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가 온실을 나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서운 바람이 애나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숨결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자마자 하얀 형체를 갖출 정도로 시린 날씨였다. 피부를 아릿하게 스치는 건조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는 빠르게 걸어갔다. 쌓인 눈이 발아래에서 뽀드득, 소리를 내며 단단하게 다져졌다. 내년 봄에는 다소 수고를 들여서라도 길을 만들어야 할까,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그녀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우체통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미는 편지로 관심을 돌렸다. 겉봉투에 쓰인 발신자의 이름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그럴 때가 됐네.”
새삼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애나는 작게 감탄을 흘렸다. 혼잣말은 이내 하얗게 피어올라 청명한 하늘을 수놓았다.
* * *
펠리칸 마을 사람들은 매년 겨울 18일이 되면, 루이스 시장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애나는 편지에 찍힌, 익숙한 모양의 봉인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 분도 참 대단하시다니까.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시장으로 지내면서 루이스 시장은 꾸준히 펠리칸 마을의 행사를 홍보했다. 직접 해야 할 위치에 있지도 않은데 언제나 열의를 가진 그 모습이, 애나는 어떨 때에는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올려놓은 물이 다 끓자 그녀는 헤일리의 이름으로 온 편지는 탁자에 놓고 새로 탄 커피 한잔을 든 채 침대로 돌아갔다.
거침없는 손길로 뜯어서 종이봉투의 가장자리는 삐뚤빼뚤해졌고, 중간에 찢어진 자국까지 생겼다. 예전이라면 사무실 책상에 놓아둔 레터 나이프로 신중하게 잘라 열었을테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애나는 깔끔한 걸 싫어하거나 일부러 지저분하게 편지를 뜯으려는 의도가 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생활과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트집 잡으려고 대기하는 상사가 있는 생활과는 전혀 달랐다. 다소 충동적으로 결정한 귀농이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태어나서 했던 결정 중 두 번째로 좋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술에 취한 상태로 한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해먹을 산 것이었다. 펠리칸 마을로 내려와서는 잘 쓰고 있으니까, 후회할만한 소비는 아니었다.
적어도 애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험하게 뜯긴 봉투에서 나온 편지는 정중하면서 친근한 어투에 정갈한 글씨로 용건을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애나가 매트리스 위에 털썩 걸터앉자 그 무게에 함께 들썩인 아내가 자다가 약하게 소리를 흘렸다. 애나는 흩어진 금발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닮은 얇은 체인을 바라보다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잠시 방의 침묵을 흔들었다가 사라졌고, 그녀는 겨울 별 만찬의 행사를 위한 안내를 읽어내려갔다.
몇 년을 살아도 항상 반복되는 연례행사였다. 늘 똑같은 방식이었고 이제는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정도는 손바닥 보듯이 아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질리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베풀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가 중요했고, 선물을 받는 사람의 반응을 기대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으니. 애나는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당부와 25일, 다 함께 축제에서 선물을 교환할 거라는 설명, 그리고 올해의 비밀 친구의 이름까지 읽고 편지를 두 번 접었다.
그리고 어느 새 자기를 향해 돌아누운 비밀 친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금발을 넘겨주었다. 얇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손가락에 감겼다가 흘러내렸다. 잠결에 칭얼거리다가 얼굴을 찡그린 아내가 이내 눈을 슬며시 떴다가 다시 감았다. 찰나의 순간동안 영롱한 벽안이 모습을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몇시야? 입술만 달싹거리는 물음에 애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7시.”
“…겨울에는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
“글쎄, 습관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가 봐.”
그럼 그 습관을 내가 친히 고쳐줄게. 약하게 투덜거리던 헤일리가 애나의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불 안에 있어서 따끈하게 달아오른 팔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잠시 아내를 말없이 끌어안은 채 그 온기를 맛보던 헤일리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요즘 쪘어? 잠에 취해서 평소보다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애나는 커피를 흘리지 않도록 나이트 스탠드에 잔을 올려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건 나보다 밤마다 같이 자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흐음, 몰라. 더 만져봐야 알 수 있겠는걸?”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헤일리가 더듬더듬 손을 옮겨 옷자락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살결을 문지르는 기분이 좋은지, 엷은 미소가 은은하게 번졌다. 애나는 헤일리의 얼굴을 좋아했다. 헤일리는 본인이 좋아하는 해바라기마냥, 화사한 금발이 굽이치고 초여름의 하늘을 머금은 눈매가 매력적인 미인이었다. 도톰한 입술이 보기 좋게 휘거나, 장난기에 눈썹 하나를 치켜올리거나, 짐짓 토라진 척 볼을 부풀릴 때에는 싱그러운 생기가 흘러넘쳤다. 떠오르는 생각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낼 정도로 솔직한 성정이 엿보이는 때는 온통 하얀 모래 속에 파묻힌 무지개 조개를 발견하는 것과 같았고, 애정과 욕망이 함께 얽힌 눈으로 시선을 마주할 때는 잔잔한 파도가 해변을 끌어안는 것마냥 다정했다.
애나가 고등학생이었을 시절부터, 헤일리가 자신을 알지 못하던 시점부터 사랑해왔던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헤일리의 비밀 친구였던 적이 없었구나. 애나는 제 등허리에 붙은 헤일리의 금발을 습관적으로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아내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데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헤일리는 필름을 직접 인화하는, 구식 카메라를 좋아했고 분홍색을 가장 좋아했다. 게다가 최근까지 쓰던 카메라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겼는지 카메라 카탈로그를 훑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니 애나는, 아주 당연하게도 아내의 취향이 맞는-“귀여운”-분홍색 카메라를 선물로 사줄 계획을 세웠다.
“좋아, 통과야. 이제 들어와도 돼.”
나른하게 말린 입술이 벌어지면서 허락이 떨어지자 애나는 그대로 옆으로 누웠다. 자기 온 안쪽에 들어간 헤일리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이는 건 모른 척하기로 했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 헤일리의 금발 위로 애나의 짧은 흑발이 쏟아졌다. 전혀 다른 길이의, 빛깔의 머리카락이 하나가 되었다. 애나는 헤일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다가 햇살이 내려앉자 은은하게 반짝이는 속눈썹과 그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 속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헤일리가 고요함을 깨뜨렸다. 뭘 그렇게 쳐다봐. 쑥스러움이 목소리에 잔뜩 배어 나와 그녀의 귓가를 발갛게 물들였다. 애나는 대답하지 않고 이제는 자기 옆구리를 은근히 간질이는 아내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냥, 내 비밀 친구한테 줄 선물을 생각하고 있었지.”
“…그게 누군데?”
“비밀 친구니까 당연히 비밀이겠지?”
“치사하긴.”
그 말을 끝으로 헤일리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툭, 내밀었고 애나는 부러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양,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자기 불평을 표현하려는 것처럼 굳게 다물렸던 입술이 잠시 후, 부드럽게 열렸다. 애나는 헤일리가 오랫동안 화내지 못한다는 점을 이런 식으로 확인할 때 제일 즐거웠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헤일리는 여전히 애나의 프롬퀸이었다.
고등학생 시절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 애나 또한 헤일리만의 너드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