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산타 할아버지께서 정말 오실까요?”
눈꽃 모양의 장식을 전나무 가지에 달던 소피아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들, 데이비드 홀든은 투명한 공의 표면에 붙은 작은 크리스탈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매만지고 있다가 제 어머니가 빈손을 뻗자 얌전하게 장식을 건네주었다. 오, 세상에 벌써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그걸 받아든 소피아는 내면에서 차오르는 당혹감을 억누르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데이비.”
평균적으로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는 나이가 여덟 살이라고 어디 사는 누군가가 기고한 글에서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올해로 여섯 살인 데이비드는 아직 그 나이가 아니었지만 원체 영민한 아이니 이미 어느 정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장작 타는 소리가 따스하게 방안을 채우고 있음에도 소피아의 등골에 서늘한 기운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녀는 일부러 천천히, 처음부터 주름 하나 가지 않았던 새틴 리본을 판판하게 펴고는 묵직한 장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안쪽 가지에 두른 뒤, 단단하게 매듭을 지었다. 잠시 몸을 뒤로 물러서 자기 솜씨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리저리 빛의 파편을 흩뿌리는 크리스탈 장식품을 향해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지개의 편린을 닮은 모양새였다. 소피아의 마음을 심란하게 휘젓는 질문을 던진 아들도 어느새 정교하게 세공된 크리스탈과 그 주변을 맴도는 빛무리에 마음을 뺏겼는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지, 신중하게 고민을 이어갔다.
그녀의 남편 다이무스라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낭만보다는 실용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다이무스라면, 아들의 질문에 거짓 한 톨도 섞지 않고 대답해줬을 게 분명하다. 그라면 진지하게 “산타 할아버지”의 모티브인 성 니콜라우스의 생애부터,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가족을 도와주었다는 미담까지 설명하고 더 나아가 성탄절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의미를 되새겨야한다는 교훈으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이 사실은 북극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진실과 더불어서. 참으로 다정하고 유익하며 뜻깊은 대화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여섯 살에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접을 테다.
하지만 소피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비드가 제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본 게 다행이라며,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나저나, 그건 왜 물어보는지 엄마는 궁금하네? 항상 오시지 않았니?”
명랑하게 울리는 질문에 크리스탈 장식의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던 아이가 아주 약간, 속상한 기색을 내비쳤다. 데이비드는 늘 원하는 걸 한 번에 말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도 남편도 강경한 고집쟁이들인데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여린 아이가 나왔을까. 소피아는 그 사랑스러운 낯에 망설임이 깃들 때마다 말랑한 볼에 입맞춤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곤 했지만. 예전에는 몰랐는데…….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웅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하루 만에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가야 하는데 우리 집은 늦게 오지 않을까요? 다른, 더 착하고… 할아버지가 필요한 애들이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래도…저도 산타 할아버지 보고 싶은데…….”
예상보다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염려하는 아들의 말에 소피아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웃는 대신, 무릎을 굽히고 자기와 똑 닮은 녹음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순한 눈매에 걱정이 넘실거리는 광경이 어쩐지 안타까웠다. 소피아가 다정하게 데이비드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동안 벽난로 안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와 저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가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장작에서 피어오른 온기는 어느새 어린 아이의 은발에 내려앉아 은은하게 빛나는 주황색 후광을 만들어냈다. 데이비드는 홀든 가문의 은발을 물려받았지만-소피아에게는 애석하게도-아이의 어머니처럼 머리카락이 금방 구불거리곤 했다. 그 부드러운 구불거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던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그리고 그녀가 목소리를 낮춘 채,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이어갔다.
“사실… 산타는 사실 한 사람이 아니거든.”
“…정말요?”
그 말에 데이비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하던 반응에 소피아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럼. 그러지 않고서야 네 말대로, 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전 세계의 모든 집에 갈 수 있겠어. 안 그래? 어머니의 단호한 설명에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납득할 수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그러면… 왜 전부 ‘산타 할아버지’라고 부르죠?”
소피아가 아들을 품에 안자 아이는 익숙하게 그녀의 목에 팔을 둘렀다. 체온이 살짝 높은, 아이 특유의 몰랑몰랑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잠시 눈을 감고 볼에 닿는 따스한 부드러움에 젖어 들던 소피아는 금방 다시 연기를 이어나갔다. 그거야, 그분들은 직접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얼마나 겸손하고 훌륭해? 소피아가 즉흥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에 이미 함뿍 빠져버린 데이비드가 제법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벌써 자야 할 시간이네. 네 아버지가 오늘은 조금 늦는구나.”
시간을 슬쩍 확인한 소피아가 아들을 고쳐 안고 문가로 걸어갔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살며시 그녀의 어깨를 치자 소피아는 위를 가리키는, 통통한 손가락과 마주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녀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릇푸릇한 겨우살이에 불그스름한 열매가 선명하게 맺혀있었다. 소피아는 아들의 볼에 입술을 꾸욱 눌렀다가 그 말랑함에 숨결을 후욱, 내뱉었다. 떨리는 진동이 간지러워서 데이비드는 작게 키득거렸고 소피아는 그 웃음소리가 그 어떤 종소리보다 맑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데이비드 홀든이 가장 존경하는 능력자는 아버지, 다이무스 홀든이었다. 능력자의 소임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근엄한 모습에 어린 데이비드가 위압감과 경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산타가 아버지만큼이나 훌륭한 능력자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굴뚝을 타고 벽난로를 통해 들어오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선물을 주고 가는 사람이라면 분명 능력자가 아닐 수 없었다. 데이비드는 어린 아이 특유의 상상력으로 이미 마음속에 결론을 내렸다. 설렘과 긴장감으로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는 척하던 데이비드는 소피아가 잘 자라고 이마에 키스하고 방을 나서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금방 사물의 윤곽선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린 아이는 침대에서 내려오고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조그마한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데이비드의 침실을 통과하는 선을 만들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지 겨우 여섯 해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눈꺼풀을 무겁게 끌어내리는 수마는 견디기 힘든 상대였다. 잠시 졸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데이비드는 졸음이 아직도 붙어있는 눈가를 비비며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저 멀리, 불그스름한 모자와 그 끝에 달린, 앙증맞은 하얀 공이 거실로 향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산타다. 작게 속삭인 아이는 얼굴이 원목 문에 눌리는 것도 개의치 않고, 최대한 틈에 가까이 붙었다. 지금 트리 아래에 선물을 두러 가는 길일 거야. 조금 있으면 나오시겠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침을 꼴깍 삼키며 어떻게 하면 예의 바르고 진실하게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요, 산타씨.”
나이트가운을 걸친 소피아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에게로 다가가며 덧붙였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같이 트리 장식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그다음 순간, 데이비드는 자기도 모르게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아들이 문틈으로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목에 양팔을 두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데이비는 이미 자고 있어요.”
어째서 어머니가-아버지가 아닌-낯선 이에게 그리도 다정하게 대하는지, 혼란스러워하던 데이비드는 그녀가 끌어당김에 따라 허리를 숙여주는 남자의 볼에 난 흉터를 보자마자 반가운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저 흉터라면 언제, 어디서든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데이비드는 볼에 발갛게 눌린 자국이 나도록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와중에 다이무스 홀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지금까지 자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아이는 재빨리 문을 닫고는 제 침대 위로 쪼르르 기어 올라갔다. 몸을 둥글게 만 소년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손바닥을 타고 심장 소리가 온몸으로 울려 퍼졌다. 오늘은 최고의 날이었다.
아버지가 사실 산타라니!
* * *
다이무스를 따라 시선을 옮긴 소피아는 아들의 방문이 굳게 닫힌 걸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데이비드가 자고 있지 않더군.”
미동도 하지 않는 문을 가늘게 뜬 눈으로 보던 소피아가 작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자지 않고 깨어있었나 봐요. 그러더니 다이무스가 쓰고 있는-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모자의 방울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만큼 산타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산타 모자를 쓰고 있는 다이무스 홀든이라니, 그녀의 남편은 알면 알수록 놀랍기만 한 사람이었다. 소피아가 다이무스에게 자신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산타 이야기”를 해주자, 뜻밖에도 다이무스는 기꺼이 그 붉은 모자를 쓰겠다고 자처했다. 비록 턱수염이나 붉은 코트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다이무스는 그의 성격과 맞지도 않고 그리할 필요도 전혀 없는데도 소피아의 “이야기”에 어울려주었다. 소피아는, 무뚝뚝하고 융통성도 없고 심지어 완고하기까지 한 이 남자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맞춰줄 때마다 뱃속에서 나비들이 퍼덕이는 듯한 감각에 빠져들었다.
소피아는 자신을 위해주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중요하지?”
그녀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제 허리를 감싸는 남편의 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까지 올라가자 손가락을 위로 뻗었다. 다이무스의 시선이 문틀에 걸린 겨우살이에 닿은 걸 확인한 그녀가 수줍음과 설렘이 뒤엉킨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남편은 언제나처럼 근사한 사람이었고, 소피아는 항상 그의 앞에서는 연심으로 가슴이 떨렸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영국에서는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