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파티?"
"그래, 강타 쪽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백두산이 제 가슴께를 두드리며 자랑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그 앞에는 나일과 태사자, 다무레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백두산의 말에 반응한 건 나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큰 대회를 끝내고, 각자 휴식시간을 갖는 지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자는 의견이 강강갤럭시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강타 성격에 당연히 본인 입으로 친구라 하는 사람들을 전부 불러낸 모양이고. 여기까지 예상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타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상할 수 있는 방향이었으니 언젠가 그들이 자신들을 불러낼 거라고 나일은 예상했었다. 우리가 초대에 어떻게 반응하든 말이다. 나일의 고개를 태사자를 향했다. 파티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상황에 그가 알겠다며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나일도 크리스마스 파티 자체에는 달갑지 않았다. 그들과 어울릴 시간에 베이 연습을 하는 게 더 맞는 일 아닌가? 그리고 마치 제 생각을 뻔히 알고 있다는 듯이 태사자 입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그런 걸 할 바에 베이 연습이나 더 하겠다, 라고. 와일드 팡에서 리더나 다름없는 그가 거절의 답을 내놓았다면 다른 이들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답을 수긍했다. 백두산은 실망한 기색이 커보였으나 결국 태사자를 가장 많이 따르는 건 바로 백두산이었으니 어쩔 방도가 없을 일이었다. 나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냥 반대의 의견은 아니었다. 강강 갤럭시에서 연락이 왔다면, 어쩌면 그 아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일에게 있어서는 간절하다 말하기 어색해도, 그 기회를 놓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
"제 생각에는… 기어를 바꿔보는 게 어때요?"
"뭐?"
"아, 갑자기 죄송해요. 고민하는 모습이 보여서…"
나일은 바닥에 늘어놓은 제 베이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회를 위해 어떻게 해야 자신의 베이가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금껏 싸워준 베이에 대해 부족함은 느끼지 못하였으나 어쩌면 그 부족함마저 모르는 게 자신의 부족함일지도 몰랐다. 세상은 넓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대로 가다가는 세계 대회에 발끝도 못 미칠 뻔한 걸 겨우 팀을 꾸려 당당히 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해온 베이는 부족하다. 만족스러워도, 부족한 일이다. 이 말이 스스로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찰나에 고민을 순간적으로 잊게 해준 목소리가 있었다. 어깨에 닿는 흑발, 뒷쪽으로 땋았는지 저를 향해 내린 옆모습이 땋은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귀에는 작은 꽃 두개를 달고, 아까처럼 밝은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어왔다. 들리는 단어만으로는 아마, 제 베이가 어떤 베이인지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낯선 이의 등장에 나일은 고민없이 거절의 답을 내놓았겠으나 잠깐 사이에도 느껴지는 호의적인 목소리가 차마 냉정한 답을 내놓지 못하게 하였다. 이 근방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나일은 제 옆에 서있는 이의 머리카락을 지나 얼굴도 마저 살펴보았다. 올라간 눈매, 끝이 내려간 눈썹, 진한 흑색의 눈. 제 기억이 맞다면 대회에서도 본 적 없는 얼굴이 자신의 베이를 살펴보고 있다. 적어도 선수는 아니라는 의미겠고. 그렇다면 베이조정사인가? 이 주변에 사는 조정사라면 자신이 모를리가 없다. 그리 넓지 않은 땅이었으니. 이어지는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어떤 팀에 속한 베이조정사. 조정사들은 유독 다른 이들의 베이에도 호기심을 품고 다가오니까, 그녀도 그와 같은 부류인 게 분명했다. 자신을 파악하고 있단 걸 모르는지 나일 앞에 나타난 베이조정사는 아예 무릎을 접고 쭈그려 앉아 나일을 바라보았다. 밝게 웃는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찬 목소리와 어울려져 나일에게 다가왔다.
혹시 더 뛰어난 베이를 원한다면 제게 맡겨볼래요?
대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다른 팀의 베이조정사라면 자신의 베이에 어떤 짓을 할 지 예상할 수 없다. 짧은 사이에 본 모습은 꽤나 호의적이었으나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에 이곳은 열악한 환경이었다. 누군가를 속여야만 승리를 얻는다. 나일은 되도록 속임수 없이 베이 시합을 해왔으나 남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알아서 조심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도 거절이란 결론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제 대답에 크게 실망했는지 베이조정사의 어깨가 그대로 내려갔다. 아까 웃었을 때도 그렇고, 자신의 감정에 꽤 충실하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얼마나 베이에만 관심을 두는지 자신이 누군지도 밝히지 않고,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른 채 말을 거는거지? 나일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으나 꽤 퉁명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뭐든 보고 싶다면 누군지 인사부터 해야 하지 않나?"
"맞다! 저는 설이라고 해요."
“…나일이다.”
나일의 말에 자신을 설이라고 말한 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마친 모양인지 다시 베이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붙임성 없는 자신을 생각하자면, 설은 꽤 귀찮은 존재이긴 했다. 누군가 친한 척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자신도 아무 이유 없이 다가서지 않았으며, 다가오는 사람도 드물었다. 하지만 설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지 계속 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죠~. 도저히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듯한 결국 나일이 입을 여는 순간, 제 입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설, 거기서 뭐해?”
“견우님!”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이의 모습은, 허리를 넘는 회색 머리카락에 금안을 가진 이였다. 무뚝뚝한 목소리와 표정을 보아하니 나일은 그와 자신이 별 차이없는 성격을 가졌을 거라 무심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그 사이를 막아선 건 설이었다. 꽤 밝은 목소리, 아니, 아까도 분명 밝은 목소리였지만 들리는 분위기가 달랐다. 소중한 걸 부르는 목소리였다. 감히 부르기 아까워 작은 떨림이 느껴지는 걸 나일은 놓치지 않았다. 오랜 고민도 없이 두 사람에게 어떠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했다. 그래봤자 별 관심없지만. 설은 어느 새 나일을 잊은 듯 견우라 부른 사람 앞에서 또다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일은, 설이 그에 대해 소개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
“어서 오세요, 와일드 팡…?”
설은 자신이 들고 있던 폭죽을 터트리기 전에 고개부터 기울였다. 제 앞에 서있는 사람은 바로 나일, 한 사람 뿐이었다. 와일드 팡쪽에서 다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설이, 자신이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나일이란 정보는 세계 대회 관객석에서 앉아있던 날이었다. 저, 뵌 적 있어요! 하는 목소리에 강강 갤럭시는 무슨 사이냐 물었지만 길거리에서 만난 게 전부였단 말이었다. 베이를 보고, 부품도 추천해주긴 했으나 도움이 될 정보는 갖고 있지 않았었다. 갖고 있다 해서 줬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찌됐든, 뛰어난 베이 실력에 감탄하고 만난 일 없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후로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으나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에 와일드 팡을 부르자는 의견과 함께 금방 나일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니의 말로는 바로 거절할 거라는데, 의외로 승낙의 답이 돌아왔고, 그들 수만큼 자리도 준비했었지만… 결국 온 사람은 나일 하나였다.
“…친목을 위해 자리 참여를 권하긴 했는데.”
나일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면, 태사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름 이유를 만들어가며 설득했으나 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다모레는 사람 많은 곳은 피하고 싶다며 거절했고, 백두산은 혹시 갈까 싶었지만 태사자 형님이 가지 않는다면 자신도 갈 수 없다는 답이었다. 뭐, 지금쯤 오지 않아서 후회하고 있을 게 눈에 보였지만. 그럼 친목도모를 위해, 겸사겸사 강강 갤럭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기 위해 혼자라도 다녀오겠다며 나일이 나선 것이었다. 예상한 상황과 납득되는 나일의 말에 강강 갤럭시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나일에게도 설명한 이유가 아니라 다른 마음도 있었다.
“저희, 또 만나네요.”
펑! 어서 오세요, 와일드 팡! 설은 나일을 향해 웃어보이며 폭죽을 터트렸다. 혼자라도 와일드 팡은, 와일드 팡이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에 설은 나일의 옷을 잡아당기며 파티 속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미 임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일도 아무런 감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설이, 그때 만난 이가 강강 갤럭시 측과 가깝다는 건 나일 또한 세계 대회에서였다. 혹시라도 제 베이에 대한 정보를 줬을까, 고민했지만 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제 생각보다 상냥한 이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이 도달하자 다시 한 번 더, 설을 만나고 싶었다. 나일은 설을 보기 위해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만난 적은 결국 없어도, 설에게 연인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물론, 견우를 보는 설의 눈빛이 어딘가 다른 건 알았으나 확신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백할 것이냐 묻는다면 그럴 마음도 없었다. 아직 그토록 간절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딱 한 번, 보는 걸로 만족할 자신이 있었다. 설이 또다시 제 팔을 당겨 전까지는.
얼마나 정신없게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당연히 강강 갤럭시 뿐만 아니라 실력 있는 자들이 모였고, 그들은 각자 무리지어 어깨동무를 하며 떠들고 웃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속에는 견우의 곁에 머무는 설도 있었다. 이대로는 대화할 시간이 없겠다 싶었던 나일은 설이 견우에게서 떨어진 짧은 순간 손을 뻗어 설의 팔을 붙잡았다.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갑작스러운 말에도 설은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은 채 나일에게 웃어보였다. 나일이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잊을 수 없었던 그 웃음이었다. 적극적으로 나선 것치고 나일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도통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과의 교류에서 말이 서툰 게 아쉬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의미없이 세워둘 수도 없었다. 나일은 겨우 입을 열었다.
“설, 이라고 했던가.”
“네에, 나일님.”
“…우리 팀의 베이조정사가 될 마음 없어?”
*
나일이 들은 대답은 곤란한 표정과 함께 거절의 답이었다. 죄송해요, 나일님. 허리까지 반쯤 숙인 인사에 나일은 그래, 하며 짧게 답하였다. 너무 큰 욕심을 부린 거겠지. 애초에 갑자기 꺼낸 말에 긍정의 답을 기다린 것 자체가 멍청한 일이었다. 나일은 제 목을 둘러싼 두꺼운 목도리를 어설프게 둘러매었다. 이 추운 겨울, 12월 25일, 그렇게 두번째의 만남이 끝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