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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막 앞이 희게 번진다. 흔비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몸을 파드득 떨며 지친 몸을 깨웠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다. 집에 가려고 준비하다 졸아버린 탓에 어깨와 목이 뻣뻣했다. 선잠 끝에 꿈이라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가방에 대충 물건을 쓸어 담은 뒤 안경을 벗어든 채 일어났다. 금테 안경은 뿌옇게 흐리고, 상투관 안에 모아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잔뜩 당겨 아팠다. 난세가 자랑하는 붉은 군복의 성채, 조맹덕의 진영에서 일한다는 건 높은 보수와 명예만큼 몹시도 고되다. 당장 커피와 담배를 손에 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찌뿌둥했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차가 정비소에 가 있다니. 흔비는 거칠고 빠른 발걸음으로 탕비실 문을 열어젖혔다.

셔츠, 네모난 안경, 담배 냄새, 끄트머리만 붉은 검은 머리카락. 익숙한 사내가 몸을 돌리며 그녀를 향해 환한 빛이 도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화 선생. 퇴근한다더니. 아직 안 갔어?”

“아…. 깜박 잠이 들어서. 이제 가야죠.”

“짐 싸다가? 아이고. 많이 피곤했나 보네. 천하의 화 선생이 맥을 못 추고.”

“그러게요. 요즘 몸이 예전 같지 않네요.”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무리하지는 마. 골병들어. 화 선생이 아프면 말이야, 내가 조맹덕 씨한테 깨진다고. 알아?”

흔비는 자연스럽게 종이컵에 커피를 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진궁은 가끔, 아니 꽤 자주 그녀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곤 했다. 너스레를 떠는 단단한 등짝이 피로에 짓눌려 있는 걸 뻔히 아는 사람 앞에서.

“그러는 진 선생님은 왜 아직 계세요. 야근 안 해도 된다며 좋아하시더니.”

“나야 뭐, 이런 거 저런 거 하다 보니. 잘됐네. 화 선생이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

“네….”

커피는 흔비의 입맛에 맞게 연하고 달았다. 그는 마치 조금도 의도된 게 아니라는 양, 몇 번이든 그녀의 취향을 맞추고는 했다. 단순히 커피에 들어가는 설탕이나 물의 양만이 아니라, 담배, 식성, 기억하기도 힘든 사소한 버릇까지. 진궁이 알고 있는 정보는 상당했다. 직장 동료를 향한 배려심이라고 하기에는, 눈치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면 다 고개를 끄덕거릴, 선명한‘무언가’였다. 스스로 눈을 가린 채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흔비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모르는 건, 본인의 마음뿐이었다. 흔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 선생 또 내일 업무 생각했지? 얼굴에 다 쓰여 있어. 마시면서 기다려. 나 금방 챙기고 나올게."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다 안다고 해주는 다정한 남자. 결코 무너질 일이 없을 듯한 저 애정이 흔비는 기쁘면서도 벅찼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기대하고야 마는 것이다. 바보 같고, 위선적이고 나쁜 여자. 흔비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였다. 과연 누구에게 더 기대를 걸고 있을까. 명확한 답을 주지도 선을 긋지도 않는다. 흔비는 진궁을, 그리고 그와 똑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내를 기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두 사람을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흔비는 얼굴을 찡그린 채 뜨거운 커피를 모조리 비우고 탕비실을 나섰다.

 

“이야, 아까는 그렇게 쨍쨍하더니 갑자기 비가 오네. 화 선생, 우산 있어?”

“없어요. 하나 챙겨 놓을 걸 그랬네.”

때아닌 소나기가 땅을 뚫을 듯이 퍼부었다. 집까지는 적어도 걸어서 1시간이다. 이 상태로 간다면 그녀의 머리카락은 살구색과 다홍색이 아닌 거무죽죽한 주황색과 빨간색이 되어버릴 터였다. 흔비의 푸른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며 잔뜩 물기를 머금은 하늘을 쏘아보았다.

“괜찮으면 내가….”

“자은 누님, 나오셨습니까.”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오늘 차를 안 가지고 오셨다기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 선생님도 계셨군요.”

흔비의 눈앞에 큼직한 인영이 불쑥 나타난다. 두 사람은 들어갈 검은 우산을 받쳐 든 남자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다. 도중에 끊긴 말에 진궁이 잠시 미간을 구기며 그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시간에 전 장군을 다 보고 별일이 다 있네. 오늘은 경호 안 서?”

“저도 퇴근하는 날이 있습니다. 우산이 없으신 것 같은데, 쓰십시오.”

전위가 진궁에게 내민 건 빨간색 일인용 우산이다. 본인은 화 선생이랑 쓰고, 난 혼자 쓰든 말든 알아서 해라, 이거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찬 진궁은 일부러 느릿느릿 우산을 받아들었다.

“이것 참. 고마워서 어쩌나.”

“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님, 제가 주차장까지 모시겠습니다.”

흔비는 전위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진궁을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자칫하다가는 손에 쥔 담배를 놓쳐버릴 것만 같다. 흔비는 정말로, 이 두 사람과 동시에 한 공간에 있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팔을 내리고 있는 탓에 연기가 묵직하게 아래로 고여 흐른다. 담뱃불이 빗방울과 만나 점점 꺼져가기 시작한다. 뚝뚝 이어지는 공백 탓에 입안이 깔깔하게 말라간다. 진궁의 눈은 웃고 있지 않으며, 전위의 눈이 평소보다 좀 더 매섭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여실히 목격하고야 말았다.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전위가 흔비의 어깨를 감싸 부드럽게 긴 우산 아래로 끌어당긴다. 향수 냄새가 훅 끼친다. 그의 에스코트는 능숙하다. 이유 없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 남자. 흔비는 이 날씨에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진궁의 입꼬리가 잘게 떨린다.

"오늘은 내가 화 선생한테 점수 좀 따보려고 했더니, 영 운이 안 따라주네. 조심히 들어가."

"예. 살펴 가십시오."

"아, 참. 화 선생. 이번 주에 그거. 잊지 마."

"그럼요. 내일 뵐게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빗소리가 우산에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다.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 흔비는 곁에 선 전위를 흘깃거린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 있다. 이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흔비는 복잡한 얼굴로, 전위가 우산을 접고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너 말이야. 내가 야근이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무작정 기다려.”

“그랬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인 걸요.”

차는 주인의 성정을 닮는다고 했다. 시트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깔끔하다. 흔비는 차 안 가득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백미러에 뒤에 걸려 있는 작은 주머니를 쳐다본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살구향 방향제와, 새 차를 샀다기에 선물로 줬던 부적이다. 전위도 진궁 못지않게, 그녀에게 열의를 다 하고 있었다. 그의 방식으로. 흔비는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나서는 내내, 핸들 위에서 어딘가 불안하게 까닥대는 손가락과 잘생긴 옆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알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티가 났습니까. 그런데 제가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뭔데?”

그의 뺨이 순식간에 전등이라도 켠 듯 밝아진다.

“그, 이번 주에….”

“그냥 밥 같이 먹기로 한 거야.”

“저랑은 그런 약속 안 잡으셨는데요.”

“넌…. 아니다. 그럼 너랑도 먹지 뭐.”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어떠십니까?”

된다고 해. 된다고 해줘.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한, 진지하고 약간은 기대하는 얼굴. 흔비는 애써 입매를 움직여 호선을 그렸다.

“이미 다 계획이 있구나. 좋아.”

다음 주 금요일은 그녀의 생일이다. 흔비는 전위의 이 환한 표정을 가장 많이, 자주 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서로 깍듯하게 존칭을 쓰던 시기를 지나, 이름과 자를 스스럼없이 부를 만한 사이니까. 하지만 그가 주는 애정은, 진궁에게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쁘지만 과분했다. 이 두 사람은, 날 왜 좋아할까. 내가 연인 후보로 봤을 때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그녀는 선선히 웃으면서도 양심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렵기만 했다. 흔비는 고민을 떨쳐내려는 양 멍하니 음악 소리에 묻혀들었다. 망막 앞이 검게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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