는 칼리안의 손에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의 의사가 어땠든 제 살 깎고 남 돕는 일에 쉬이 동참해줄 생각이 없다는 애증하는 형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했을 터였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발칸의 현황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것이 조금 건너뛰는 느낌이 있긴 하여도 그리 부자연스럽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문제는 그것을 전해주는 주체가 저 메디올라눔의 장자였다는 부분에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내가 지원해줄 테니 문제없겠고,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이런 구실을 들고 왔는지 슬슬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들켰을까요?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습니다. 평소에 보고를 하는 이는 니들렌 경이었으니."

 

분명 기뻐했을 거다. 인수인계를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터인 칼리안이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머리 마법사에 대해 잘 알 턱이 있겠는가. 기껏 해봐야 완두콩이 지어놓은 이제는 대원들 입에 완전히 붙어버린 이상한 호칭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상대에게 이상한 작명센스를 지닌 플란츠처럼 거리낌없이 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애초에 술 처먹고 간판 부순 돌아버린 놈들에게 자신이 한 짓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칼리안의 기억력이 별로인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 칼리안을 슬쩍 쳐다본 로셸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이전에 못 드린 대답을 이제는 해드릴 수 있겠다 싶어져서 말입니다."

"어떤 것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도 많아서 이젠 기억도 잘 안 나네."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 했다. 그러니 저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을 터였다. 그의 빈정거림을 들으며 어쩐지 찔리는 기분에 그저 웃음을 띄울뿐인 로셸 또한 별반 다를 바는 없었으니, 그야말로 이상한 긴장감만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그러게 조금 더 솔직하게 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칼리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괘씸하다고 여겨지는 마음은 별개가 아닌가. 그러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이제라도 말해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하는 생각만을 남긴 채, 그렇게 조금 더 유해진 마음가짐으로 말을 이어보라는 듯 살짝 턱짓한 칼리안은 다음 말을 듣고 그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메디올라눔이 카이리스 역사의 한 축이면서 현재까지 일어난 모든 것을 기록해둔 서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죠. 그렇기에 왕자님이 저희 영지에 부군단장님을 보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확실히 그게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대사막의 전사였던 이가 저술했다는 수필이 있었죠."

"아니 넌."

 

 

 

그걸 왜 진짜 지금 말하는 건데. 내 따까리, 협력관계를 가지자는 말은 안했다는 이유로 흐지부지 넘어갈 생각이었던 건가. 와. 나 단물만 빨리고는 뒤통수 맞은 거야? 그야말로 온갖 상념을 다 하는 듯한 칼리안을 보던 로셸은 예상했다는 듯 빠르게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사실은 이리 말해도 별것 없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혼란만 주겠다 싶어 언급하지 않았던 거고요."

 

그리고는 곧장 본론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사막의 전사들. 대사막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생을 그러쥐지 못한 채 하루하루 죽어갈 뿐인 이들의 집합. 그리고 그런 사이에 악신이든 무엇이든 세렌티와는 다른 무언가를 믿던 그런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악신과는 또 다른 신을 믿었다. 그 신의 이름에 대한 것은 그리 기억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러니까, 인간으로 태어난 신에 대한 이야기였죠. 이 또한 조금 안 좋은 추억일까요."

 

그렇다. 그들은 인간의 왕으로서 태어났다는 이를 믿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됐으니 인간의 왕이라는 뜻의 제온과 퍽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칼리안은 로셸이 왜 굳이 이 이야기를 안 했는지 쉬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당연했다. 수필을 남길 정도라면 애초에 어느 정도 언어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사람이고 삶에 대한 욕심도 있을 테니 굳이 대사막에 계속 남아 피곤한 생활을 영위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아마도 카이리스의 어딘가에 망명하든 어쨌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여하튼 그리하다 보니 재밌는 사실을 알아서 말입니다. '크리스마스' 그들은 다음 날, 그러니까 12월의 25일을 그리 불렀습니다. 자신들이 믿는 누군가가 태어난 날이라 하며 축복의 날로써 남겼죠.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재밌지 않습니까. 왕자님에게 해의 마지막 주는 그저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일부였을 테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저희는 언제나 기적의 언저리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그 말을 듣게 된 칼리안은 결국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번 웃음보가 터지면 쉬이 멈출 일이 없던 칼리안 임을 잘 알고 있던 로셸은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겸, 얀이 내어준 차를 한입 마시더니 결국 도로 내려뒀다. 그것을 본 칼리안의 웃음보가 다시 한번 터졌다. 그래. 이 따까리도 결국 언제부터인진 모르겠지만 깨달아버렸구나. 나도 참 들키는 재주 하나만큼은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웃음을 겨우 가다듬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오늘 찾아왔나.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동생의 생일은 그저 생일로 두기로 했다. 뭐 이런 말인가. 난 또 생일선물이나 요구하시려나 했더니. 더한 것을 들고 왔네."

"속 보인다고 생각되시겠지만, 저 자신도 무언가에 욕심을 내도록 노력하라.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확실히 옳으신 말씀인 듯하여 조금 참고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네. 그래서 연에 대한 것도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이건가."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생에서 자신은 죽었으리라는 사실을 말이지. 그렇기에 저렇게 두리뭉실하게 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일 터였다. 결국 칼리안 또한 로셸을 향한 직접적인 구원을 안겨준 주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분명 그에게 부담이 되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이를 더욱 확실히 증명시켜주기도 하였으니 그를 의지하겠다는 행동의 표명이었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나. 메디올라눔 소백작, 아니 이제는 후작인가. 그 자리를 넘길 수 없게 됐음을 확실시하게 됐던 놈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원래도 그러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리도 유해졌는지. 이 또한 나를 닮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칼리안은 손가락으로 로셸을 가리켰다. 하지만 로셸은 그것이 자신이 아닌 로셸 너머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쉬이 알 수 있었다. 칼리안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만 더 지나면. 더 이상 나를 앞에 두고 그렇게 굴지 않아야 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그야 물론이죠."

 

그리 말하며 일어난 로셸은 아까의 인사가 거짓이었다는 듯, 다시금 정중한 예를 보이기 시작했다. 카밀론 궁. 왕세자들만이 갈 수 있다는 궁. 하츠아라가 제 아들 이름으로 삼으려 했다던, 언젠가 르메인조차도 생활하고 있었을 그곳을 향하여. 확신이 담긴 듯한 손짓을 보인 3왕자를 보게 되었던 로셸은 살풋 웃었다. 역시 아무래도 이 사람 곁에 있다 보면 꽤나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사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허리를 세운 로셸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역시, 이게 나을 터다.

 

"카밀론 가서 개 키울 준비나 하시죠."

"고양이 없어져서 좋을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네."

"어차피 알아서 처리해주실 것 아닙니까. 오늘처럼 말입니다."

 

그런 말들을 방아쇠로 결국 두 사람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냈다. 그리곤 다시 평소대로 헤어졌다. 간단한 예를 보이곤 왕자의 방을 나와 체르밀 궁의 복도와 계단을 거닐던 로셸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이야기가 제법 길어져서 그런지 어두워진 하늘이 로셸의 눈에 가득 담겼다. 궁을 나오고는 곧장 살짝 고개를 돌려 체르밀 궁 3층을 바라보았다. 얀의 손에 테라스의 문이 닫히고 커튼이 닫히며 곧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분명 너무 오랫동안 깨어있으면 건강에 안 좋다는 말 같은 것을 하신 것이겠지. 로셸은 그것을 보고는 웃으며 그 방향을 향해 한마디를 남기고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빌헬름 관으로 향했다.

 

그래, 분명 그런 말을 했을 터였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두 번 다시는 꺼내지 않을 축복의 인사를 말이다.

로셸이 빌헬름 관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가다 갑자기 모습이 사라질 즈음, 체르밀 궁의 창가에 서있던 인영 또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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