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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이별이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중-

 

질문에는 해당하는 답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관계의 종식일지언정. 답을 내놓는 상대는 입을 홀쭉 닫을 수는 없을 터인데. 외벽간을 가로지르는 회랑위 불이 꺼지듯이. 침잠한 안개가 내려 숲속에 들어선 서로를 간파해내지 못하듯이. 침묵에 닫아진 채로 긴 시간을 보내온 그들은 속내를 터놓지 않았다. 답변을 향해 열려있는 외창을, 살짝 엿보일 틈새라도 보이자면 우리 각각 빗금을 내리는 걸 무얼 보았다고 할 수 있을텐가.

우리의 관계가 끝낼 때조차도 우리를 말하기가 힘들었다. 눈동자에서 흘려 쏟아뜨려져 나오는 눈물에 숨이 버거웠던가? 복받쳐 들어오는 서러움에 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울음을 참아내었던가? 우리는 아침해가 뜨고 저녁해가 지는 것과 같은 현상과 같이 서로가 변한 걸 받아들였고 이별하기를 시작했다.

그 날 날씨가 어땠던지. 비가 내렸던지, 해가 쨍쨍했던지. 추웠던지, 따듯했던지.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우로 돌아서야 건널목에 줄지어 선 집들이 나왔던가? 길을 외로 건너야 횡단보도가 나왔던가? 이름난 도굴꾼이 문물이 도열한 박물관 속 이름난 유물을 한 개 훔쳐 제 자루에 집어넣듯이 기억의 한 토막을 가져가 버린 것 같다. 없어졌으나 문물은 본 사람의 기억속엔 남아있으리라. 각각 사람들의 기억에 부분부분 자리를 잡고 남아있지 정작 미술관 한켠에 위치했었던 문물은 현재 비어있다. 한 구석이 비어버린 상실감이었다. 마음속에서 작게 움터있던 상실감은 조용히, 나지막히, 이경이 회상함을 통해 그것이 위치했음을 말하였다.

“ 잘 있어요, 좋은 사람 만나고. “

 

이경은 말했다. 별표정이 없었던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던가. 이경은 별다르지 않게 그에게 말했었다. 마지막 인사로 빙긋 웃는 눈가쪽 아래에 입을 맞추고 만다. 사랑했었다는 말 없이, 우리가 같이 살아온 시간들을 꿰듯이 되새기는 형식적인 말 없이. 서로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하는 담담한 이별이었다. 붉은 머리칼은 이경이 작게 모로 움직임에 따라 이경의 어깨선을 따라 휘돌아지다가 어깨 아래로 흐드러졌다.

“태이경보다도?”

가후는 말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를 담배를 입 끝에 물고있던 이경에게 붙여주며 말했다. 몸이 바짝 붙어지며 자연스레 이경의 눈을 쫒게된 시선이 알 수 없이 짙었다. 이경은 이후 못 볼 사람의 전안을 침묵속에 삼키듯이 제 시선속에 눌러 담았다. 보통때 그가 하는 말버릇처럼 농담과 같은 말 한마디였을 텐데. 이 한마디가 마음속을 밑바닥까지 훑고 지나갔다.

“나만큼 가형 성격 받아줄 사람이 있으련지요. 내가 하듯이 가형 성격 받아줄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래요, 그러니 가형에게 잘 대해줄테고 좋은 사람이 될 사람 만나십쇼. ”

등대 불빛이 잔잔히 부두를 타고 들어오는 바닷빛에 쓸어 올라오다가 점차적으로 들어오는 빛을 잃고 희박해졌다. 소리가 희미해진 틈새였기에 바닷소리만이 그들 서로를 쓸며 넘실거렸는지도 몰랐다. 바닷가 모래들에 상체기를 내기라도 하듯이 파도는 바닷가에 긴 진흔을 남기며 작은 숨소리를 뒤챈다. 부벽에 서 있는 그들 둘이 등대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그림자 형체를 벽에 비춰냈다. 걸음을 멈추며 서로를 본다.

두 손가락 사이에서 타오르는 담배 불빛이 점점 점멸하듯 손끝에서 사라져나갔다. 담뱃진이 바닥에 떨어진다. 사회 초년생 시절, 친구가 내심 힘들때 펴보라고 권했던 거, 살짝 입끝에 대기만 하고 끊었던건데. 옛 추억이 나아갈길도 돌아설길도 없어진 곳에 머물다가 과거에 유폐한 채 두고 온 습성까지도 그만 끌어 가지고 온 모양이다. 가후는 사람좋게 선선히 떠오른 얼굴에 입꼬리를 올리고 빙긋이 웃었다. 둘은 입 끝과 끝을 가까운 발치에서 마주하며 마치 서로가 낯선 듯이 생경함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담뱃불, 더 붙여줄까? 가후는 말했다. 이경은 담배를 바닥에 짓눌러 끄고 담뱃곽을 주머니에 담았다. 희뿌옇게 올라서는 연기에 같이 스며듬이 어울릴듯한 흘려드는 목소리로 이경은 말했다. 이경은 마지막으로 머금은 담뱃 연기 한 모금을 한 숨 크게 허공에 내쉬었다.

“참, 감잡을 수 없는 자신감이란거지요. 아이고, 이놈이 한 코 호되게 부어오르듯이 당했네요. 가장 잘 대해주고, 좋은 사람이 될 사람을 놓히고는.”

“ 그래요, 참 마지막에 띄워주실거면 진즉 입으로 비행기 날려주시지 그랬습니까. “

“ 헤어질거죠? 내가 그리 마음먹었듯. ”

가후는 수긍하는 시늉도 부정하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담백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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