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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곳.png

*현대 AU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오리지널 캐릭터에 대한 언급이 존재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코라도 부비고 돌아간 것인지 유리창 겉면은 온통 부연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윤은 통유리 위의 희뿌연 얼룩들 너머 눈이 따가울 정도로 뒤엉킨 붉은색과 녹색의 매대 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에 최소 40시간은 앉아있어야 하는 직장인의 연약한 허리는 조금만 구부러져도 애꿎은 무릎 뒤쪽까지 당기게 만들었으나 한 번 시선이 잡히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한참을 멈춰 서 있던 그를 향해 매대 구석에서 파수꾼이라도 되는 마냥 앉아있던 곰인형이 검은 단추로 된 눈을 무료하게 반짝였다.

 

 굳이 눈 앞의 물건을 살 필요까지는 없다. 윤은 자가용의 앞좌석에 두고 곱게 안전벨트까지 채워 둔 상자를 떠올렸다. 필요한 것들은 이미 스콧이 그 상자 안에 잔뜩 담아 들려주었으므로, 그가 한참을 지켜보고 있는 “저것”은 굳이 따지자면 쓸모없는 지출이 될 것이었다. 고작해야 작은 상품을 하나 더 산다고 크게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지만. 윤은 다시금 고민 속으로 빠져들며 립밤을 발라 차갑게 식은 입술 위로 가볍게 이를 내렸다.

 

 입술을 무느라 드러난 앞니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직전에, 상점의 문이 소란스러운 방울 소리와 함께 열리며 쇼핑이 끝난 사람들을 쏟아냈다. 연말 대목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느라 조금 지친 것 같은 점원들의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인사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직도 전설로 남은 재즈 보컬리스트가 부른 캐럴의 한 소절이 그 뒤를 따라 서늘하고 축축한 겨울 공기 속으로 우르르 뛰쳐나왔다. 아름답게 장식하세, 랄랄라라 랄라랄라라Deck the halls with boughs of holly, Fa la la la la la la la!

 

 계시처럼 들려온 캐럴에 윤은 입술 위에 다시금 가볍게 이를 내렸다. 한참을 쏟아지던 그의 시선을 오래도록 버티던 매대 위의 “그것”과 모서리의 곰인형이 드디어 결정을 내렸느냐고 묻는 듯 했다. 위아래 매대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던 꼬마 전구가 의지라도 북돋아주고 싶은지 명랑하게 반짝거렸다. 뻑뻑한 움직임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던 문의 틈새에서 캐럴의 마지막 가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새해맞아 노래하자 랄랄라라 랄라랄라라heedless of the wind and weather, Fa la la la la la la la!

 

 그리고 그 마지막 멜로디가 축축하게 식어버린 보도블럭들의 틈새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그 순간에, 윤은 허리를 펴고 상점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다지 큰 일을 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는데 욕실에서 나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윤은 제법 묵직하게 가라앉던 박스를 들고 오느라 뻐근해진 어깨 위를 남은 한 손으로 부드럽게 누르며 팔꿈치를 휘저었다. 연말의 휴가를 제대로 보내기 위해 수없이 헤쳐나와야 했던 추가근무의 여파가 이제야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미리 사서 고생해 둔 덕에 다음 주부터는 제법 느긋하게 쉴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뭘 해야 하더라. 윤은 뻑뻑하게 마른 눈을 깜박이며 크리스마스 때까지 해야할 집안일들을 떠올렸다. 출퇴근 때 입고 다니던 코트를 세탁소에 맡겨야 되고, 친구들과 가족들의 선물이 다 준비되었는지 한 번 확인해야 하고, 그리고 이때껏 한참을 미뤄둔 크리스마스 트리를....

 

 존재하지 않는 허공 위의 텍스트들을 바지런히 읽어내리던 윤이 거실로 들어서려던 발걸음을 움칫 멈췄다. 치수를 하나 크게 산 탓에 걸을 때마다 씩씩대며 바닥에 끌려대던 슬리퍼의 밑바닥이 마룻바닥에 들러붙었다.

 

 거실과 현관을 잇는 복도를 마주한 채 주저앉아있던 대릴이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알아차렸는지 턱 끝을 들어올렸다. 움푹하게 들어간 눈구멍 바로 아래 도드라지게 올라온 광대뼈가 윤을 향해 실룩였다. 고작해야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는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마주보게 된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윤은 입술을 달싹여 소리없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어요? 질문을 받고서도 한참을 꺼림칙하다는 얼굴을 하던 대릴이 무릎 앞에 놓아둔 상자를 가리켰다. 스콧에게서 받아 윤이 집까지 들고 온 크리스마스 오너먼트들이 들어있는 종이 상자였다. 윤은 대릴의 손 끝을 따라 상자 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안에 눈 결정모양 장식이 든 플라스틱 볼과 당장이라도 나무에 걸어놓으면 새들이 겨울을 나러 날아들 것 같은 작은 나무 새집 같은 것들이 그 안에 가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따지자면 제법 많은 양이었고 크리스마스 시즌 한 철만 사용하는 장식물치고는 지나치게 섬세하고 예쁜 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상자 안에서 눈에 띄는 것은 고작해야 그 뿐이었다. 물기가 덜 말라 여전히 축축한 채로 우유와 꿀의 향기를 풍기는 손을 카디건 위에 습관처럼 문지르며 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릴과 다시 마주한 눈동자가 멀거니 물음을 던졌다. 그래서 이게 뭐 어쨌는데요?

 

 “....그 양반이 이런 걸 사 모았다고?”

 

 자신이 그런 물음을 던졌다는 것조차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발치에 뚝 떨어진 그 질문에 삼킬 새도 없이 폭소가 입술 바깥으로 쏟아져내렸다. 대릴이 그를 향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려보였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지않냐고 주장하는 얼굴에 윤은 목 안을 간질이는 웃음을 다시 밀어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뭐, 대릴 입장에서는 틀린 말이 아니기야 할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에 홀로 굴러들어온 윤을 친아버지처럼 돌보아주던 스콧 밀러는 그를 볼 때면 북풍설한의 화신처럼 거칠어보일 정도로 쌀쌀맞게 굴었으니까. 첫인상이 너무 나쁜 나머지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뿐이지만. 아무튼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간 낭만적이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전직 일등상사 겸 현직 카페 주인에게 수를 셀 수 없는 새로운 오해들이 쏟아질 판이었으므로, 윤은 대릴의 곁에 무릎을 세워 앉으며 대답했다.

 

 “원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인걸요. 그리고 스콧이 장식을 나눠준 덕분에 한시름 덜었잖아요.”

 

 안 그랬으면 정말로 몽땅 사야할 판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콧등을 가볍게 찡긋거리자 대릴은 눈썹머리를 엉망으로 비틀며 눈동자를 굴렸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때 그가 흔히 지어보이는 표정이었다. 윤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개어놓고 대릴을 향해 짓궂게 고개를 기울였다. 연말이면 바빠지는 직종에 종사하느라 제대로 다듬을 짬을 내지 못해 길어진 머리카락이 무릎을 감싸고 길게 흘러내렸다.

 

 지금의 아파트에서 대릴과 함께 살게 된 지는 이번 크리스마스까지 꽉 채워 2년 정도였지만, 사실 윤이 이 아파트에서 거주한 지는 근 5년이 다 되어갔다. 유학생 신분으로 처음 조지아 주에 발을 딛었을 때부터 알고 지내다 같은 회사로 취직까지 함께한 하우스메이트 한나와 함께 보낸 3년 동안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던 것은 한나가 동거 첫 해에 어딘가에서 사 들고 온 금색의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세트였다.

 

 사회 초년생들의 엉성한 손재주로도 제법 화려한 트리를 만들 수 있게 해주었던 그 금색의 오너먼트 세트는 한나가 플로리다로 전근을 가고 대릴과 윤이 동거를 시작한 후까지도 꾸준하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 정확하게는, 장식했었다. 바로 작년의 겨울까지는. 윤은 여전히 멋쩍음과 민망함의 중간 즈음의 감정으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대릴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새어나오려는 웃음소리를 삼켰다.

 

 바로 올해, 그러니까 고작해야 일주일 전에, 5년을 버텼던 오너먼트 세트 중 대부분의 명운이 다해버렸던 것이다. 트리의 맨 윗부분을 장식하던 금색 별은 상자를 꺼내는 순간 갑작스레 떨어져 무려 세 동강이 나 버렸고, 크림색 망사와 금색 천이 겹쳐진 포인세티아 장식은 꽃받침 부분의 접착제가 완전히 힘을 잃어 꽃잎 대신 넓적하고 볼품없는 천조각으로 전락했다. 둥근 공 형태의 장식품들은 몇 년간 창고 안에서 비슷한 모양의 장식품들과 부대낀 탓인지 도색이 벗겨진 것들이 잔뜩 나왔고, 부슬부슬한 금색 장식 띠는 털이 온통 빠져 허름하게 너덜거렸다.

 

 심지어 그나마 멀쩡하던 장식물 중 몇 개는 대릴의 발뒤꿈치 아래에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찌그러지기까지 했다. 슬리퍼의 바닥에서 와작 소리를 내며 내려앉은 장식품을 깨달았을 때 대릴의 소리 없는 당황이 얼마나 빠르게 그의 얼굴을 뒤덮었는지 윤은 아직도 기억했다. 아마 저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리라. 크리스마스 트리 상자를 꺼낸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저 모든 사달이 눈 앞으로 들이닥쳤었으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릭이나 허셜 영감님네 집에서 장식하는 걸로 퉁치자니까.”

 “하지만 크리스마스잖아요. 때 맞춰서 스콧이 연락해주기도 했고.”

 

 물론 스콧의 연락이 없었다 하더라도 크리스마스 트리는 꾸미자고 했을 테지만. 윤은 그런 말들을 능숙하게 혀 아래로 숨겼다. 어찌되었든 크리스마스이지 않은가. 2000년 전 태어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한 해의 마지막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때에 한 해 동안 쉼없이 밀려왔던 삶의 격랑을 무사히 헤치고 건너왔음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축하할 수 있는 날. 윤은 그런 날에 이 곳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욕실과 거실과 두 개의 방이 전부인 이 낡은 아파트는 그들이 함께 한 해를 건너올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장소였으므로.

 

 입 안으로 차오른 말들을 천천히 녹여 삼키면 색과 채도가 모두 다른 두 쌍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대릴은 네가 숨긴 말들이 뭔지 알고 있다는 듯 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가, 장난스러운 코웃음 소리와 함께 오너먼트들이 가득 찬 상자 안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윤은 그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옅게 보풀이 일어난 스웨터로 감싼 어깨에 기우뚱 몸을 기댔다. 기대어오는 뺨의 높이에 맞춰 대릴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기울여주었다.

 

 전원을 끈 지 얼마 되지 않은 오일 라디에이터에서 몇 번 짤막하게 덜덜거리는 소리가 났다. 늦은 오후의 햇빛을 듬뿍 머금어 미지근하게 흐르는 공기와 뺨 위에 고이는 체온이 불러온 나른함을 쫓아내기 위해 윤은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이대로 잠들었다간 햇빛이 온통 저물고 백열등을 켜야 할 때나 되어야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을 완전히 까먹게 될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지만. 무거운 눈꺼풀이 서로 들러붙지 못하도록 애를 쓰며 윤이 미간을 가볍게 찡그렸다.

 

 “졸리면 들어가서 자. 거실은 웃풍이 심해서 난방 올려도 춥다며.”

 “자려는 거 아니에요....”

 “그래? 눈 감긴 걸 보면 단잠도 이런 단잠이 없는데.”

 

 짓궂은 농담이 머리 위로 툭툭 떨어져내렸다. 윤은 가늘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고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눈 앞이 고장난 브라운관 화면처럼 늘어지고 뭉개졌다가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 멈췄다. 부드럽게 늘어진 천과 천 사이로 손가락을 허우적대자 옷을 갈아입으면서 넣어두었던 자그마하고 딱딱한 물체가 잡혔다. 그것을 손바닥 안 쪽으로 단단하게 붙잡으며 윤은 대학 시절 과에서 제법 빛이 났던 연기력을 발휘해 아직도 노곤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으로 대릴을 쳐다보았다. 스콧한테서 들었는데요. 대릴이 눈썹을 애매하게 비틀었다.

 

 “집집마다 특이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하나 둘 쯤은 있다고 하더라구요.”

 “특이한 장식?”

 “스콧이 가지고 있는 커피 잔 모양 오너먼트 같은 거요.”

 

 바닥에 깐 복슬복슬한 러그 위에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간 머그 잔 모양이 그려졌다. 카페를 시작한 해에 스콧이 직접 만든 거래요, 하고 말을 덧붙인 윤은 흘긋 대릴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저를 볼 때마다 떨떠름한 얼굴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장년의 남자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연관짓는 것이 또 다시 낯설어진 듯 대릴의 낯빛이 흐려졌다가 가라앉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뒤죽박죽이 되어가는 연인의 표정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노곤함으로 인해 눈치채지 못한 척 하며 윤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특이한 게 없잖아요. 한나 언니가 그냥 쓰라고 주고 간 그게 워낙 양이 많았어서....”

 

 졸린 것처럼 목소리를 삼킬수록 주머니 속의 물체가 손가락 사이에 엉겨붙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윤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입을 다문 대릴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피려 눈동자를 슬그머니 들어올렸다가...... 가끔 밤을 샜으면서도 잠을 잔 것처럼 굴었을 때면 저를 향해 으레 지어보이던 표정을 하고 있는 대릴과 제대로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푸른 눈동자를 반 쯤 덮어둔 눈꺼풀이 짧게 꿈틀댔다. 꼬마야. 연애를 막 시작할 때쯤 쓰던 호칭이 오랜만에 대릴의 목소리를 타고 넘어왔다.

 

 “그래서 또 뭘 가지고 온 건데?”

 “....뭘 가지고 왔느냐니, 난 그냥 스콧이랑 했던 말이 생각이 나서―”

 “6년이 다 되도록 보고 살았는데 내가 네 얼굴 표정 하나 구분 못할 것 같냐.”

 

 정곡을 찌르는 말이 뺨을 아프게 찔렀다. 윤은 아주 잠깐동안 꼭 그걸 위해서 운을 뗀 것은 아니라든가, 아니면 사실 그 얘기를 하다가 생각난 것 뿐이라든가 하는 변명을 늘어놓을까 하다가 결국 손을 들어올렸다. 대릴의 말처럼 그들은 거의 6년을 함께했고, 그가 대릴의 얼굴을 스치는 짧은 표정들만으로도 앞서 일어났을 대강의 사건을 간파해낼 수 있게 된 것처럼 대릴 역시도 그럴 것이었다. 오래된 커플이 서로를 놀라게 하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은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일을 이렇게 시작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윤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순순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을 빼냈다. 그의 손등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움직이던 푸른 눈동자와 좁혀진 미간이 천천히 누긋해졌다. 축축한 길거리에서부터 미지근한 실내에 이르기까지 윤과 함께했던 “그것”이 드디어 펴진 손바닥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뾰죽한 두 귀와 몸체 바깥으로 비죽비죽 삐친 털 끝 조각 위에 하얗게 맺힌 햇살이 반짝였다.

 

 제 입천장을 혀 끝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윤은 눈을 깜박였다. 왜 이렇게 작고 가벼운 것을 가지고 오래도록 시간을 끌었는지 저 사람은 알아차렸을까. 그런 은근한 기대가 혀 아래로 맑게 고였다. 한참동안 그것을 내려다보던 대릴이 턱 끝을 가볍게 당겨 윤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펴졌던 미간이 다시 가운데로 우그러든 표정이었다. 윤은 짧게 숨을 들이키며 어깨를 당겨올렸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쓰기엔 좀 이상한 개 모양인데.”

 “―당신이랑 닮아서 산 건데요?!”

 

 그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윤은 기대와 전혀 다른 대답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하다니,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잡아챌 정도로 귀여운 강아지 모양 장식을 두고 이상한 개 모양이라니!

 

 물론, 윤은 스스로의 미적 감각에 대해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리를 걷다 우연히 상점의 전면 유리창에 비친, 다른 강아지 모양 장식들보다 조금 더 눈이 처져서인지 한없이 지쳐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작은 셰퍼드 모양 장식품을 발견했을 때부터 윤은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을 위한 불굴의 투사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작고, 딱딱하고, 하지만 보면 볼수록 묘하게 대릴을 닮은 그 장식품은 윤의 눈에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받아온 장식이 이미 한 상자 가득인데 굳이 다른 것을 더 살 필요가 없다며 지나쳤을 가게의 매대를 몇 분이고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하는 인간에게는 처음 사랑을 시작했던 그 시절의 바보같은 구석이 언제까지고 남아있는 법이다. 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해서 윤은 “대릴 딕슨을 닮아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붙잡은 귀여운 강아지 모양 크리스마스 장식물”을 소중하게 쥐고서 눈 앞의 진짜 대릴 딕슨을 부루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대릴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게 어딜봐서 나랑 닮았어? 내가 그 정도로 막 생겼냐?”

 “똑같잖아요. 이 처진 눈꼬리라든가, 홀쭉한 얼굴이라든가, 플라스틱인데도 길고 복슬거리는 것 같은 털이라든가.”

 “털 빼고는 다 모르겠는데.”

 

 혼신의 힘을 다한 세심하고 명쾌하기 그지없는 설명에도 대릴의 얼굴에는 한 줄기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윤은 제가 깨뜨릴 수 없는 벽으로 변한 연인의 얼굴을 향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글렌이 볼 때마다 어떻게 표정까지도 닮아가느냐고 혀를 내둘렀던 표정이 그의 얼굴 위를 점령했다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어깨가 가라앉는 움직임을 따라 손 안에 쥔 작은 셰퍼드가 슬그머니 달싹였다.

 

 뻣뻣하게 뻗친 끄트머리를 손 끝으로 매만지며 윤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그래, 어떻게 사람이 똑같은 물건을 보고 똑같은 생각만 하고 살 수 있겠는가. 그가 보기에는 대릴과 너무 닮아 발길을 떼지 못할 지경이었던 작은 플라스틱 셰퍼드가 대릴의 눈에는 전혀 아닐 수도 있는 법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왈칵왈칵 치미는 본능적인 반론들을 이성적으로 달래려 애썼다.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데, 이렇게 닮았는데! 아냐, 그럴 수 있어, 사람은 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상반된 생각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여대느라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웠다. 이대로 있다간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싸움에 휩쓸려가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아 윤은 우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거라고 해도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사 온 것이 아닌가. 한숨과 침묵 속에서 몸을 일으킨 그를 보고 무언가 오해한 것인지 까끌하게 메마른 손이 손 끝을 얽으며 맞잡아왔다. 윤, 하고 이름을 부르는 표정이 어느새 잔뜩 누긋해져 있었다. 색과 채도가 다른 두 눈동자가 천천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짧은 침묵 속에서 먼저 웃어버린 것은 윤이었다.

 

 “기분 안 상했어요.”

 “한숨 쉬었잖아, 아까.”

 

 짧은 답과 함께 푸른빛의 시선이 손 끝에서부터 허공을 따라 눈동자까지 닿았다. 그 눈동자가 전하는 온기가 그저 상황을 무마해 넘어가려는 의도가 아닌 것을 알아 윤은 대릴을 향해 아주 얕게나마 깔려있던 섭섭함까지 모조리 털어내버렸다. 저 눈을 마주 보는데 어떻게 그런 감정들을 안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술하게 얽힌 손 끝에 힘을 주자 마디와 마디가 엉긴 틈새에서 체온이 전해져왔다. 어떤 순간에도 제 마음을 가장 먼저 걱정하는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데. 윤은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기분 상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일어난 건 그냥, 어쨌든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려고 산 장식이잖아요.”

 

 그래서. 끝자락이 부드럽게 잘린 문장과 단어들이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대릴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썹 끝을 몇 번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보여 윤은 그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대릴의 눈에는 정말 마음에 차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눈 앞의 이 서툴고 다정한 남자는 어지간한 일에는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고 윤의 뜻대로 따라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눈 앞에서 펄쩍 뛰어오를 것처럼 구는 윤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그냥 말해줘도 괜찮은데. 얽힌 손 끝에 걸리는 손가락 마디를 매만지며 윤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윤이 그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귀엽게 생각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대릴과 그 장식의 강아지가 닮아있다고 여겨서였으니까. 당신과 닮아있었기 때문에 발길이 붙잡혔고, 엉성하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모형을 향해 그만큼 애정어린 시선을 줄 수 있었다. 윤이 말할 수 있는 그 모든 이유의 중심에 대릴 딕슨이 있었다.

 

 그러니 당신이 싫어한다면 그런 장식품쯤은 얼마든지 당신의 눈이 닿지 않게 숨겨버릴 수도 있어요, 내가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당신이니까... 입천장을 간질이는 그 모든 말들을 참을성 있게 녹이며 윤은 대릴의 말을 기다렸다.

 

 한숨같은, 그러나 한숨과는 다른 긴 숨소리가 대릴의 입술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체념이나 짜증보다는 머쓱함과 민망함 같은 감정들이 담긴 숨소리였다. 민망해? 윤은 문득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머쓱하다니, 대체 무엇이? 고작해야 작은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 가지고 서로 소란을 피웠던 게?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민망한 것은 윤이 되어야 했다. 온갖 사소한 이유들을 대며 그 장식이 대릴을 닮았다고 펄쩍 뛰며 우겨대던 것은 윤이 아니었던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의 흐름에 멀뚱하게 서 있던 윤의 손을 대릴이 가볍게 끌었다. 러그 위에 허벅지를 붙이고 앉아있던 몸이 그새 길쭉하게 일어서 있었다. 엉키는 생각의 흐름을 다잡지 못한 몸이 어,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당겨지는 쪽을 향해 움직였다.

 

 “....? 트리 뒤 쪽은 왜요?”

 

 아직 트리를 벽에 붙여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마주보고 있던 방향의 반대쪽에도 사람 하나 둘 쯤 설 공간이 남아있었다. 윤은 플라스틱 이파리들로 빽빽하게 몸을 부풀린 가지들을 마주보며 등 뒤에 비스듬하게 선 대릴을 향해 턱 끝을 들어올렸다.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애매하게 비죽인 대릴이 윤의 어깨 너머로 팔을 뻗었다. 딱딱한 손 끝이 빳빳한 녹색 이파리들을 헤치고 가지들이 이리저리 엉킨 안쪽으로 들어서 무언가를 쥔 채로 빠져나왔다. 펼쳐진 손바닥 위를 향해 시선이 자연스레 굴러갔다. 그리고, 그 위에. 유선형의 몸체 위에 동그란 머리가 하나 붙은 것 같은 무언가가... 들어올려진 턱 끝을 따라 벌어진 입 안에서 짧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새?”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새를 모델로 한 것처럼, 장식의 새는 다갈색의 깃 사이사이에 검은색과 회색이 섞인 평범한 색을 하고 있었다. 둥그렇게 뜬 눈동자의 주변을 속눈썹처럼 둘러싼 흰 줄무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작고 가녀린 것들이 으레 그러하듯 사랑스럽고 귀여운 감이 있는 조각이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 장식으로는 너무 평범하지 않나? 새의 척추 부분 쯤에 고리 모양으로 매달린 줄을 보며 윤은 눈을 깜박였다. 트리의 가지에 걸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고리나 끄들려나온 장소를 생각하면 크리스마스 장식이 맞는 것 같은데. 하지만 너무 평범한 색감과 모양이 아닌가. 방금 전처럼 가지 안쪽까지 밀어넣어두었다간 겨우내 그런 장식이 있는지도 모를 것 같았다.

 

 스콧이 준 장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처음 가지고 있던 장식 세트에도 이런 모양은 없다. 윤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전 하우스메이트가 장난을 치기 위해서 사 두었다가 본인도 잊어버렸던 것을 대릴이 발견한 게 아니라면 이것은 대릴이 사 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놓은 걸 굳이 이렇게 숨겨둘 필요가 있나? 의문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길게 몸을 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아 윤은 턱 끝을 어깨 너머로 틀었다. 새벽의 별빛과 같은 연푸른 눈동자가 눈가 끝을 간질였다. 아저씨, 이거요. 손 끝으로 작은 새를 톡톡 두드리자 대릴이 그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입을 벌렸다.

 

 “크리스마스 장식 치고는 너무 평범하지 않아요?”

 “이거 너랑 좀 닮은 것 같지 않냐?”

 

 동시에 떨어진 말들이 발 끝에서 우르르 뒤섞였다. 문장을 끝맺은 혀 끝이 그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로 몇 분 전에 이런 상황을 겪은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이 두 사람 사이의 공간으로 밀려들었다. 초침 소리가 똑딱, 똑딱, 똑딱, 거실의 공기를 두드렸다. 다시 한 번 초침 소리가 울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이게요? 나랑요?!”

 “닮았잖아. 일단 작고.”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머리카락 색이랑도 비슷하고.”

 “이건 밝은 갈색이고 나는 빛만 안 받으면 거의 검은색이잖아요....”

 

 흐려지는 말 끝에도 대릴의 주장은 변함없이 꿋꿋했다. 윤이 그 뒤를 이어 온갖 다른 이유들을 가지고 왔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내밀었던 이 새는 아무리 봐도 근육질이라 나보다 더 건강해보이지 않느냐는 유치한 반론에는, 그걸 알면 제발 밥 좀 챙겨먹으라는 잔소리가 돌아오기까지 했다. 이래서 다른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봐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걸까. 윤은 조금 전까지의 대릴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조금쯤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체험하는 역지사지의 현장이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몸을 기울이자 뒤통수에 너른 어깨가 자연스럽게 닿아왔다. 목덜미의 얇은 살갗으로 스웨터까지 옮겨온 체온이 닿았다. 윤은 결국 대릴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다음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사 놓고서 왜 보이지도 않는 곳에다 먼저 걸어놨어요? 아직도 대릴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새를 제 손으로 옮겨오며 중얼거린 말에 대릴이 그의 정수리 위로 턱을 얹었다. 애초에 안 보여줄 거였어. 목울대의 움직임을 따라 윤의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졌다.

 

 “네가 그 이상한 개만 안 들고 왔으면 십 년이 지나도 말 안 했을걸.”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랑 진짜 닮았단 말이에요, 그 강아지.”

 “털 말고는 모르겠다고 했잖아.”

 

 이건 그냥 봐도 나랑 전혀 안 닮았잖아요. 윤은 반 쯤 속삭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 안으로 옮겨쥔 플라스틱 새의 부리를 손 끝으로 문질렀다. 여전히 어디가 자신과 닮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제가 데려온 강아지 장식과 나란히 놓자 조금은 비슷해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생김새보다는 분위기를 닮은 것 같았지만. 마른 얼굴에 덥수룩한 털을 가진 셰퍼드와 다갈색 깃을 가진 걀쭉한 몸체의 작은 새가 손 안에서 윤을 향해 나란히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가가 은근히 간지러워져 윤은 볼 안쪽의 미끈한 살점을 우물우물 물었다.

 

 그러니까 이 엉성하고 엉뚱한 두 장식품이 그들의 첫 “특별한 크리스마스 장식”인 것이다.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것도, 선물받은 것도 아닌, 오롯하게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담긴 특별한 장식. 상대를 닮아서 도저히 발을 뗄 수 없었고 그래서 난데없이 애정을 품을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그의 손바닥 안에 담겨 있었다. 사랑이 만들어낸 작고 바보같은 소동이.

 

 아마 다음의 크리스마스에도 그들은 수많은 장식들 속에서 이 장식을 꺼내며 투닥거리게 될 것이다. 여전히 상대방이 자신이 사온 장식을 닮았다고 말하고, 서로 가볍게 입씨름을 벌이다가, 결국 웃어버리고 말겠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마다, 그리고 어쩌면 함께하지 못하는 크리스마스에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아주 작은 것들 안에도 차곡차곡 쌓이고, 그렇게 쌓여서 만들어진 추억들은 남겨진 사람마저도 다시금 웃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윤은 알고 있었으니까.

 

 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나눠받으러 갔을 때 스콧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행복한 시간과 추억은 오히려 그런 사소하고 엉성한 특별함 속에 깃든다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깃든 찬란한 감정들이 인간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해를 기대할 수 있게 해주고, 기꺼이 다가올 시간 속으로 뛰어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손 안에 닿는 딱딱한 감촉들 위로 체온이 덧씌워졌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잔뜩 부풀어올라 그는 결국 기대어 있던 가슴팍에서 등을 떼고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거, 별 바로 아래에 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걸 진짜 달게?”

 

 푸른 눈동자가 담긴 한 쪽 눈가가 우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웃음이 차올라 말을 잇기가 유독 어려웠다. 부스러지는 웃음소리를 입가에 잔뜩 묻힌 채로 그는 선언하듯 대답했다.

 

 “당연하죠, 크리스마스 장식이니까요.”

 

 게다가 나 몰래 벌써 달아뒀었으면서. 버석거리는 이파리 사이를 뚫고 가지 깊숙한 곳에 매달려 있었던 것 때문인지 묘하게 표면이 꺼끌거리는 새를 흔들어보이자 할 말이 없어졌는지 대릴이 흐려진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 대신 몇 번 움칠거렸던 손이 팔짱을 끼는 것으로 반 쯤 항복하겠다는 표현을 대신할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지만 몰래 숨겨서라도 장식을 걸어둔 것을 보면 그도 자기가 가져온 장식을 치워 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소리를 높여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윤이 트리의 반대편을 향해 가볍게 몸을 돌렸다. 사각거리며 앞서나가는 발소리에 붙잡힌 대릴이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 나섰다.

 

 별과 가장 가까워 작은 장식이라도 제법 눈에 띌 장소를 찾던 윤이 나직하게 캐롤을 흥얼거렸다. 아름답게 장식하세, 랄랄라라 랄라랄라라Deck the halls with boughs of holly, Fa la la la la la la la.... 아주 신이 나셨구만. 별부터 장식하자는 윤의 고집에 한 쪽 손을 바닥에 대고 장식품들이 가득 찬 상자 안에서 트리의 가장 윗부분을 장식할 황금별을 찾고있던 대릴이 숨을 뱉어내듯 짤막하게 웃었다. 장난스러움과 웃음소리가 안개처럼 깔린 얼굴을 향해 윤이 턱 끝을 기울이며 웃어보였다.

 

 올해의 트리에는 별이 가장 먼저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서로 전혀 닮지 않았다고 우기는 작은 새와 뾰죽한 귀의 강아지를 달아두어야지. 언제고 다정한 이가 선물해준 것들과 떠나간 이가 남겨둔 것들을 잔뜩 매달고, 빈 목덜미에 머플러를 둘러주듯 장식띠와 꼬마전구를 둘러두자. 이미 다정한 시간들을 한가득 머금은 것들 속에서 새로이 추억을 담고 그들과 함께할 작은 것들의 입성을 축하하듯이.

 

 별이 작은 전나무 위에 왕관처럼 내려앉고, 다음의 해로 기꺼이 발을 딛게 해줄 추억과 이야기들이 그 주변에 늘어 설 시간이 왔다. 지쳐보이지만 기묘한 온화함을 품은 표정의 작은 셰퍼드와 순하고 둥근 눈 주위를 하얗게 장식한 작은 새가 올해의 이야기를 담은 채 트리 위에 제 자리를 찾아 안겨들었다. 오래된 연인이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렸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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