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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know you, I walked with you once upon a dream.

 

“셴하이트,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말레우스는 별생각 없이 영화연구부 부실로 발을 들였다가 우뚝 멈춰 섰다.

방 안에는 자신을 부른 이와 이 학원의 유일한 감독생, 단 둘뿐이었다.

무언가 야릇한 분위기가 돌거나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평온한 분위기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렌은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고, 빌은 짜증이 섞인 얼굴로 무언가 열심히 꼼지락거리다가 자신을 부른 이와 눈을 맞췄다.

 

“왔어? 늦었네.”

“…혹시 바쁜가?”

“그다지 바쁘지 않아. 금방 끝나니 조금만 기다려.”

 

새침하게 말한 빌은 들고 있던 빗을 내려놓았다.

말레우스는 계속해서 제 눈치를 보는 아이렌을 자신도 모르게 빤히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아이렌은 빌에게 잡혀 꾸밈을 당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평소엔 늘 하나로 땋아 늘어뜨리고 다니던 새까만 생머리는 높게 하나로 묶여 물결치고 있었고, 정성 들여서 세팅한 머리 위엔 작고 소박한 티아라가 올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정말 왕족을 위해 만들어진 티아라는 아닌 듯한데, 어디서 난 티아라일까.

말레우스가 소박한 티아라에 시선이 뺏긴 사이, 빌의 작업이 모두 끝났다.

 

“자, 훨씬 낫네.”

 

제가 직접 정리해 준 머리를 흐뭇하게 둘러본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어플을 켰다.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을 확인한 아이렌은 초조해하며 물었다.

 

“꼭 제가 해야 하는 건가요? 이거? 선배에게 온 협찬이라면서요.”

“착용샷은 다양할수록 좋으니까. 본래는 여성을 타겟으로 나온 제품이라 여자 착용샷도 있으면 좋을 것 같거든.”

“예? 잠깐. 설마 사진 찍을 거예요? 그걸 선배 마지카메 계정에 올릴 거고요?”

“당연하지. 무슨 바보 같은 소리니?”

 

그 한마디에 아이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다.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이었을까.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아이렌이 냅다 말레우스에게 달려갔다.

 

“말레우스 선배, 살려주세요!”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는, 숨기 좋은 등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렌이 제 뒤로 가 몸을 웅크리는 걸 본 말레우스는 소리죽여 웃었다. 언제나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제 할 말은 하는 아이렌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우습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후다닥 도망치는 아이렌을 본 빌은 고운 얼굴을 구겼다.

 

“잠깐.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겠잖아?”

“제 사진을 찍겠다고요? 차라리 절 잡아먹으세요!”

“뭐? 나 참. 대체 넌 왜 그렇게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거니?”

 

아이렌은 원래 잔잔하게 이상하고 조용하게 엉뚱한 존재였다. 알기 쉬운가 싶다가도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했고, 아이같은가 하면 또 말도 안 되게 영감 같은 말을 하기도 했지.

그래서 빌은 아이렌이 대체 왜 사진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기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는 들어본 적 있지만, 그 이유도 이해가 안 갔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말레우스, 그 바보 좀 여기 다시 앉혀주겠어?”

“흐음.”

 

빌의 요청을 들은 말레우스가 눈썹을 까딱였다.

제 뒤에서 눈빛으로 살려달라고 말하는 이 가여운 아이를 배신해도 될까. 알아온 시간은 빌 쪽이 더 길다지만, 제가 더 신경 써주고 싶은 이는 누구인가.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장난스럽게 슬쩍 웃은 말레우스는 한쪽 팔로 아이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하군, 셴하이트.”

“뭐?”

 

앞뒤 설명도 없이 그 한마디만 남긴 말레우스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렌 또한 그와 함께 사라졌다.

빛의 입자와 함께 사라진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식물원의 아열대 존이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본 아이렌은 혹여라도 자신을 놓칠까 봐 허리에 단단히 두른 팔에 손을 얹고,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선배.”

“뭘 이정도야.”

 

느긋하게 스르륵 팔을 뺀 말레우스는 한 걸음 떨어져 아이렌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단정하게만 보이는 흰 얼굴이, 지금은 우아하고 화려하게 느껴진다. 머리의 티아라만 좀 더 크고 화려했다면, 어딘가의 왕족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굵게 웨이브가 들어간 새까만 머리카락을 손끝에 말아보았다.

에센스라도 바른 걸까. 손가락에 감긴 머리카락서 좋은 향이 났다.

 

“이 머리는 셴하이트가 해 준 건가.”

“예? 아, 네. 이상하죠?”

 

제 모습에 관심을 가지는 게 부끄러운지, 평정심을 유지하던 아이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보아하니 그는 진심으로 제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말레우스는 자신과 눈도 못 맞추고 고개를 푹 숙이는 아이렌의 행동에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화려한 모습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게 부끄러운 사실인가. 폼피오레의 학생 중에서는 더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이들도 많았고, 이 학원엔 뿔을 달고 다니거나 꼬리를 달고 다니는 이도 있지 않나.

혹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부끄러워하는 거라면, 그건 착각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말레우스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칭찬했다.

 

“잘 어울리는데. 사진으로 남겨두어도 좋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네? 아니, 선배도 참! 그렇게 띄워줘도 아무것도 안 나와요!”

“내가 너에게 뭔가 필요한 게 있어서, 그런 이유로 칭찬을 할 것 같나?”

“…그건 아니지만….”

 

아이렌은 말레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너무 유명해서 본인에게 직접 이름을 듣지 않았어도, 다른 이들이 말한 정보만으로도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능력도 권력도 다 가진 그는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 그 자체인 그가, 뭐하러 가진 거라곤 작은 괴수 파트너와 정신력뿐인 제게 뭐하러 립서비스를 해주겠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던 아이렌은, 결국 그의 칭찬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이럴 땐 그냥 감사하면 돼.”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어느새 말레우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그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거 시끄럽네.”

 

키가 큰 수풀 사이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온다.

낮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걸까. 눈을 반만 뜨고 불청객을 보던 레오나는 말레우스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들으라는 듯 ‘쯧’ 하고 혀를 찼다.

누가 봐도 반가워하지 않는 태도에, 말레우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이런, 누가 있었나? 몰랐군.”

“호오. 아무리 자고 있었다 해도 기척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러다 암살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그러나. 왕자님?”

“재미있는 소릴 하는군. 누가 암살을 당한다고? 이 내가?”

 

양쪽 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가며 말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맹수들의 싸움이 따로 없다.

‘궁중 암투물에서 주로 나오는 왕족들의 기 싸움이, 실제로는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

아이렌은 당장이라도 서로 매지컬 펜을 뽑아 들 것 같은 두 선배를 눈알만 굴려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은 조용했지만, 예민한 레오나에겐 너무나도 눈에 띄는 움직임이었다.

아이렌을 훑어본 그는 명백히 비웃는 얼굴로 물었다.

 

“넌 어디 시집이라도 가냐? 꼴이 굉장한데.”

“확 그쪽에게 시집가는 수가 있으니 조용히 하세요.”

“하. 웃기지도 않는 위협이군. 초식동물의 발길질이 더 무섭겠어.”

 

아이렌의 협박 아닌 협박에 레오나는 코웃음 칠 뿐이고, 말레우스는 불쾌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미간을 확 구겼다.

대체 왜 아이렌은 ‘당신에게 시집가겠다’라는 말을 협박으로 쓰고, 레오나는 그걸 우습다고 여기는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제가 저 말을 들었다면 조금도 협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고, 우스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

 

레오나의 반응에 아이렌이 한마디 하려는 그때.

아이렌의 교복 주머니 속에서, 요란하게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는 굳이 유추할 필요도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을 가장 찾을 이라면 한 명뿐이지 않은가.

 

“잠깐만요.”

 

혹시 몰라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아이렌은 통화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저 멀리 달아났다.

뒷모습이 겨우 보일 만한 거리에 멈춰서는 아이렌은 상당히 쩔쩔매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반성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짧은 통화 후. 땅이 꺼질 기세로 한숨 쉬고 돌아온 그는 말레우스에게 양해를 구했다.

 

“선배, 저는 가볼게요. 빌 선배가 당장 안 오면 가만두지 않겠대요.”

“데려다줄까? 나도 어차피 셴하이트가 불러서 간 거니.”

“아뇨, 혼자 먼저 오래요. 아무래도 같이 오면 또 도망가겠지 싶나봐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렇게 잠깐 대화하고 보내기엔 아쉽지만, 같이 갔다가는 빌이 아이렌을 더 혼낼 게 뻔했다.

말레우스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먼저 보내주기로 했다. 아이렌은 여러 의미를 담아 고개 숙여 인사했다가, 레오나에게는 눈길 한 번만 주고 자리를 떴다.

 

“허.”

 

자신을 흘겨보는 눈빛에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레오나는 다시 자러 가려다 말고, 우두커니 서서 아이렌의 등만 바라보는 말레우스에게 물었다.

 

“저 녀석은 왜 저런 꼴이었지?”

 

레오나가 제게 말을 걸 거라 생각하지 못한 말레우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한 마디도 섞고 싶어 하지 않으면서, 아이렌에 관해 물을 때는 예외라는 건가. 참으로 감독생을 각별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오려다가도, 자신도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에게 말을 걸었을 거라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여기서 괜히 무시하면, 트집을 잡히겠지.

레오나가 빈정거리는 걸 듣고 싶지 않았던 말레우스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꾸해 주었다.

 

“셴하이트가 꾸며줬다고 하더군.”

“그 녀석은 정말 저 녀석을 호적에 넣기라도 할 건가. 유난이 따로 없군.”

 

레오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빌은 마치 아이렌을 때론 과하게 챙겼고, 단속하려 들 때도 있었으니까.

그건 단순히 같은 동아리에 속한 후배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폼피오레 기숙사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본인은 부정하지만, 모두가 빌의 과도한 관심을 ‘특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말레우스는 레오나의 말에 마음속으로만 동의했다가, 흘리듯 본심을 흘렸다.

 

“잘 어울렸는데.”

 

숱이 많은 머리카락이 곱게 물결치며 내려오는 모습이 얼마나 곱던지. 머리 위 왕관도 꼭 제 소유물인 것처럼 잘 어울렸다.

옷만 제대로 입혀놓고 에스코트 해주면, 왕족들의 모임에 데려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말레우스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레오나는 머릿속으로 아이렌의 모습을 덧그려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치렁치렁하게 꾸며놓은 아이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게 그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아이렌의 본질은, 진짜 가치는 겉모습에 있지 않았다. 그의 진짜 가치는 심장 안쪽에, 뼈 깊숙한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레오나는 무심하게 반박했다.

 

“그 녀석 취향은 아니지만.”

“그렇지. 감독생은 원래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리니까.”

 

말레우스 또한 레오나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이렌이 특별한 이유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유일한 여학생이자 감독생이여서도 아니고, 그 외형 때문도 아니었다.

단순히 머리가 좋거나 이해력이 좋거나 한 것과는 궤가 다른 영민함. 인간의 관점이라기엔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초월적인 관점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마음 까지.

 

아이렌은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인외 같았고, 인외라고 하기엔 너무나 인간 같았다.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과한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선배와 후배라는 간극을 빼면 모든 게 동일하다는 듯 대해주는 그 모습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말레우스가 좋아하는 아이렌은 껍데기 안에 담긴 영혼이었다. 그리고 그 영혼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은, 명확하게 평소의 모습 쪽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말레우스는 오늘 본 아이렌의 모습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저런 모습도 나쁘지 않아.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거든.”

 

아이렌은 겨우 몇십 년밖에 살지 않았다. 본인 입으로 나이를 이야기한 적이 없긴 하지만, 인간인 이상 저렇게 젊어 보인다면 30년도 다 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자신과는 살아온 세월의 단위 자체가 다른 존재. 기시감을 느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존재.

 

그런데 어째서일까. 말레우스는 오늘 아이렌의 모습을 보고, 어린 시절 처음으로 무도회에 참석했을 때를 떠올렸다.

 

릴리아를 따라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때. 삼삼오오 모여 춤추고 마시던 수많은 여인 틈.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이들 틈에 아이렌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 분명 제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말레우스는, 티아라를 쓴 아이렌에게서 그리움을 느꼈다.

아주 오래전 이런 모습을 보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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