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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후. 언제나 그래왔듯이 도서관으로 가 나머지 공부를 하려는 아이렌이 중원에 우뚝 멈춰 섰다.

 

“……?”

 

나무 그늘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도, 많이.

작고 둥근 그림자가 바글바글 모여있는 모양새는 퍽 수상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아이렌은 그림자의 정체를 몰라 망설이면서도, 제 호기심에 못 이겨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어머.”

 

가까이 가자 보이는 건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옅은 숨소리. 자그마한 발소리와 날갯짓 소리. 그리고 그 모든 걸 덮어버리는 듯 쏟아지는 나뭇가지와 잎들이 흔들리며 내는 맑은소리까지.

자장가 같은 소음들 속. 작은 새들과 다람쥐에게 둘러싸인 채 곧은 자세로 잠들어 있는 건 자신과 친분 있는 선배였다.

 

“실버 선배.”

 

꽤 깊게 잠든 건지, 이름을 불러도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나 잘 자면 깨우기 미안해지지만, 그래도 잘 거라면 좀 더 편한 곳에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아이렌은 관심이 없는 이들에겐 냉담하지만 제가 챙기는 사람이라면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지금 실버를 내버려 두고 가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

 

옆에 조심스레 앉아 몸을 흔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실버는 미동이 없다.

주변 동물들은 아이렌을 말릴 생각은 없는지 멀뚱멀뚱 그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깨어나실 거 같은데.’

 

날씨도 나쁘지 않고, 바람도 차갑지 않다. 몸이 약한 사람이면 몰라도 건강하고 튼튼한 실버가 감기에 걸리진 않을 거다.

결국 애써서 그를 깨우지 않기로 한 아이렌은 이왕 자리 잡고 앉은 김에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기로 했다.

 

‘정말 조각상 같네.’

 

그늘 속에서도 빛나는 머리칼은 은처럼 부드럽게 빛나고,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은 둥글게 말려 올라가 툭 건드려보고 싶게 생겼다. 대리석 같은 흰 피부와 단단하지만 거칠지는 않은 손. 그리고 길게 뻗은 목까지.

마치 해부라도 하듯 낱낱이 그를 뜯어보는 아이렌은 누군가가 제게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거기서 뭐 하고 있나?”

“아.”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까만 뿔과 선명한 라임색 눈동자. 정갈하게 다려진 디어솜니아 기숙사의 교복.

말을 걸어온 이는 분명 디어솜니아 기숙사 장 말레우스 드라코니아였다.

 

“실버 선배 데리러 오셨어요?”

“아니,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

 

말레우스의 시선은 실버를 바라보는 건지 아이렌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이렌은 움직이거나 더 말을 걸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그를 관찰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왜 묻지?”

“그냥 뭐라고 할까…….”

 

뭐라 말하려던 아이렌이 입을 닫았다.

어쩌면, 자신이 괜한 참견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신경 쓰이는 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입만 뻐끔거리던 아이렌은 결국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 한 말인데, 아무 일도 없다면 다행이에요.”

 

그 말을 들은 말레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보아하니 아이렌의 관찰이 잘못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너는 꼭 동물 같군.”

“네? 뭐, 인간도 굳이 따지면 동물이긴 하니까 맞는 말 아닐까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지만…….”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다른 개체의 감정을 읽어낸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함께 사는 개나 고양이가 동반자의 우울함을 눈치채고, 야생 동물이 제게 다가오는 인간이 가진 적의를 읽어낼 수 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지.

말레우스가 말한 동물 같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자신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한 감정을, 단번에 읽어버리는 그런 점이 닮았단 거였는데.

 

‘…뭐, 설명해 줄 필욘 없겠지.’

 

그래. 사실은 기분이 상했었다. 실버와 아이렌이 사이좋게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릴리아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진 참이었다.

릴리아는 그리 말했다. 짧게 사는 이들은 그들끼리 살아야 행복하며, 단명하는 존재에게 너무 정을 주었다가는 상처받는다고 말이다.

다 자란 자신에게 마치 아이를 가르치는 것 같은 말투로 조언한 것도 거슬렸지만, 왜 그런 말을 했는지를 떠올리면 더 마음이 불편했다.

 

“…풀벌레에게 물리지 않게 조심하도록.”

 

껍데기만 인간일 뿐, 전혀 인간 같지 않은 저 아이에게 정을 주는 게 그리 나쁜 일일까.

하지만 나쁘다고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인가. 자신은 개의치 않는다.

부드럽게 아이렌의 머리를 쓰다듬은 그는 조용히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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