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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간에서 마를렌 르 블랑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았다. 의류 재벌 르 블랑 가문의 상속녀, 르 블랑 부티크의 대표 레이라 르 블랑의 딸, 불운하게 목숨을 잃은 라울 르 블랑의 곁에서 훌쩍이던 소녀. 대부분 신문 기사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뽑힐만한 것들이고, 대중의 관음적인 욕구를 긁어주는 것들이었고, 무엇보다 마를렌의 일부분만을 조명하는 호칭이었다. 그들에게 마를렌은 부잣집에서 태어난, 당돌하고도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마에 불과했고 특별히 다른 면모를 찾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와 하는 비눗방울 놀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잔뜩 쌓아놓은 옷감 속에 파묻히는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고, 비싼 발레 공연보다는 부모님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걸 좋아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그녀를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세워뒀으면서 정작 마를렌 르 블랑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멀리서 화려한 불빛으로 만들어진 모습만을 탐닉하여 사람으로서는 대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마를렌, 더 나아가 르 블랑 가문 그 자체는 하나의 연극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그래서 자연히, 세간은 마를렌과 그녀의 가족을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처럼 관조했다. 정말로 그들이 궁금한 사람은 손에 꼽았다. 극장에서 나오면 무대 위의 인물들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유명인의 사생활을 유희(遊戲)로서 즐길 뿐이었다. 유리 전시장에 앉아있는 인형 같아. 마를렌은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보며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인형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듯이 기자들은 마를렌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마를렌도, 그들에게 다른 걸 바라지 않았다.

* * *

    집을 나와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닌데, 어른들은 마를렌의 가출을 한때의 일탈 혹은 배부른 투정이라고만 생각했다. 마를렌은 본디 영리했지만, 주변 상황으로 인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시선에 민감했고,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바라는 모습이 어떤지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생글생글 웃고, 가끔 조용히 구석에 앉아 있아서는 “어린 꼬맹이”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마를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왔는데, 새로울 것도 없었다.
   마를렌은 경직된 집안 분위기가 싫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어머니가 매 순간 긴장했고 언제나 굳은 표정으로, 빈틈을 주지 않기 위해 벽을 세웠다. 마를렌은 그런 어머니가 너무나도 낯설었고, 슬펐다. 
   하지만 분명 이전 행복하던 시절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어머니도 지금처럼 독선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마를렌은 언제나 고뇌로 구겨진 어머니의 미간을 떠올리다가 결국 집을 떠났다. 르 블랑 부티크를 경영하고, 불행한 재벌가의 이야기를 파헤치려는 기자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어머니는 그러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니 그녀를 대신해서 마를렌이 추억을 되찾고자 했다.  
   그러다가 빌로시티에서 샬럿을 만나고, 헨리 밀러의 집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가 수장으로 있는 헬리오스에 소속하게 되었다. 능력자들의 효용을 우선시하는 그조차도 이를 공식적으로 요청할 정도로 냉담하지 않았지만, 마를렌 본인이 고집을 부렸다. 아직 어렸지만 마를렌은 “르 블랑가의 상속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그런 대우를 불편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최대한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그 위치를 활용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여전히 그녀를 어린아이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한 번이라도 그녀를 공성전에서 만난이라면 마를렌을 어엿한 능력자로 대우했다.
   그래서일까, 마를렌이 다이무스 홀든을 좋아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다이무스는 냉정하고 차가워 보이는 사람이고, 스스로 그 평가를 바꾸려고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이무스는 마를렌을-아직은 미숙한 수준이었지만-능력자로 대했고, 어린아이라고 얕보지도 않았다. 그런 ‘멋진 어른’에게 인정받는 기분은 소녀의 마음에 설레는 파도를 빚어내기 충분했다. 가끔 놀아주지 않을 때는 속상했지만 그가 바빠서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지만 마를렌이 그러지 못할 때면 다이무스는 책상 위에 놓인 사탕 그릇에서 사탕을 두 개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곤 했다. 하나는 마를렌의 몫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를렌과 항상 함께 하는 샬럿의 몫. 본인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책상에 사탕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런 배려는 다른 사람-그것도 단 걸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마를렌은 달콤한 사탕을 아주 좋아했다. 좋아하는 다이무스 아저씨에게서 받은 사탕을 입안에서 살살 굴려보면 속상하던 응어리도 그 달콤함과 함께 어느새 녹아내렸다.  
   마를렌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다이무스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요.”라고 할 만큼 그를 동경했지만, 소녀의 사고방식은 그 이상을 떠올릴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이무스의 왼손에 반지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는커녕,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덜 놀랐을까. 마를렌 르 블랑의 세상은 비눗방울과도 같았다. 표면장력에 의해 동그랗게 방울이 지는 거품은 표면에 만화경처럼 화려한 빛이 흘러갔지만 안타까울 정도로 연약했다. 
   시작은 다이무스의 향수였다.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그 위로 오렌지 냄새가 향긋하게 스쳐 지나가는 그 향수는, 조잡하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고 지나치게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를렌은 그 향수가 제법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평소 ‘다이무스 아저씨’에게서 나는 냄새는 가죽과 잉크 그리고 묵직한 머스크향으로, 거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향을 몰고 온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언제나처럼 문에 노크하고 다이무스의 허락을 받아 그의 사무실로 들어선 마를렌은 이질적인 광경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이무스와 함께 있는, 그 낯선 여인은 녹색 눈동자에 애정과 다정함을 담아 그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연갈색 머리카락에 햇살이 닿으면서 그 주변이 은근한 금색으로 물들었다. 다이무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줄 동안, 여성은 눈을 내리깔아 그 손길을 받아냈다. 영리한 마를렌이 두 사람 사이의 친근한 기류를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말을 마친 여성이 고개를 들자, 사무실 문틈으로 마를렌과 시선이 얽혔다. 어머. 입가를 살며시 가리는 왼손 약지에는 금색 반지가 반짝였다. 

“마를렌 르 블랑양?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다이무스의 책상으로 다가간 여자는 익숙하게 사탕 하나를 꺼내고는 마를렌에게 건네주었다. 허리를 숙이자 둘의 눈높이가 엇비슷해졌다. 그녀의 손바닥에 얌전하게 놓인 사탕은, 마를렌이 좋아하는 오렌지 맛이었다.

“소피아 홀든이에요. 우리 그이가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소피아가 가볍게 웃었지만, 마를렌은 이 상황이 전혀 웃기지 않았다. 다이무스의 책상을 아무렇지도 않게-심지어 허락을 구하는 낌새조차 없이-만지는 것부터 울렁이던 감정은, 자신에게 내민 사탕과 잔혹할 만치 확실한 선고에 의해 터져버리고 말았다. 됐어요…. 마를렌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거절의 말을 쏟아냈다. 소피아는 그 조그마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천연한 태도에 마를렌 안에서 차오르던 감정이 와르르 쏟아졌다.

“이런 건 어린 애들을 위한 거라고요!”

    새침하게 선언한 마를렌은 문을 쾅, 닫으며 방을 나갔다. 마를렌 르블랑의 세상이 비눗방울처럼 터져버리고 소피아 블랙웰 홀든이라는 송곳이 그 범인이었다. 원래는 그리도 좋아하던 오렌지 향도, 오렌지 맛도 전부 싫어졌다.

* * *

“어머나.”

    문을 닫고 나가는 흑발의 끝자락으로 시선으로 따라가던 소피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예상보다 훨씬… 말괄량이네요. 다이무스는 짧게 키득거리는 아내에게 장갑을 돌려주었다. 이번에 헬리오스에 들어온 소녀들을 소피아에게 소개해준다는 계획이 엉망이 된 터라,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다이무스의 책상에 사탕 그릇이 자리할 이유가 없었을 거고, 어린아이들-특히 소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던 다이무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것도 소피아였으니 그녀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소피아 본인도 마를렌과 샬럿을 만나고 싶어했기에 순조롭게 일이 진행될 것으로 여겼다. 

“마를렌에게는… 내가 이야기하겠다.”

    다이무스가 짧게 한숨을 쉬며 아내에게 말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마를렌은 흠잡을 데 없이 예의를 지키는 아이였다. 가끔 가까워진 어른들에게는 어리광을 부리곤 했지만, 오늘과 같은 돌발행동은 처음이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소피아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명랑한 웃음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려 퍼졌고, 다이무스는 그녀의 웃음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고는 침착하게 물어보았다. 왜 그러지.

“저런, 다이무스. 당신은 소녀의 마음 같은 건 정말 모르는군요.”

    그렇게 말한 소피아는 장갑을 받아든 뒤, 뻔뻔하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언의 부탁을 들은 다이무스는 아내의 손등을 따라 일렬로 길게 달린 단추를 하나씩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 작고 둥근 단추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꿸 수 없는 단추들이었다. 부러 이렇게 성가신 장갑을 끼고 온 아내의 저의를 짐작해보던 다이무스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은 기꺼이 넘어주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피아가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하나씩 진주 단추를 풀어줬듯이, 하나씩 채워주었다. 마침내 단추를 전부 채운 그는 손목 안쪽을 쓰다듬고 아내의 손등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앞으로 나도 르 블랑양과 친해졌으면 좋겠어요.”

    아주 조금, 아쉬움을 담은 소피아가 속삭이며 열 살, 혹은 열한 살 정도 되어 보이던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윤기 나는 흑발을 양쪽으로 귀엽게 올려묶은 아이의 갈색 눈동자에는 다부진 고집이 맹렬하게 빛났다. 그런 감정은 자신이 이미 다 컸다고 생각하는, 의젓하고 성숙한 아이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종류였다. 소피아에게는 익숙한 감정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소피아가 늘 거울에서 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경계심이 나중에 얼마나 외로움을 안겨주는지도 알고 있었기에, 소피아는 마를렌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 어른들에게 어리광을 부렸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다이무스는 생각에 잠긴 소피아를 내려다보다가 책상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정성스레 껍질을 까서 아내의 입에 물려주었다. 

“괜찮을 거다.”

    갑자기 입술에 닿은 매끄러움에 잠시 눈을 깜빡인 소피아는 입을 슬쩍 벌렸다. 그리고 입안에 번지는 달콤함에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요, 당신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거겠죠. 그리 속삭인 소피아는 발끝으로 서서 남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오렌지 맛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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