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스티비, 네가 이 아가씨 좀 돌봐줘야겠어.”

 

그건 상당히 일방적인 요구였다. 밀린 일 처리를 끝내고 쪽잠을 자려 한 스티비는 갑자기 제 방에 나타나 명령하는 에밀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디서 거하게 싸움이라도 하고 온 걸까. 에밀리아에게선 희미한 화약과 알코올의 냄새가 묻어있었다. 게다가 당당히 서 있는 그의 뒤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면의 여자가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졸려서 그런지 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스티비는 언제까지고 멍하니 있을 수 없어 정중히 물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사정이 있어서 내가 보호하고 있는 아가씨인데, 며칠만 좀 보호해 줘.”

“아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이런 명령이라면 해 떠있을 때 말해주면 더 좋지 않은가. 보호 대상을 24시간 끼고 다닐 수는 없으니, 적당한 보호 장소와 경호를 도와줄 인원을 구해야 하는데.

어디까지나 정당한 이유로 불평하는 스티비였지만, 에밀리아는 그것조차도 말대꾸일 뿐이라 생각한 걸까.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에밀리아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어깨를 잡았다.

 

“그럼 내가 너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까? 귀여운 스테파노야.”

 

그 한 마디에 스티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이 강렬한 살기를 어떻게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에밀리아는 보체티 패밀리 안에서도 꽤 직위가 높은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보체티 패밀리에서 일한 카포의 딸이었고, 그의 오빠 또한 보스의 옆에서 일하는 솔저였으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보스의 여동생인 부티의 최측근 경호원이란 거였지.

즉, 스티비에게 에밀리아는 타협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뜻이었다.

놀라서 정신이 확 든 스티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래. 그래. 역시 스티비 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니까. 내 손님이니까, 잘 좀 봐줘!”

 

어쩔 수 없는 긍정이라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일이 풀렸기 때문일까. 에밀리아는 제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태연하게 스티비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에 입 맞췄다.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맞춰주기 힘든 사람이 있을까.

 

불같은 면과 얼음 같은 면이 공존하는 상사의 퇴장을 지친 얼굴로 배웅한 그는 제 방에 남겨진 낯선 여인을 보았다.

나이는 에밀리아나 부티 또래 즈음 될까. 겁에 질린 건지 자신을 경계하는 건지 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자는 헝클어진 애쉬 블론드를 손으로 빗어 정리하고 있었다.

 

“저, 이름이?”

 

자신도 당황스럽지만, 아마 저쪽도 만만찮게 당황스럽겠지.

상대방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스티비는 이렇게 된 거 통성명은 해야겠다 싶어 먼저 말을 꺼냈다. 머리 정리를 대충 끝낸 여인은, 청보라색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답했다.

 

“줄리에타.”

 

작게 중얼거리듯 내뱉은 후, 이윽고 시선을 맞춘다.

정중한 상대의 태도에 경계심이 조금은 줄어든 걸까. 여성은 자신을 보는 스티비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줄리에타 로스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제법 눈에 띄는 외모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깊이가 있는 눈동자에 홀린 듯 마른침을 삼킨 스티비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럼, 로스 양?”

“그냥 줄리에타라고 불러도 됩니다.”

“아, 네.”

 

자신은 그냥 이 여자를 보호하기만 하면 된다. 말하자면, 자신들은 비즈니스 관계라 할 수 있지.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가슴이 뛰는 걸까. 한밤중에 단둘이 방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래도 맥박이 너무 거칠었다.

어쩐지 멋쩍어진 스티비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는 스테파노 로시니입니다. 스티비라고 불러주세요.”

 

통성명은 이걸로 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오늘 당장은 머물 곳을 찾지 못할 테니 제 방에서 재워야 할까. 그렇지만, 제 방에 침대는 하나뿐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스티비는, 문득 줄리에타가 소리 죽여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그냥…….”

 

‘잘 어울리는 귀여운 이름이구나 싶어서.’ 웃음기를 거둔 줄리에타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스티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바깥에서 신문을 팔러 다니던 시절에나 듣던 귀엽다는 말을 마피아가 된 지금도 듣게 될 줄이야. 에밀리아가 자주 제게 귀엽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것과 이건 달랐다. 에밀리아는 제 상관이고, 줄리에타는 오늘 처음 만난 사이 아닌가.

어쩐지 더워져서 오래 고개를 들고 있을 수도 없었던 스티비는, 그날은 결국 손님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스티비가 줄리에타가 머무를 장소와 함께 경호해줄 솔져까지 구했을 즈음. 에밀리아가 다시 사무실로 찾아와 제가 시킨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줄리에타는 쫓기는 몸이야. 전 남자친구를 쏴 죽였거든.”

 

문제는 그 자초지종이라는 게, 스티비로선 생각하지도 못한 방향이었다는 게 문제였지.

마시던 커피를 주르륵 흘릴 뻔한 그는 급히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고 물었다.

 

“예?”

“아, 참고로 그 남자친구라는 놈은 타탈리 패밀리 솔저야.”

 

이건 더 충격적인 소식이다.

스티비는 입가를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타탈리 패밀리라면, 분명 최근 뉴욕에서 활개 치고 다니는 신흥세력 아니던가. 그런데 그 조직의 솔저가 줄리에타의 남자친구였고, 줄리에타가 그를 쏴 죽였다는 건…….

 

“그럼 줄리에타 씨도 마피아인 겁니까?”

“아니. 그냥 마피아의 여자친구였었지. 그런데 그 남자친구란 놈이 글쎄 바람을 피운 거야. 그래서 열받아서 쏴버렸데.”

“아…….”

 

바람은 나쁜 거지만, 그렇다고 바로 사살하다니. 차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줄리에타도 어지간히 다혈질인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스티비였지만, 다음 이야기를 듣고 바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양다리 아냐. 여자친구만 3명에, 약혼자도 따로 있었다던가?”

“아, 그건 죽어도 싼데요.”

“동감이야. 나였으면 샷건을 쐈을 거야.”

 

저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겠지. 스티비는 웃을 수 없었다.

과연 어떤 용감한 사람이 에밀리아의 연인이 될지 모르겠지만, 미리 애도의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부하의 생각 따위는 알 리 없는 에밀리아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스티비가 타준 커피를 홀짝였다.

 

“뭐, 그렇게 된 거지. 그건 우연한 만남이었어. 나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타탈리 패밀리 떨거지들 정리하러 갔다가 붙잡혀 온 줄리에타를 만났고, 자세한 사정을 듣고 나니 도와주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이 말 또한 진심일 거다. 스티비는 알고 있었다. 에밀리아는 조금 다혈질이고, 조금 난폭하고, 많이 기가 세지만, 그 누구보다 의리 있는 여자였으니까. 곤란함에 처한 여자, 그것도 적대 패밀리에게 사로잡힌 처지라면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줄리에타 씨도 저희 패밀리에?”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우리 패밀리로 들어와 줘도 좋고, 그게 싫더라도 나와 부티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까 싶어서 거두긴 했지만.”

“아하.”

 

확실하지 않은 대답에 어물쩡 말을 끊은 스티비는 빈 잔을 타자기 옆으로 밀어두었다.

갑자기 조용해 진 그를 수상하다 생각한 걸까.

에밀리아가 갑자기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줄리에타는 좀 어때? 잘 지내니?”

 

그 질문에 열심히 움직이던 스티비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한숨 쉰 그는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잘 지냅니다. 평소엔 신문을 읽으시거나 라디오를 듣곤 하죠. 가끔 산타루치아 일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으음, 그래? 그럼 보수라도 줘야 하려나.”

 

무언가 시원찮은 스티비의 태도는 에밀리아의 의혹을 확신으로 바꿔주기엔 충분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귀여운 부하를 바라보던 에밀리아가 넌지시 제 추측을 던졌다.

 

“둘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예? 아니, 무슨 그런…….”

“하하! 장난이야, 장난!”

 

정말로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건수를 잡기 위해 미끼를 던진 거였을까.

어느 쪽이라도 스티비는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과 줄리에타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붙어 지내는 동안 친해지긴 했어도, 그게 다였단 말이다.

곤란해하는 스티비의 얼굴을 살피던 에밀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무슨 일 있어도 눈감아 줄게. 너는 괜찮은 녀석이니까.”

“에밀리아 씨…….”

“그럼 안녕! 추격대가 정리되면 다시 올게!”

 

저 추격대라는 건 타탈리 패밀리의 마피아를 말하는 거겠지.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음을 실감한 그는 에밀리아를 배웅하고 온 후, 책상에 앉아 차분히 줄리에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한 거였구나.’

 

줄리에타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제가 하는 일을 뭐라도 하나 도와주고 싶어 했고,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게 아니냐며 차를 내려주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정함과는 별개로 늘 어딘가 경계심이 강해 보이는 면모가 보이곤 했는데, 저런 사정이 있었다면 이해가 갔다.

 

‘좋은 사람인 거 같은데, 어쩌다가 그런 쓰레기를 만나게 된 걸까?’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인연. 물고기와 함께 잠든 전 애인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원래 사랑이라는 건 불합리하지 않던가. 괜히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그래,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 자신은 에밀리아가 들려준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해지는 걸까.

 

‘우리 패밀리에 들어와 주지 않으려나.’

 

제 감정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줄리에타가 계속 제 곁에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티비는 빈 커피잔을 매만지며 옅게 웃었다.

@COPYRIGHT 2021 Esoruen. ALL RIGHT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