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민아, 왔어?”
“너… 지금 이게 몇 번째인지 알고 있어?”
“응, 그게… 미안해.”
“사과하라고 한 말 아냐.”
“그래도…”
채유하는 어설프게 웃으며 최세민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도 알잖아. 내가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서. 한손으로 제 발목을 매만지며 내뱉는 말은 그가 가진 특유의 힘 없는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꽤 지나다니는 시장판에서도 유독 작고 느린 말투가 단어 하나 빠지지 않고 제 귓가에 들려온다고 최세민은 생각했다. 그와 지내던 시간이 짧지 않고 유독 그를 신경쓰다보니 익숙해진 탓인 걸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그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에 최세민은 평소 하던 훈련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채 그를 찾아야만 했다. 발목을 다쳐 움직이지 못해 손길이 필요하다는 말은 최세민에게 있어 훈련이 제 때 끝나는 걸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허약했으니 채유하가 어딘가 곧잘 다치는 건 자주 듣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다친 게 발목이라면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고, 아직은 날이 덜 찬 계절이지만 해가 넘어가면 추워지는 일도 금방이었다. 곧장 소식을 건넬 방도가 없어 여러 사람을 건너온 덕분인지 최세민이 아무리 빠르게 걸음을 옮겨도 채유하가 긴 시간동안 밖에 있는 건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채유하가 발견한 사람이 최세민의 낭도였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몸 하나 지켜줄 하인을 하나라도 데리고 다니라 늘 말하였는데. 그의 사정에 사람 하나 늘어도 고생이건만, 몸을 지키지 못하면 하루 굶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였다. 게다가 하나 붙여주겠다 말하여도 듣지 않았으니 집안사정이 아니라 고집인 게 분명했다. 최세민은 익숙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가 매만지던 발목에 손을 뻗었다. 성인이 된 남정네가 혼인을 올리지 않는 낭주의 발목을 살피는 것이니 이는 둘 사이가 심상치 않거나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였다.
“근데, 세민아.”
“왜?”
“너 혼자, 온 거야…?”
“왜, 그럼 찬오 형님이라도 데려와?”
“그, 그게 아니라. 말이라도 끌고 오겠거니 했지…”
찬오 형님이란 호칭이 들리자 채유하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그가 손찬오를 연모한다는 건 서라벌 사람들이 죄다 아는데.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그의 이름을 꺼낸 거지만. 최세민이 아는 손찬오는 책임감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딘가 가볍고, 선을 넘기도 하고, 저와 설연제 앞에서 형님 행세를 구는게 얄미워도 최세민에게 있어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니 같이 지내온 채유하와 손찬오가 잘 되길 바랐지만. 손찬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대를 찬 이후로 유독 그와 관련된 일에 발을 내빼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세민은 처음에야 둘이 싸웠나 싶어 그들 사이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손찬오나 울음을 터트리는 채유하의 모습에 전과 같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대체. 최세민은 손찬오를 붙잡고 물었으나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한쪽은 사정을 알 수 없으니 닦달할 수 없었고, 한쪽은 괜찮다는 말만 하니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이 멀어지는 걸 보고 있어야만 했다. 가장 아끼는 친우들을, 그리고…
“내가 업고 가면 되잖아.”
“길거리에서…?”
“다시 가서 말을 데려오는 건 늦어.”
지금 다쳤는데, 하나하나 신경 쓸 때야? 최세민은 습관처럼 미간을 좁혔다. 강압적으로 나서는 건 아니었고, 툭하면 짓는 표정이었다. 이를 알고 있는 덕분인지 채유하는 불만스런 표정에도 작게 웃었다. 알겠어, 세민아. 표정 좀 펴. 웃음 섞인 말에 최세민은 좁혀진 제 미간에 온통 신경을 쏟았다. 그런다고 고쳐질 습관이면 이미 고쳤겠지만. 그저 그가 한 말이니 최대한 고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장 아끼는 친우들, 그리고… 사랑하게 된 이의 말을.
긴 소란이 될 것 같았던 상황은, 최세민이 채유하를 업은 채 집을 바래다주어 지나가는 일상으로 남았다. 두 사람의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냅두기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손찬오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 그의 집에 가는 건 자신이 아니라 찬오 형님이었겠지. 지금 상황에 안심하면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고 최세민은 생각했다.
*
“그 따위로 굴거면 차라리 관둬.”
“뭐?”
“내가 왜 형님 때문에 걔가 힘들어 하는 걸 봐야 하는데.”
최세민은 신경질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손찬오처럼 말로 타인의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건 최세민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고, 최세민도 나름대로 고민해 이야기 할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다짜고짜 멱살부터 잡으며 싸움을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건, 채유하를 한참 바라보더니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 손찬오의 모습 때문이었다. 핑계라면 핑계겠지. 갑작스럽게 올라오는 욱한 감정이 그저 최세민이 채유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를 보지 못한 것뿐이었다. 채유하는 갑작스럽게 달려든 최세민을 말리다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설연제를 찾으러 나선 참이었다. 손찬오는 그가 가진 특기로 웃으며 상황을 넘어가려다 완전히 사라진 채유하를 보고 입꼬리를 내렸다. 평소보다 날카로운 말을 그에게 던지고 저를 붙잡은 손을 떼어 놓았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는 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하였지만, 최세민은 그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내뱉는 말인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 좋아하잖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잖아. 그럼 뭐가 문제야. 그 녀석도 널 좋아하는데. 지금 당장 내뱉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손찬오를 기다렸다. 변명이라도 해 봐. 제가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해보라고.
“그 녀석이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그러는 거요?”
“너야말로 제정신이야?”
손찬오는 미간을 지푸렸다. 그가 화내는 일은 드물면서도, 가족처럼 여기는 이에 대한 일이라면 울컥 화를 내는 일은 흔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 표정 그대로 손찬오는 점차 감정을 담아 행동하기 시작했다. 온전히 말하지 않은 말도 알아차리는 사이였으니 변명을 내놓지 않았다. 그를 밀어내고 화만 담긴 표정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최세민이 채유하를 쫓을 무렵, 손찬오도 여전히 채유하를 쫓고 있었다. 그러니 최세민이 어떤 마음인지 손찬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꼴은 아니더라도 진골은 진골이야. 6두품인 네가 진골을 넘보는 것 밖에 안 되는데. 넌 무얼 믿고 그리 행동해? 처음부터, 처음부터 이뤄질 사랑이었으면 저도 그를 매정하게 내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순간이 거짓이라 해도 그를 사랑한 마음은 거짓인 적 없었고, 지금도 여전한데 내가 왜 멍청하게… 손찬오는 제 머리를 헝클였다. 사랑이란 게 제 뜻대로 되는 일이던가. 이미 마음이 기울였다면 포기할 생각도 있었다. 최세민은 제가 가장 아끼고 믿는 동생 중 하나였으니 어정쩡한 저보다, 겁이 많은 저보다 나을 거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랬는데, 왜 다시 제 마음을 꺼내라 말하는가. 손찬오가 말을 끝맺지 못한 것과 동시에 최세민도 입을 다물었다. 그가 하는 걱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신분의 차이를 넘지 못한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손찬오가 아니었다. 그래서, 뭐. 그런 말을 듣는다고 괴로운 얼굴을 보고도 가만 있을 수 있어? 그런 말을 늘어놓아봤자 걔가 울음을 그치기라도 해?
“그런 애매한 태도가 더 잔인하다는 생각은 안 해?”
“네가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그럼 확실하게 해.”
“나라고 좋아서…”
“최세민! 찬오 형님!”
두 사람이 한참동안 말다툼을 할 동안 둘 사이를 끼어든 건 설연제의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채유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뛰어오고 있었다. 상황을 보고 올 테니 기다리라는 설연제의 말에도 채유하는 고개를 내젓고 그를 따라갔다. 왜 싸우는지 몰라도 봐야 해. 둘이 싸우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분명 심각한 일인 거야. 자신을 찾느라 숨도 겨우 내뱉던 채유하의 말에 설연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든 설연제는 먼저 최세민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한테 소리지르면 어떡해, 세민아. 단호하지만 나긋한 목소리에 최세민은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뜀박질에 숨을 겨우 고르는 채유하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손찬오의 발도 채유하를 향했지만, 움직이지 않았고, 그게 바로 두 사람의 차이였다. 이런 데도, 내가 나서야 해? 손찬오는 제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그대로 뒤돌아 제 갈 길을 떠났다. 그 행동에 설연제는 찬오 형님, 하고 그를 불렀지만 손찬오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야! 뛰지 말라니까!”
“헉… 둘이, 싸우면…”
“…싸운 거 아냐.”
“응…?”
“그런 거 아니라고.”
일방적으로 화풀이 한 거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만큼 낯부끄러운 이유에 최세민은 아니라는 말만 내뱉었다. 욱한 성질에 화를 당한데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젠장,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손찬오가 간 방향을 한참 바라보던 설연제는 겨우 숨을 고르던 채유하에게 다가갔다. 그를 살피면서도 걱정스런 얼굴로 최세민을 바라보았다. 설연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었어…?”
“… …”
최세민은 제 머리를 헝클였다.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눈앞에 놓인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욱해서 형님 멱살을 잡았어, 라고 말할 수도 없고, 형님이 유하를 함부로 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최세민은 결국 미안하다는 말만 남길 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채 사과의 말을 내뱉는 모습에 채유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찬오와 제 사이가 좋지 않을수록 최세민하고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를 밀어내듯 아끼는 동생마저 밀어내고 있는 것이겠지. 그럴수록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다짐했는데. 채유하는 제 가슴에 얹은 손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그를 나즈막히 불렀다.
“세민아, 내가 잘 이야기 할게.”
“무슨 소리야?”
“두 사람이 싸우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찬오랑도 일부러 그러는 사람은 아니잖아.”
“…그래.”
그의 말에 오해가 있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얘기하고 해결할 문제였다. 아무리 제가 그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끼어들어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최세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에 수긍해주는 모습에 채유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하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하나의 사건이 일상처럼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