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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할 말속을 가다듬고, 사랑에 작고를 고하고, 소식을 끊었다. 이경은 현재이상에 기대감을 걸지 않는 사람이었다. 약정한 기간 전에 기다리는 사람이 올 걸 기대치 않는 사람, 방갈로 근방을 거닐다 안면을 튼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그녀에게 우연이 짓는 낯빛은 기대감이 없는 잿빛이었다.
현재 이상을 바라지 못할 사람이라고 해야 어울리리라. 끝이 타올라 속불로 발화해진 종잇깃이 그렇듯이. 다 타버린 재를 들쑤시고 후후 남은 불씨를 속속들이 찾아봐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 타버린 잔흔이었다. 잿속에 사르락거리는 불씨가 남아 있다한들 공연 종이의 남은 구석을 삼켜 온미함이 될 것이며, 덜어낼 진 속이 없는 잿더미로 삭되버릴테니.
외창에 들어선 빗줄기가 방안의 가림막까지 쓸려 들어왔다. 빗줄기가 방안에 흘러들어 온 걸 창틀주위에 번진 빗망울을 보고 알았다. 외벽에 침윤된 물줄기는 벽을 습기가 진작하도록 물들였다. 둥글게 모여있던 빗방울은 창문 양편에 흐드러졌다. 창문을 닫고 버티칼을 치는 걸 태이경은 깜박 잊어버렸다. 이전에는 올곳이 눈으로 보아온 풍광이 귓결너머로 외치듯 쓸려들어 왔다. 조망하며 봐온 세상이 말속이 귓결에서 갈라지고 굽이치며 들어오듯이 파고들었다.
이경은 시선을 꿈벅거렸다. 남성이 옴짝 손을 움켜쥠에 따라 덩달아 손마디 사이로 파고들어 오는 열기가 없었다. 소록 부족한 열기가 마음결에서 시리게 올라와 이경은 잇새를 살풋 깨물었다. 입줄기 새로 성근 감각이 파고들었다. 눈두덩 아래에 입술을 잔잔히 붙였다 떼는 일상속 인사도 없었다. 아침마다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면서 이맛잇에 뜨겁게 부푼 숨결을 붙여내던 속닥거림도 없었다. 둥글게 솔아나온 이마에서 시작해 입술 끝을 삼키듯이 깨물다 놓는 다망함도 없었다. 채워졌을 시간이 텅 비어져서는 공허한 소리만을 잔잔히 올망거리며 선회했다. 이경은 반쯤 허무감에 잠긴 신경으로 책을 넘기면서 이 지나올 길 없는 시간을 채웠다. 향할 곳 없는 시간은 무미했고 그녀는 이 무감함이 그녀가 처한 현재를 적실라, 눈을 내감았다. 잠이 깨 세수를 하고 몸을 씻어 평소와 같이 일상을 꾸리고도 정작 삶은 진전하지 않았다. 물러서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듯이 삶은 거리속 수풀이 된 것처럼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은 소슬했다. 이경은 제 손을 마주 깍지끼고 등에 붙였다. 잔열이 남았다. 매일같이 행해오던 일상이 오늘은 낯설었다. 한달 전에 쓴 주제를 종이에 되풀이 해 쓰는 듯이 익숙하면서 생소했다. 한달 전과 지금을 비할시 책력이 한 장 넘어감이 이경이 체감할 기억일텐데. 시간이 지은 뼈대는 골자가 무너지고 삭풍에 제 자신을 잡힐길 없이 깎아왔거늘 살아있는 것처럼 굴었다. 시간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살이 붙여지고 이야기를 말하는 과거가 있었다고, 과거에 사는 자가 그렇듯이 헛짐작을 하듯 자기주장을 했다.
창문을 닫고 버티칼을 쳐야한다. 둥그렇게 솟은 외창문을 닫고 창문 근방에 퍼뜨려진 빗망울을 닦아 내야 했다. 마구잡이로 번져진 빗망울을 하루바삐 걷어 내야 했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테라스에 나가 건조대에 올려놓은 빨랫감을 걷어내어 나무바구니에 담아내야했다. 빨랫감에 고정해둔 집게를 끝을 잡고 떼어내서 바구니에 담아 놓아야 했다. 상의는 상의대로 정리하고, 하의는 하의대로 정리하고, 양말은 고이 접어 말아 두고, 차곡차곡 옷장에 원래 있던 자리로 물건들이 처한 곳을 결정해줘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만, 유독 이마가 서늘히도 느껴져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이경은 있었다. 만새가 더이상 들어질 것도 파고들 곳도 없는 곳으로 덮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홀연함도 뚜렷함도 없다. 명민함도 흐릿함도 없다. 중압감도 가벼움도 없다. 현재 당시를 상기하는 의무감에 시선이 빨랫감이 있는 테라스로 향했다가 도저히 떼어지지 않는 몸에 이경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눈을 깜박였다가 외탁에 둔 핸드폰으로 시선이 향했다. 제 손을 양껏 뻗어 손가락 끝으로 통신자 목록을 훑듯 내렸다. 이경은 통화목록을 아무렇지 않게 내리다 어제까지 통화한 한 사람에게로 시선이 가 멈췄다. 30초, 1분 30초, 20초. 마지막 통화시간은 그와 이별을 고하기 위해 따로 약속장소를 잡기 위한 필요였다. 향할 길 없이 부재중일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영 서로가 처할 부재를 약속하는 시간은 음악 하나를 끝내 들을 수 있는 시간보다도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