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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에게도 유년기란 존재할까.

이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지하다. 내가 살아오며 본 유일한 악의 증거에 유년기가 있었다는 걸 방금 기억해 냈으니까. 심지어 그 유년기에는, 나와 알료샤도 존재했고.

 

그래 나의 작은 악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지.

작고 부드러운 손과 발로 들판을 뛰어다니고. 내 동생과 놀아주던 소녀가 있었지.

 

나의 악마를 처음 만난 건, 아주 어린 시절, 말도 없이 사라졌던 알료샤를 찾아 나섰을 때였다.

그리고리에게도 말하지 않고 불쑥 외출한 알료샤는 집에서 좀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숲으로 향하는 거리에서 처음 보는 소녀와 이야기 하는 동생은, 드물게도 슬픔을 잊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알료샤.”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말도 하지 않고 외출한 동생을 데려와야 하는 건 형의 역할이었다.

내가 왜 온 건지 눈치챈 알료샤는 잠깐 아쉬워했지만, 이내 내민 손을 마주잡고 집으로 향했다.

 

“잘 가, 레뉴시카.”

 

알료샤와 함께 놀고 있던 소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그 미소와 목소리에 홀려,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단정하게 양쪽으로 땋아 내린 초콜릿 색 머리카락. 초겨울 호수의 표면같이 시린 벽안. 알료샤보다 조금 작은 체구의 그 소녀는, 분명 알료샤의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노인에게서 느껴질 법한 초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으응, 잘 가. 지노치카.”

 

소녀에게 대꾸한 알료샤는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마도 동생은 내가 인사할 시간을 주려고 일부러 멈춰 섰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착각을 정정해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누구야?”

“친구.”

“친구?”

 

내가 원한 건 그런 대답이 아니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교회는 다니는지 형제는 있는지, 그런 걸 물어본 거였지.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와 어른의 사이에 있던 나는 내 생각이 지나치게 세속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말 궁금한 걸 물어보지 않고, 답변에 맞춰 이야기를 이어주었지.

 

“꽤 친한가 보구나.”

“그렇게 보여?”

“그거야……, 널 레뉴시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 봤으니까.”

 

동생은 알렉세이라는 이름보다는, 알료샤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아이였다. 그러니 애칭으로 불리는 것 자첸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지만, 저 애칭은 처음 들어봤다.

레뉴시카라니. 퍽 귀엽게도 부르구나.

나는 어색한 애칭을 입에 담던 새하얀 얼굴을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이상해?”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렇구나.”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나는 알료샤에게 외출 때는 꼭 언질을 달라는 부탁만 했고, 특별히 훈계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알료샤는 이후에도 몇 번이고 나에게만 목적지를 말하고 소녀를 만나러 갔다.

지노치카라 불리는, 어디 사는 누구인지 모르는 그 소녀를…….

 

“사실은 말이야.”

 

내가 그 낯선 호칭의 진실에 대해 듣게 된 건 소녀와 놀고 있는 알료샤를 세 번째로 데리러 갔을 때였다.

소녀가 만들어준 꽃반지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알료샤는, 무언가 대단한 고백이라도 하듯 속에 담아 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노치카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있어.”

“투정?”

“응.”

 

알료샤가 투정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다.

의아함도 있지만, 궁금증이 더 컸던 나는 가만히 동생의 말에 귀 기울였다.

 

“지노치카랑 있으면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다고,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는 거 같다고 했거든. 어쩐지 마음도 편해지기도 하고…….”

 

가슴에 손을 얹은 알료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정말로 평온해 보여서, 지켜보는 내 마음도 절로 평온해졌다.

 

“그 말을 듣더니, 나를 레뉴시카라고 불러주겠다고 했어. 사람은 불리는 이름만 달라져도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느껴진다고, 자기는 레뉴시카라고 불러주겠다고 했어.”

 

도무지 어린아이의 생각이라곤 할 수 없는 발상이다. 나는 좋은 의미로 감탄했다. 분위기만 조숙한 줄 알았더니, 사실 내용물은 어른이었던 걸까.

조숙한 아이는 어른들에게 선호되지만, 본인은 귀찮은 인생을 사는 경우가 많았지. 아주 가까운 곳에 예시가 있어 그 진실을 아는 나는, 그 아이를 동정할 뻔했다.

 

“그래서 나도 지나이다를 지노치카라고 불러.”

“그렇구나.”

 

지나이다. 드디어 알게 된 소녀의 이름을, 나는 머릿속 깊숙한 곳에 기억해 두었다.

그때는 몰랐지. 그 조숙한 아이가 품고 있는 건 성숙함이 아닌 이질적임이고, 신비함으로 보이는 묘한 분위기의 실체는 기묘함이나 오싹함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 동생과 놀아준 건 작은 악마였다. 꼬리도 나지 않고 뿔도 자라지 않은, 어리고 작은 악마. 몇 년 뒤 아름답게 자라 나의 생을 파괴하러 올, 내가 아는 유일한 악의 실체 말이다.

 

…그래서, 악마에게도 유년기란 존재할까. 악마도 생장과 노화를 겪을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본 건 다 무엇일까.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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