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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보체티가 친애하는 부하 조제페 보나세라와 사업적 이유로 외출하는 날이면, 보체티가 저택에선 늘 억울함 가득 찬 항의가 들려오곤 했다.

 

“나도 같이 갈래!”

 

조제페의 둘째 아이이자 그와 쏙 빼닮은 딸 에밀리아는, 오늘도 오빠만 아버지를 따라 멀리 외출하는 게 불만인지 눈을 부릅뜨고 항의했다.

조제페의 첫째 아이이자 그를 이어 마피아의 길을 걸을 아들 자코모는, 동생의 응석을 칼같이 잘라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미안해, 에밀리아. 착하지? 금방 돌아올게.”

“왜 오빠만 가는 거야? 나도 가고 싶어!”

“하하.”

 

이건 그냥 놀러 가는 게 아니라 마피아로서 할 일을 배우러 가는 거다. 속 시원하게 그렇게 설명하면 모두가 편하겠지만, 자코모는 아버지가 시킨 대로 진상은 알려주지 않은 채 말을 얼버무렸다.

 

“돌아올 때 선물 사 올게. 에밀리아가 좋아하는 과자로. 어때? 알겠지?”

 

자코모는 거짓말도 못 할 정도로 순진한 소년이 아니었지만, 하나뿐인 여동생에겐 지독하게 약해지는 정 많은 오빠였다.

쩔쩔매며 에밀리아를 겨우 떨어뜨려 놓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써니보이와 함께 아버지들에게 가버렸다.

 

“쳇.”

 

오늘도 치치와 저택에 남겨진 에밀리아는 미간을 팍 구기고 입을 삐죽였다.

오빠와 아버지는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는 걸까. 제가 아직 13살밖에 되지 않았다지만,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정도는 다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마피아의 딸로 태어난 제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라는 건 아버지의 이기적인 욕심 아닌가. 어머니처럼 일반인으로 살길 바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설령 마피아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오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 권리가 있는데.

 

‘이건 과보호야. 부당해!’

 

그 나이대 여자애들이 그러하듯, 에밀리아는 제가 아주 숙녀는 아니라도 클 만큼은 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허공을 보며 실컷 화를 낸 에밀리아는, 혼자 머쓱하게 복도에 서 있는 걸 그만두고 자신과 함께 남겨진 이의 곁으로 향했다.

 

“그냥 포기해, 절대 데려가 주지 않을걸.”

 

복도에서 떼쓰는 소리를 다 들은 걸까. 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책을 읽던 치치는 제 옆에 다가온 에밀리아에게 진심으로 충고해 주었다.

에밀리아는 치치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물었다.

 

“치치 도련님은 왜 같이 가지 않는 거예요?”

“…나는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거든?”

 

자신을 흘겨보는 치치의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있었다. 그건 절대, 자발적으로 따라나서지 않은 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보스는 늘 친아들인 치치 보다는, 양아들인 써니보이를 더 챙겼다. 후계자도 써니보이로 정하고 싶은지 중요한 일은 늘 그와 함께하려 했고, 대외적인 자리에도 치치보다는 써니보이와 동행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도 아마 치치는 선택받지 못해 남겨진 거겠지. 자신처럼 말이다.

에밀리아는 눈치가 빨랐기에,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사실을 쉽게 발설하지 않을 정도의 섬세함도 가지고 있었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히죽 웃으며 치치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래도 도련님이랑 놀 수 있으니까 좋네요. 헤헤.”

 

자신과 함께하는 게 좋다는 말을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치치같이 외롭고 섬세한 사람에게는, 이런 적극적인 호감 표현이 더 잘 먹혔다.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린 치치는 책만 내려다보며 답했다.

 

“너도 책이나 읽어. 아무거나 꺼내와서 읽어도 되니까.”

“그래도 돼요?”

“그래.”

“그런데 나, 아직 어려운 책은 아직 잘 못 읽는데.”

 

그러고보니 에밀리아는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렸지. 치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내고 눈썹을 까딱였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봤고 옛날부터 꾸준히 맹랑한 성격 탓에 친구처럼 대하고 있긴 하지만, 에밀리아는 이제 13살이었다. 16살인 자신이나 써니보이, 그리고 자코모와는 달랐다.

잠깐 고민하던 치치는, 결국 해결책을 상대에게 떠넘겼다.

 

“쉬운 책도 있으니까, 잘 찾아봐. 나 방해하지 말고.”

“음, 알았어요!”

 

다행스럽게도 혼자서도 잘 노는 씩씩한 에밀리아는 치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가 너무나도 씩씩하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서재를 둘러보며 읽을 책을 찾던 에밀리아는 결국 활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독서에 몰두하고 있던 치치가 서재에 있는 게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에밀리아?”

 

기척이 없는 것에 놀란 그가 책을 덮고 일어났다.

넓은 서재 어디에도 에밀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숨어서 제가 찾아주길 기다리는 건가. 황당한 생각이긴 하지만, 장난꾸러기 에밀리아라면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을 터였다.

치치는 제발 에밀리아가 여기 있길 빌며 서재 여기저기를 살폈다.

 

“에밀리아, 어디 있어?”

 

하지만 에밀리아의 모습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치치는 언젠가 제가 겪었던 나쁜 일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저택 밖으로 나갔으면 어쩌지. 뒤늦게나마 아버지를 쫓아갈 거라며 나섰다가 뒷골목의 부랑자라도 만난다면,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최악의 가정을 떠올린 치치는 재빨리 밖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에밀리아는 저택 대문 밖으로 나가기 전 발견되었다.

 

“아, 도련님!”

 

치치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 보았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저택의 정원 구석이었다.

에밀리아는 장미들 앞을 기웃거리며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치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안심한 얼굴을 감추고 다가갔다.

 

“언제 밖으로 나간 거야?”

“도련님이 방해하지 말라고 해서 나간 건데…. 책은 다 읽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말은 하고 다녀야지!”

 

나름 엄하게 꾸짖는다고 소리쳤지만, 에밀리아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하여간 넉살 좋은 건 자기 오빠랑 똑같다니까.’ 치치는 언제나 곤란한 일 앞에선 능청맞게 웃어넘기는 자코모를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치치는 의미 없는 잔소리를 그만두고,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었다.

 

“가시에 찔리니까 함부로 만지면 안 돼.”

“저 어린애 아닌 데요.”

“어려운 책도 못 읽으면 어린애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삐쭉 웃은 치치의 얼굴이 즐거워 보였다.

에밀리아는 애 취급당한 게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치치가 즐거워 보이니 반박은 관두기로 했다.

할 말이 없어진 에밀리아는 아까 전부터 구경하고 있던 장미로 시선을 돌렸다.

 

“예쁘다….”

 

다양한 크기의 장미꽃들은 오후의 햇볕 아래에서 붉게 빛나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가시에 찔릴까 봐 직접 만지지는 않았지만, 꽃 하나하나를 두 눈에 새겨두었다.

어떤 건 활짝 펴있고, 어쩐 건 아직 봉오리 상태로 때를 기다리고 있다. 같은 나무에서 핀 꽃임에도 그 모양새는 가지각색이라 눈이 즐거웠다.

 

치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에밀리아의 황록색 눈동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넌지시 물었다.

 

“몇 개 꺾어줄까?”

“그래도 돼요?”

“어차피 우리 집 정원에 있는 꽃인데, 뭐 어때.”

 

그래도 보스의 허락을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에밀리아는 치치가 무리해서 호의를 베푸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당사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위를 들고 와 능숙하게 가지를 잘라나갔다.

 

가시에 찔리지 않게 조심해서 꽃가지를 자르고, 받는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잔가지와 가시들을 잘라 정리한다.

누가 봐도 처음 해 본 사람의 솜씨가 아닌 치치의 손놀림에, 에밀리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하네요.”

“내가 못 하는 게 있을 거 같아?”

“그건 그렇죠. 와, 대단해 도련님. 도련님 최고.”

“…그건 좀 놀리는 거 같다?”

“놀리는 거 아닌데…….”

 

진정성 없는 대답이다. 치치는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에밀리아의 해명에 코웃음 쳤다.

다섯 송이의 장미는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하나의 끈으로 동여매어졌다.

치치는 매듭을 리본 모양으로 정리한 후, 에밀리아의 품에 떠안겨 주었다.

 

“자. 집에 가져가도 돼.”

“야호, 고맙습니다!”

 

방금까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칭찬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새하얀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장미꽃들을 훑어본 에밀리아는 그중에서 가장 큰 꽃을 골라 다발에서 꺼냈다. 그리고 손에 쥐기 좋게 길게 자른 가지를 한 번 더 잘라 짧게 만들더니, 앙증맞은 크기가 된 장미꽃을 풀물이 든 손을 닦고 있는 치치의 단춧구멍에 꽂아버렸다.

 

“!”

 

에밀리아의 돌발행동에 화들짝 놀란 치치는 장미를 빼버리려다가, 문득 신경 쓰이는 게 있어 손을 멈추었다.

 

“에밀리아. 너…, 다른 남자에게도 이러는 거 아니지?”

“네? 저, 뭐 실수했어요?”

“……아냐, 아무것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었나. 괜히 혼자 오해하고 난리 칠 뻔했다.

하지만 모르고 저지른 일이라 해도, 이렇게 오해할 여지를 줄 행동을 하면 곤란한데.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자코모가 이 꼴을 봤다면 기절하지 않았을까.

 

“…자코모 녀석, 나중에 고생하겠네.”

“저희 오빠가 왜요?”

“그런 게 있어.”

 

물론, 아직 에밀리아는 다 크지도 않은 꼬마니까 괜찮겠지만.

언젠가는 에밀리아도 숙녀가 되어 남자문제로 자코모와 아버지의 속을 썩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일 거다.

 

“거기서 꽃구경이나 해. 나는 돌아갈게.”

 

치치는 제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서재로 돌아가 버렸다.

당연하지만 에밀리아는 그를 쫓아가거나, 가지 말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아직은 책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혼자 노는 게 편한 에밀리아는 장미꽃밭에서 저만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에밀리아, 혼자 나와 있어?”

 

그렇게 혼자 꽃구경에 심취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장미향을 느끼던 에밀리아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동자는 오늘의 맑은 하늘과 같은 색.

친밀한 이의 등장에, 에밀리아가 히죽 웃었다.

 

“어서 오세요, 써니보이 도련님! 오빠는요?”

“조금 있다가 너희 아버지와 같이 올 거야. 치치는?”

“서재에 있을 거예요. 아까까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써니보이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왜 두 사람이 같이 있지 않은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서재 창문을 훑어본 써니보이는, 에밀리아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가리켰다.

 

“그건 치치가 준 거야?”

“네. 제가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니, 만들어 주셨어요.”

“그렇구나.”

 

단정한 무표정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웃는 얼굴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따뜻하지만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써니보이가 별말 없이 손을 내밀자, 에밀리아는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둘은 꼭 남매처럼 손을 잡고 서재로 들어왔다. 그 꼴을 본 치치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읽던 책을 덮지도 않고 책상에 툭 내려놓았다.

 

“뭐야, 왜 둘이 같이 와? 자코모는?”

“나중에 조제페 씨와 함께 올 거야. 파파도 조제페 씨와 있어.”

“…그래?”

 

그럼 다 같이 오지 왜 본인만 먼저 온 걸까.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치치의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났다. 써니보이는 그 솔직한 얼굴에 소리죽여 웃어버렸다.

하지만 이런 얼굴을 치치가 보면 전력으로 싫어하겠지. 그래서 그는 일부러 에밀리아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척했다.

 

“에밀리아, 조금만 기다려주겠어? 곧 오빠랑 아빠가 올 테니까.”

“당연하죠. 그 정도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써니보이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에밀리아도 제법 많이 컸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여전히 귀여운 여동생처럼 보이는 건, 그가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리기 때문이겠지.

 

“치치랑 같이 놀지, 왜 밖에서 혼자 놀았어.”

 

마치 제 친오빠의 돌봄처럼 다정한 물음이다. 하지만, 에밀리아에겐 자신보다 더 걱정되는 이가 있었다.

비록 소리 내어 떼를 쓴 건 자신이지만, 정말 아버지들을 따라가고 싶은 건 치치였을 거다.

잠깐 고민한 에밀리아는 히죽 웃더니 뻔뻔하게 거짓말했다.

 

“치치 도련님이랑 노는 건 재미없어요. 매일 책만 읽고.”

“뭐, 뭐?”

“왜요, 사실이잖아요?”

 

치치는 에밀리아의 태도에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좋다고 장미꽃도 받아놓고 이제는 저렇게 대답하다니, 얼마나 황당한가.

당황하는 치치와 달리 에밀리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아, 다음에는 써니보이 도련님이랑 놀고 싶다. 다음에는 치치 도련님이 가고, 써니보이 도련님은 남아 주시면 안 돼요?”

 

‘아.’ 그 말을 들은 써니보이가 왜 에밀리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눈치채고 슬쩍 윙크했다.

 

“그럼 그렇게 할까. 나도 에밀리아와 놀고 싶으니까.”

“허, 잘 논다. 잘 놀아.”

“미안해, 치치. 다음에는 네가 파파와 함께 가줘.”

 

두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눈치챈 걸까.

써니보이와 에밀리아를 번갈아 보던 치치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획 돌렸다.

 

“…네가 부탁하면, 어쩔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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