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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경의 성야

 

 

 단테, 자고 일어나면 일루미네이션이라도 보러 나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만끽할 겸.

 

 그의 연인이 이야기를 꺼낸 건 밤늦게까지 이어진 크리스마스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뒤였다. 24일에서 25일로 날짜가 넘어가는 순간을 모두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던가. 단테로서는 아무래도 좋을 기념일이었으나 에덴의 밴드맨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으로 시곗바늘이 정각에 다다르는 순간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곤 했다. 그 소란에 그의 연인인 히마와리 역시 적극적으로 한몫 보탰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크리스마스 이브 내내 파티를 준비하고 또 즐기다가 날이 지나고서야 돌아왔으니 피곤할 법도 할 것이었다. 단테는 후다닥 씻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널브러진 연인의 행태를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아예 눈을 감다시피 한 히마와리는 반응하기도 귀찮다는 듯 이불 속에 파고들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배를 발랑 뒤집어 깐 연인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흐드러진다. 흘러내린 분홍빛 파도 사이로 둥근 이마가 드러나자, 단테는 압화를 만들듯 숨을 지긋하게 내리눌렀다. 발갛게 남은 흔적이 간지러운지 히마와리가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수마에 꾀인 탓인지 웃음소리는 찬 공기에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 위태로움이 못마땅하다는 기색으로 단테는 입을 열었다.

 

 

 “상관없다만…… 네가 제때 일어날 수 있다면 말이지.”

 

 “단테가 싫으면 말고…, 어 진짜? 아싸.”

 

 

 거절당할 생각부터 했다는 양 준비해둔 문장이 허무하게 끊어졌다. 일루미네이션은 저녁때나 보러 갈 거니까 마음껏 자고 일어나도 안 늦겠지. 그때가 제일 구경하기 좋지 않겠냐며 문제 될 것 하나 없다는 표정을 지은 히마와리가 단테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감길 듯한 눈을 애써 들어 올리는 것이 용하다. 단테는 허,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짧게 내뱉고서 커다란 손으로 연인의 시야를 꺼트렸다. 까맣게 가라앉은 시야에도 히마와리는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짓이 점차 느릿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제 눈을 가린 단테의 손짓이 잠들기 위한 마지막 신호라도 되었던 것처럼.

 고르게 정돈된 숨소리가 침실을 울린다. 슬슬 손을 떼어도 되겠지 싶어 단테가 움직이자 히마와리의 입이 우물거리며 그의 손을 붙들었다. 잠든 게 아니었나? 우물거리는 입이 빚어내는 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문장이다.

 

 

 “다행이네…… 그런 거 싫어할 줄 알았더니…….”

 

 “싫다고 한 적이 있었던가.”

 

 

 단테는 제 연인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제가 없는 곳에서 방황하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어쩌면 꿈속의 대화라고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럼에도, 홀로 사그라지지 않길 바라서. 그의 마음이 닿은 것인지 여전히 체온으로 덮인 시야 속에서 히마와리가 재차 입술을 움직였다.

 

 

 “예전에…… 눈부시게 빛나는 걸 보고 있으면 검게 물들이고 싶다고…… 그랬던가 안 그랬던가…….”

 

 

 본인이 말을 꺼내놓고도 확신이 없는지 문장은 끄트머리가 허물어진 채 적막에 잠겼다. 그 불분명한 확신이 무색하게도 단테는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기어코 수마에 빠지고 만 연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이었다. 화려하게 치장한 배 위에서 단테는 그 말을 입에 올렸고, 히마와리는 당신 진짜 성격 나쁘다며 질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와 함께 움직였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의, 결코 가깝지만은 않은 과거의 이야기. 설마 그걸 들먹이며 제 호불호에 눈치를 볼 줄은 몰랐는데. 짤막하게 혀 차는 소리가 흩어진다. 그 소리에도 움찔거리지 않는 걸 보니 정말로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든다. 히마와리가 잠들지 않았더라면, 적막에 잠긴 목소리에 답할 찰나를 허락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막 그녀에게 전하고픈 말이 떠오른 참이다. 단테는 뒤늦게 커다란 손을 떼고 감긴 눈꺼풀을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뜨린 속눈썹이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 비좁은 틈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암막 같은 그늘 위로 다시금 쯧, 혀 차는 소리가 내려앉는다. 그리고는 갈 곳을 잃은 문장 하나가 뒤를 이어 쏟아져 내렸다. 괜한 걱정을 하는군그래. 제 눈치를 볼 필요 따위는 없다고 전하는 짧은 문장이 찬 공기를 녹일 온기처럼 공기를 떠돈다. 히마와리에게 단테가 그랬듯, 홀로 방황하지 않도록 대꾸하는 그 무엇도 없이.

 

 

 “나는 너로 인해 눈이 부신 것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

 

 

 너야말로, 내가 맞닥트린 그 무엇보다 해사하니 말이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침대 시트를 짚은 손끝에 닿았다. 단테는 자신의 음색이 제 손끝처럼 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지하에 가두었던 그 남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양지가 어울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는 존재라고. 음색을 볼 수 있는 히마와리는 그 말에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으리라. 그런 제 곁을 맴돌면 그만큼 쉬이 검은 물이 들어버릴 테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연인이 제게 물들기를 바란 적이 없었다. 히마와리는, 단테가 자신의 시에 해사한 절망이라는 모순을 기어코 써 내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피사체였으므로.

 그는 히마와리로 하여금 절망에 해사하다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심지어 그 이상의 표현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 모순이 지독히도 사랑스럽다는 사실마저도 알게 되었다. 사랑스러움을 감히 절망에 빗대어, 또 다른 모순을 낳을 만큼. 무엇이든 낯선 것은 처음뿐이다. 그건 단테가 히마와리에게 느끼는 모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아이러니를 오롯이 받아들인 그는 이제, 눈부신 것을 만연하게 목도하고도 검게 물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단테 본인과 가장 가깝고도 해사한 것이, 마세 히마와리가, 황홀경의 사랑스러움을 통감케 하지 않았던가.

 

 아마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간다고 한들 그 수많은 빛이 단테의 눈에 찰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거머쥘 수 있는 가장 해사한 것을 강하게 붙들어 두 눈에 아로새긴 지 오래였으므로. 허나 그의 연인이 바란다고 한다면, 화려하게 아롱거릴 조형물 사이를 거닐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단테는 그저 고요한 낯으로 작게 뒤척이기 시작한 연인의 뺨을 감싸 안을 뿐이다. 가지런하게 배어나는 숨이 심유한 눈동자에 들어차도록. 마치 위아래를 흔들고 내려놓은 스노우볼처럼, 기껍게도 새하얗게 바랜 온기의 파편이 시야를 메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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