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레이블 이입 드림으로 설정이 다른 부분이 존재합니다.
“어? 백지한 씨…?”
“저 녀석이 왜 같이 있지?”
“그야 같이 산책을 나왔으니까요…?”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백지한의 표정에 유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드물게 쉬는 날로 새로 생겼다는 카페 소식에 유예를 데리고 나온 참이었다. 맛있는 디저트를 파는 카페가 집 근처에 생기다니 평소 커피를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방문하길 기대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가는 건 민망하고 어차피 따라오겠다 나설 유예라면 수연이를 불러 일이 복잡해질 바에 차라리 처음부터 같이 가는 게 현명하다는 판단으로 나온 길이었다. 근데 그 카페에 백지한 씨가 있다니… 좋아해야 하는지 아닌지 고민이 드는 사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노려보는 눈길에 유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활 씨랑 있는 것보다 유예 씨랑 있는 백지한 씨가 좀 더 나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제가 누구랑 있어도 불만스러운 표정이 기본이었다. 왜 만나기만 하면 싸우려고 하는지 알기 모르겠네. 활 씨는 좀 수상해도 둘 다 심기를 불편하게 할 짓은 안 하는데… 어라, 이렇게 생각하니까 역시 문제는 백지한 씨인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불만을 내뱉는 건 제 쪽이다 싶어 유하는 일부러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그보다 백지한 씨는 왜 여기 있어요?”
“…이제부터 널 보러 갈 생각이었어.”
“카페에서…?”
“아니, 귀엽게 생긴 디저트가 좋다고 했었잖아.”
“그랬죠.”
그 순간, 유하의 시선은 백지한의 손에 향했다. 그의 덩치나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작은 상자가 손에 들려 있었다. 일부러 사러 온 거야? 나 주려고? 뭘 좋아하는지… 아, 알겠구나. 한참 고개를 기울인 채 작은 상자를 바라보던 유하는 결국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전에는 커다란 꽃다발을 사오더니 이번에는 디저트였다. 저에 관한 일이라면 작은 일이라도 신경 쓰는 게 백지한이란 사람이었지. 그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에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지 않았다.
“아하하, 그게 뭐예요~!”
“웃으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보기 좋네.”
“그렇다고 말도 없이 우리집까지 찾아오는 건 용서 안 해요.”
“…연락하려고 했어.”
“집 앞까지 와서 말입니까?”
그리고 그 사이를 끼어든 건 유예의 목소리였다. 그는 드물게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백지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유예를 만났을 때, 그가 차갑게 느껴지던 때도 있었지만 본성이 나쁜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지금껏 만난 사자 중에 가장 올곧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 적 있었다. 그러니 백지한이 그를 좀 노려봤다고 해서 똑같이 화를 낼 만한 성격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의문이 계속 이어지기도 전에 유하는 제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팀장님이라고 써 있는 글자에 놀라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기류가 평소 같지 않은데도 신경 쓸 여유가 사라지는 건 금방이었다. 휴일인데도 기필코 전화를 하는구나…!! 속으로 불만을 내세우며 유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카페 안에 두 장정이 서 있는 것만으로 눈에 띄는데, 그들을 두고 자리를 비우려니 불안하기만 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달의 신이니 자격자니 뭐니 해도 결국 저는 내일도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다. 그들의 팔에 손을 얹고 살면서 가장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만 금방 받고 올게요. 둘이 싸우지 말고 조용히 있어요!”
그가 자리를 비우자 조용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딱히 좋은 사이도 아니란 말이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반려이며, 누군가의 주인이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두 사람은 그들 주변에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에게서 먼저 목소리를 낸 건 백지한이었다. 어딘가 불편한, 그보다 화가 난 것처럼 제 감정을 겨우 참아내는 목소리였다. 유예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지?”
“무얼 말입니까?”
알고 있다고 해도 그의 질문에 되묻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예라는 도깨비는 고지식하고 농담도 통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전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답도 오지 않는 존재였다. 백은 이를 알고 있었으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기에 알 수 있는 눈빛이었다. 상대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애틋한 시선, 조심스러운 손길, 멀어질까 두려워 절로 아끼게 되는 말까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인 덕분에 더욱 더, 잘 알고 있었다. 유예가 제 반려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제 반려에게서 무얼 바라고 있는지. 만약 유예가 자격자를 탐내고 있던 거라면 백에게 있어 전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주인을 탐내는 충성스러운 개… 늘어놓자면 좋은 꼴은 아니겠으나 저는 설화계를 떠난지 오래였다. 설화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제 알 바가 아니었고, 유예가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정 또한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바라던 건 선하에게 이제껏 모아온 설화를 주는 걸로 거래를 하고 손을 떼는 일이었다. 분명 그뿐이었는데… 제 반려가 자격자로 나타나 이제는 운명의 상대도 아닌 놈이 제 반려를 넘보고 있었다. 그가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제가 하염없이 기다린 건 저의 반려였다. 제 평생을 바쳤고, 제 모든 것을 이루게 한 상대였다. 상대에 대한 깊이도, 갈망도 차원이 달랐다. 뒤늦게 나타나 제게 자격자에 대한 존재를 알리지 않은 그가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유예를 때려눕히고 싶었으나 저의 착각이길 바라는 마음에 백은 일단 말부터 꺼냈다. 순리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쉽게 마음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예가 부정하길 바라면서 백은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는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백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유예의 멱살을 잡았다. 아까는 겨우 참아낸 분노였다면, 지금은 오로지 유예만을 향한 분노였다. 백은 비꼬는 게 분명한 말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유예 또한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너, 지금… 지금 누굴 넘보고 있는지 알긴 아나?”
“제 주인이십니다.”
“하, 웃기는군. 그럼 주인을 탐내는 건 네가 할 짓인가?”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주인을 넘보는 게 개새끼가 할 짓은 아닐 텐데.”
“어차피…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
“…계약을 하게 되시면 더이상 반려가 아니게 되니까요.”
“닥쳐…”
“그만해요, 백지한 씨…!”
들려오는 말에 백지한은 잡고 있던 멱살을 놓은 채 뒤를 돌았다. 전화만 끝내고 금방 돌아온다더니 그 말처럼 어느새 잔뜩 지푸린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백지한이 이유없이 유예의 멱살을 잡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사정을 이야기하자니 그라면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의 멱살을 잡냐고 답할 게 뻔한 일이었다. 제 반려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다. 백지한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로 유예를 노려보며 멀어졌다. 지금은 차마 한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제 반려의 얼굴조차 볼 자신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지, 라는 말과 케이크가 담긴 작은 상자를 남기고 카페를 나가자 그 뒤로 유하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요…! 누구보다 화가 났을 백지한이었지만, 상대도 다를 건 없었다. 유예는 멀어지는 백지한을 바라보며 손에 힘을 쥔 채 꽉 쥐었다. 제게 있어 주인은 주인일 뿐이다. 그게 백이 저를 한낱 개라고 말해도 부정하지 않는 이유였다. 맞는 말이니까. 주인을 지키고, 주인을 해치는 건 물어뜯는 존재. 그 이상이 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기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쁜 건 주인이 아니라 제 쪽이다. 가지면 안될 마음을 갖고, 탐내면 안될 것을 탐내고 있다. 백이 화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평생을 기다려온 존재를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된 제가 원하고 있는 게 얼마나 잘못된 길인지. 순리가 가장 중요한 설화계에서 자신이 하면 안될 짓이라는 건, 유예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유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예를 살폈다. 어디 다친 모습은 아닌데… 중얼거리며 그의 옷깃을 정리해주자 유예는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아까까지 느꼈던 감정이 거짓처럼 저를 걱정하는 주인의 모습에 어느새 진정된 상태였다.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무얼 탐내고, 하면 안 될 짓을 하는지. 그렇다고, 뜻대로 되기만 했다면 자신은 7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주인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고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설화처럼 존재하고 정해진 삶을 살면 그만이었는데. 사자 중에서, 설화계를 살아가는 존재 중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는 제게 있어 변화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비웃는 것처럼 제 주인과 연관된 일에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예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이는 분노였다. 백과 같은 분노, 그러나 다른 게 있다면 분한 마음이었다. 백의 태도에 심술부리듯 말하였지만, 백은 제 반려와 계약하지 않으려 할 테고 그러면 이어지는 건 자신이 아니라 백이었다. 이겨낼 수 없는 순리. 이를 알기에 느낀 분한 마음. 유예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스스로는 몰랐겠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변함없는 탓에 나온 감정의 숨결이었다. 그러자 유예를 살펴보고 있던 이는 그의 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역시 백지한 씨가 뭐라고 한 거죠?”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그저? 괜찮아요. 저는 유예 씨를 믿으니까.”
“그저… 심술을 부렸습니다.”
“백지한 씨가요? 그럴 줄 알았어.”
“아뇨, 제가.”
“응?”
“제가 부렸습니다.”
“유, 유예씨가…?”
“예.”
유예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제게 유리했을까? 활처럼 능청스럽게 굴 수 있었다면 지금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을까. 어떠한 말이 들려올지 몰라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으나 역시나, 생각도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제 주인은 언제나 예상을 벗어난 반응을 보이는 인간이었다. 유하는 제 입을 가린 채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아하하, 유예 씨가 심술을 부리다니 상상이 안 가요.”
“상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좀 궁금하긴 한데… 알았어요.”
“…그것 뿐입니까?”
“응? 그럼요?”
“… …”
“뭐어, 어차피 백지한 씨가 못된 말만 골라서 했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예 씨를 화나게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난 지금까지 화난 유예 씨는… 음, 아닌가? 본 적 있나?”
여전히 웃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 유예는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백은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제가 살아온 설화계에 아무나 붙잡고 묻는다면 누구든 저를 이상하게 볼 정도로, 저는 하면 안 될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금도 제 주인이자 사랑하고만 인간에게 이러한 말을 늘어놓지 못하는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까요. 아무런 말도 없는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었는지 유하는 평소처럼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존재했다. 제 주인은 무언가 숨기는 걸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항상 되물어 보는 탓에 쉽게 말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되묻지 않았다. 오히려 백이 잘못했다며 그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았다. 제 탓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 유예라는 도깨비에게 얼마나 큰 변화이고, 안심이 되는지 제 주인은 알고 있을까. 유예는 작게 미소지었다.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언제나 유예만 모르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요, 유예 씨. 다음에 다시 와요. 어느새 발걸음을 뗀 제 주인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주인은 선하님보다 훨씬 작은 편이라 먼저 발걸음을 움직였어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유예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손도, 발도, 입도 모든 게 작아 걱정이 드는 주인이었지만, 언제나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게 기뻤다. 그 거리에서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도. 유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는 어디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았으나 유예는 우리가 사는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임에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하면 안 될 짓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딱 여기까지만. 같이 돌아가는 곳이 있고, 반려라는 운명을 지닌 이보다 저를 먼저 걱정해주는 정도까지만 손에 쥔 채 놓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