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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시봉

자발라 드림

[P. M. 5時 38分]

눈은 사각의 틀에 갇힌 풍경을 잘 보여준다. 천천히 걷고, 바삐 움직이면서, 쉬면서, 좋은 것을 보고, 싫은 것을 보며, 겁에 질려 달리는 지금도 눈은 사각을 보였다.

달리는 건 자신 있지만 조금 전에 겁을 먹은 마음과 당황으로 가득 찬 머리와 턱까지 차오른 숨에 허우적거린다. 흔들리는 시야를 기어코 돌리면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이 흔들림 없이 허공에서 춤을 추는 게 사각 안으로 들어왔다. 칼날은 저를 잊지 말아 달라, 부디 알아 달라, 상처받은 누군가가 절규하듯 호소하듯 물결처럼 출렁거리며 돌아보는 관객을 향해 하염없이 자신의 존재를 뽐냈다.

아이는 넘어지고, 구르고, 휘청거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찧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 언뜻 보인 손바닥엔 핏방울이 호수처럼 잔잔하게 고였다. 분명 피를 보았는데 정작 물 냄새가 느껴지면서 머리가 무거워졌다. 칼날은 여전히 머리를 노리며 날래게 달려들었고 아이는 그 집요한 고집을 끊어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간을 보내야 해. 아이는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을 보지도 확인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발을 헛디뎌 넘어짐과 동시에 마음을 졸여오던 정적이 달아났다. 아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을 햇볕에 반사된 반짝임이 눈을 파고들었다. 물 냄새는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물기를 가득 품고서 출렁거리는 끝이 갈라진 꼬리는 아름답고도 추악해 어린 마음을 충분히 흔들어 놓았다.

“…귀신.”

아이가 말한 대로 그것은 귀신鬼神. 머리에 금줄과 외알 안경이 휘감겨 있고 푸른 피부의 꼬리는 허리 부근에 달려 허공을 헤엄쳤다. 아이를 보호하듯 줄무늬가 그어진 기다란 팔을 뻗은 귀신의 이름은 반야半夜. 아이에게 칼날을 겨누었던 귀신, 나아가 사신死神의 이름은 무명無命.

반야를 보자 반가움이 들고 서러움을 느낀 무명은 관절을 꺾어가며 칼날이 달린 팔을 내질렀다. 반야의 어깨에 칼날을 꽂고서 거칠게 비틀었다. 그러나 물속에 손을 휘적거리듯 자극적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명의 미끈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반야는 미소를 지었는데, 무명과 마찬가지로 반가움이 들고 서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는 가까이 다가온 딱딱한 팔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째깍.

째깍.

아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를.

반야의 얼굴을 뒤덮은 뚜껑이 열리면서 그 속에 있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갔다. 또한, 주위도 함께 어두워졌다. 아이가 처음 반야에게서 본 빛과 대조되는 ‘풍경’을 이루었다. 밤눈이 밝던 아이는 그것을 마주한 무명이 점차 바스러지는 것을 지켜봤다. 무명은 아이가 느낀 어둠과 다르게 눈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사라졌다.

「다친 곳은. 없니.」

반야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서 읊조렸다. 아이는 반야의 목소리를 듣자 깊은 반감을 느꼈는데, 아이는 예전부터 타인과 대화하는 걸 꺼렸다. 설령 그것이 모르는 귀신이라 할지라도. 해서 아이는 내민 손가락을 피하고 일어나서 반야를 내려다 봤다. 그때까지 반야는 꼬리를 움직이는 것도 멈추고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녹태綠苔는 입안의 혀를 잘근 씹고 말했다.

“없어. 없으니까 이제 그만 봐.”

반야의 시선이 녹태의 왼쪽 손으로 향했다.

“없다고.”

상처가 없다는 건지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건지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은 녹태는 외알 안경에 반사된 빛을 일부러 무시했다.

이전부터 귀신들과 엮여봤자 좋을 것 하나 없었잖아. 허구한 날 쫓기고, 머리나 가슴을 위협받고, 이렇게 말을 붙이면서 심장을 빼앗길 뻔했던 적이 여러 번 이어졌잖아. 그래서 귀신을 싫어하는 거고… 아, 믿는 귀신은 있어. 오늘 내가 가려고 했던 하늘색 지붕. 그 집에 있지. 내가 믿는 그들이 한 말이 진심이고 진실이라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 지켜줄 수 있다, 도 아닌 지키겠다, 도 아닌, 지킨다. 그렇게 다짐한 그들의 마음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여전히 제 눈치를 보고 있는 반야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파르르 떨며 올라간 눈썹이 내려가고, 둥글둥글한 얼굴 위로 유순한 표정이 드러났다. 제 자리를 놓친 가방을 어깨에 멘 녹태는 반야를 힐끔 보고는 먼저 등을 보였다. 반야는 녹태가 정확히 열여섯 걸음을 걸은 뒤에야 일어나 뒤를 따라갔다. 가까이 다가오면 말을 붙여볼 생각을 한 녹태였으나 반야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까닭에 하는 수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난히 목소리가 울려 새삼 자신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있잖아, 이름이 뭐야?”

「반야. 반쪽(半)과 밤(夜)을 써서.」

“너도 이름에 뜻이 있어?”

「너도?」

“내가 아는 귀신들 말이야, 다들 이름에 뜻이 있거든. 음, 이름이 있는 이상 뜻이 있겠지만.”

반야는 문득 그리움이 들어 물었다.

「나에게도. 그런 말을 해준. 귀신이 있었는데.」

“그래? 누군데?”

반야는 처음으로 녹태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봤다. 몽글몽글하게 피어난 구름 조각이 바람을 탄 듯 유유자적하게 흘러갔다. 그이도 저와 같은 푸른색이었지. 기억을 더듬자니 아이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네가 말한 귀신의 이름이 어떤 한자를 쓰는지 모르지만, 얼굴이라도 보고 가. 혹시 모르지, 아는 귀신일 수도.

녹태는 얼마 걷지 않아 언덕길에 들어섰는데 등이 부풀어 오르고 사선으로 뻗은 길을 잘도 걸어 나갔다. 땅이 솟아오른 덕에 과자처럼 힘없이 부서진 시멘트 조각 사이로 흙과 풀이 보였다. 고운 흙길 양옆으로 자리를 잡은 나무들은 낙엽을 바닥으로 하늘로 행인에게로 흩뿌렸다. 듬성듬성 길 가운데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는 행인의 다리에 부딪혀도 제 모습을 유지했다. 둥그스름하게 몸집을 키워 나무에 매달린 담쟁이는 하늘하늘 그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아는. 그이라면. 곤란한데.」

“왜?”

「볼 낯이. 아예. 없단다.」

고운 흙길은 점차 넓어지고 주변이 풀들로 무성해졌다. 이젠 발을 딛는 곳마다 풀에 걸렸다. 발길이 완전히 멈춘 곳은 중심부라도 되듯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하여 빙글빙글 돌며 보기에 적당했다. 앞을 기준으로 왼쪽엔 호수가, 오른쪽엔 하늘색 지붕을 얹은 나무집이 있었는데 우거진 대나무 숲이 그 주위를 감쌌다.

“그 귀신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어?”

「참으로 고왔다. 매 순간이. 찬찬했단다.」

“좋은 느낌이었어?”

「어찌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물매화가 가득 피어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을 오르고 문 앞에 멈춰선 녹태가 반야를 뒤돌아봤다.

“그럼 보고 가.”

반야는 녹태의 시선을 흘려보냈다.

“좋은 느낌이라며, 완전히는 아니지만 좋은 거라며. 왜 안 봐?”

「그이가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두렵단다.」

“좋은 느낌을 준 상대를 만나면 기쁘지 않아? 애초에 네가 말한 귀신이 내가 아는 귀신인가는 모르지만….”

[P. M. 6時 1分 14秒]

그리 말한 녹태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반야는 슬쩍 하얀 문양이 장식된 나무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꼬리를 한번 움직여보았다. 고요한 마음과는 다르게 꼬리는 매우 가볍게 그리고 호수처럼 잔잔하게 위아래로 굽이였다.

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 아이가 말한 귀신 여럿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이름에 뜻을 가진 귀신들을. 그리고 그이도 있지. 서로 말한 인물이 다를 수도 있지만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좋은 느낌이 드니까.」

[P. M. 6時 8分 00秒]

철제로 된 손잡이를 당기자 묵직한 감각이 팔을 타고 기다란 손가락을 울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느껴지는 온기는 머리를 울렸다. 뚜껑을 열지도 않았는데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 자신의 몸과 마음이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아 아찔했다. 온기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뒤섞인 신발장을 지나치면 볼 수 있는 나무문 너머에 있었다. 잔잔하고 어색한, 그런데도 포근함이 느껴지는 온기에 이끌린 반야는 이번엔 손잡이를 빙글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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