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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그냥 여기서 나가면 안 될까.

 

살려줘. 제발 나를 여기서 내보내줘. 둘 다, 제발 부탁이니까 나 같은 거 가지고 싸우지 말아줘.

 

어쩐지 삼각관계를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서, 렌아이는 아련한 눈빛으로 서로 살벌한 눈빛을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는 로아와 로민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젠장. 트립하기 전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일들을 전부 포함한다 해도, 아무래도 지금이 내 인생 최대의 위기 같아…….

 

“ 로민? 그러니까, 렌 쨩은 오늘 이 몸과 놀러가기로 약속했…”

 

“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로아. 오늘 렌은 나랑 할 일이 있다니까?”

 

…둘 다 거짓말쟁이다. 둘 다 거짓말쟁이다.

두 번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어.

 

우선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오늘 내가 로아와 한 약속같은 건 없었다. 또 다음으로, 오늘 내가 로민과 함께 해야 하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히 태클을 걸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없을 테니, 그냥 츳코미를 거는 건 얌전히 포기하도록 하는 게 이로울 것이다. 렌아이는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시련이 닥쳐왔는지에 대해.

 

…그래. 처음으로 되돌아가보자. 이 모든 일의 시작으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일의 정황이... 정말, 정말로 내 입으로 설명하기 좀 그런 일이지만… 우선, 로아로민 밴드의 임시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나와 로아로민의 멤버들은 여느때처럼 연습을 위해 연습실에 모였고, 멤버들을 도와 악기 세팅 등을 준비하던 도중 갑자기 로아가 오늘 놀러가기로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냐고 내게 물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첨언하자면, 내가 로아와의 약속을 깜박 잊어버린 건 아니다. 장담컨대 로아와 내가 한 약속따위는 없었다. 오늘은, 정말로.

내 생각에, 그냥 우리 둘은 단둘이 놀러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라는 걸 다른 멤버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젠장. 내가 아니라, 놀란 표정을 한 다른 멤버들에게 보란 듯이 씨익 웃었던 걸 생각하면 명백하다. 야, 이 자식아.

 

아무튼간에. 그런 로아의 폭탄선언(?)을 들은 로민이 사색이 되어서 렌은 자신과 선약이 있었다고 했고. 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가 로민과 잡은 약속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오늘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려고 했던 말이지.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간에, 지금 그게 원인이 되어서 둘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지금 여기. 살려줘. 진짜 살려줘.

 

“ 아니, 그, 저. 로민 언니, 로아 선배? 두 분 다 오늘 저랑 잡은 선약같은 건 없잖…”

 

“ 렌 쨩, 잠시만 기다려봐. 그러니까 로민? 할 일 같은건 잠깐 미뤄두지 그래? 이 몸이랑 렌 쨩은 오늘 데이트를 하기로 했거든? ”

 

“ 렌, 잠시만 기다려줄래? …로아. 이 일은 반드시 오늘 해야 하는 일이거든? 데, 데이...이게 아니라! 로아, 네 선약이야말로 좀 미뤄주지 그래?”

 

…아 젠장. 그래. 태클 걸어봤자 이렇게 가로막힐 게 뻔했는데 난 왜 태클을 걸려고 했던 걸까. 결과가 뻔히 보이는데도 난 왜… 아니. 둘 다 나랑 약속같은 거 안 했잖아, 이 거짓말쟁이들아. 거짓말쟁이가 둘. 온다 유우마. 으아악 오지 마 아스트랄…! 아니, 됐고. 아무튼. 둘 다 기싸움이 장난 아니야… 렌아이는 흐린 눈으로 둘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살려줘, 진짜...

 

 

“ 나 참, 로민, 그러니까 슬슬 물러나주지 않을래? 말싸움하고 싶진 않은데. ”

 

“ 그건 내가 할 말이거든? ”

 

한편 로민은 제 앞에서 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제 사촌을 쏘아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로 막는다. 아니, 막아야 한다. 렌이 로아랑 데이트하는 것 만큼은 말려야 한다. ...하아, 진짜... 내 실수였어. 애초에 로아가 렌하고 가까워지는 것 자체를 막았어야 했는데! 내 말실수 때문에! 로아가! 렌한테! 관심을! 가져서!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지금 이 사태가! 로민은 다시 한번 지난날을 후회하며 짧게 혀를 찼다.

 

그래. 한 발 물러나서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로아가 렌을 나름 잘 대해주는 건 사실이다. 나조차도 로아가…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또, 죽어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사실이지만, 둘은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확실히 그림이 좋으니까. 겟타의 표현을 빌리면, 둘이 함께 빛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로아랑 같이 있을 때, 렌도 진심으로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짓긴 했는데…그런데! 그런데 말야!

 

툭 까놓고 말해서, 로아는 좋은 연인 상은 아니지 않은가!

키리시마 로아의 성격과, 그에 따른 그의 별명이 뭔지는 같은 로아로민의 멤버이자 로아의 사촌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제멋대로 마이페이스 왕자님. 그래. 제멋대로 마이페이스. 그래, 제멋대로! 그 특유의 성격 탓에, 언제 제 소중한 동생에게 상처를 줄 지 모르는 일이다.

…혹은 내가 옛날에 당했던 것처럼 렌의 약점을 잡는다던가, 뭐 그런 짓을 해서 언제 렌한테 상처를 줄 지 모르는 일이야! 아니지. 이미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

 

그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저를 바라보는 로아를 살짝 노려보고서, 로민은 속으로 로아 탓에 상처받는 렌을 상상하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돼. 렌을 더 이상 상처입힐 수는 없어.

 

정말로 소중한 동생이자 제 은인이자 친구를 위해, 로민은 제 사촌인 로아를 전력으로 막기로 결심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로아잖아? 둘이 가까워지면 렌만 힘들어질 뿐이야. 실제로 로아의 제일 가까이서 로아 덕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혹은 앓았었던 사람들을 넘치게 봐왔던-당장 저기서 악보를 보고 있는 로아로민의 드러머이자 키리시마 로아의 소꿉친구, 타이라 겟타라거나- 로민이었으므로, 렌은 그런 길을 걷지 않았으면 했다. 렌, 도망가. 얘는 안 돼!

 

로민은 렌을 위해서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기로 결심했다.

 

 

한편, 로아는 제 앞에서 저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로민을 슬쩍 바라보았다. … 아, 아. 진짜. 입꼬리는 애써 올렸지만 로아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채였다.

 

…뭐,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확실히 오늘 자신이 렌과 잡은 약속같은 건 없다. 하지만, 어차피 연습이 끝나면 잠시 렌을 데리고 필요한 것을 사러 갈 겸 놀러가려고 했었으니까. 따지고보면 이것도 데이트 약속이 아닌가? 렌아이한테만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일단 이 몸은 약속을 잡은 거 아냐? 그냥 렌 쨩만 모를 뿐이지?

렌아이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로아는 뻔뻔하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로민을 쳐다보았다.

 

...그으래. 뭐, 한 발 물러나서. 엄격히 말하자면 확실히 이 몸도 렌과 약속을 잡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민이 렌과 잡은 약속 또한 없을 것이다. 로민의 말을 듣고서 매우 당황했다는 듯 이 몸과 로민을 번갈아보던 렌 쨩의 표정을 보면 명백했다. 아하하, 정말. 로민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뭐. 어쩐지 무언가의 기싸움이 되어버렸으니까, 여기서 질 수는 없지. 여기서 진다면 렌 쨩도, 이 몸의 체면도 로민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그렇잖아?

 

아, 아. 정말~ 렌 쨩도 참 인기쟁이라니까. 뭐, 물론…이 몸보다는 아니겠지만! 로아는 마치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여전히 당황한 채로 저와 로민을 번갈아서 쳐다보고 있는 렌을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로민에게로 돌렸다.

 

로아는 자신과 렌을 위해서, 이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기로 결심했다.

 

 

그런 두 사람의 마음같은 건 전혀 모르는 채로 렌아이는 미간을 짚은 채 로아와 로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그래서.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지. 저기, 아니. 그. 이래선 연습이고 뭐고 전혀 못 하잖아. 아니, 아니야. 다 됐어. 연습은 됐으니까 그냥 집에 보내줘... 연습 끝나자마자 집 가서 쉬려 했던 자신의 계획(?)이 망가졌다는 것을 직감한 렌아이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여기서 제일 좋은 방법은 나도 저 키리시마들도 아닌 제 3자가 이 사태를 해결해 주는 방법이겠으나.... 믿었던 겟타나 우시로는 자신의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서 그냥 자기들끼리 악보를 점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젠장할. 연습 빨리 끝내고 집 가고 싶으면 좀 협조해! 라는 눈빛을 보내봤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렇다고 유우가나 다른 애들한테 SOS를 칠 수도 없는 상황이므로, 렌아이는 지금 이 장소에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로민이든 로아든 둘 다 내 말같은 건 들어주지 않고 있지. 저기. 둘 다. 내가 그렇게 소중하면 내 말 좀 들어주지 그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며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찾던 렌아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답이 안 나와... 트립 전의, 전직 고등학교 3학년으로 있던 동안 계속해 굴렸던 머리를 아무리 빙글빙글 굴려본대도, 최선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 잘 굴러가나 싶으면 떨어지고, 굴러가나 싶으면 떨어지고…아, 그래. 이젠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방법이 없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분명 둘 다 렌아이 자신을 위하여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은 들은 체 하지도 않고 있는 두 사람을 아련히 바라보며, 렌아이는 지친 듯 아예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연습실에 비치되어 있는 소파에 걸터앉아, 원래 연습 중간중간에 당 보충할 용으로 비치해두었던 간식들 중 자신 몫의 초콜릿을 집어들고 입에 물었다. 몰라. 저러다 알아서 포기하고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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