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집에 놓아둔 책이 있었다. 외로 길게 뻗은 공책에 타이포가 정갈히 새겨진 걸 생각했다. 닳고 닳아 글자 껍데기가 스스럼히 벗겨진 채인 낡은 공책이 맨 윗 선반에 자리잡고 있었다. 공교롭게 상념에 자기자신을 연민하고 싶은 날이었을지여서 그리 생각이 그칠 줄 모르고 연이어지는지 몰랐다. 대화를 상호간 나누며 이윽고 귀결에 도달하고는 솔찬히 쓴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달아 붙여준 주석.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 어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지 상시 당신이 눙친 말을 거는데서 시작했었다. 펜과 펜이 종결과 시작을 같이하는 것만 같았던 필담. 성루에서 병정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식을 주고받으려 봉송을 거듭 전달하면서 가뭇한 연기를 피어 올리듯이 그랬다. 통할 수 없는 간격을 느끼면서 대강 잡히는 느낌만을 얹어낼 수 있었다. 음성이 든 파동이 낱낱이 흐트러져 말이 흩어져 버리는 것을 수신호로 대체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는 필담이 마음을 갈음할 수단이었다. 이경은 반듯 정돈된 수화기를 들고 그에게 통화를 걸었다. 더 미련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실상은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은 채 소화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달칵, 전화를 든다. 들었다가 전화선을 꼬며 만지작거리다 덜어지지 못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곤란함에 애꿎은 볼을 손가락 끝으로 긁적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경은 차차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간을 걸어가면서 덜어내지 못한 초조한 기색을 발끝에서 내보였다. 자신이 내두를 말이 없어 방 안을 그침없이 서성이는 자신이 그랬다. 방 안을 거닐다보니 머리속이 지끈거리게 하는 생각을 내려놓기는 커녕 커져가는 생각에 발에는 점차 힘이 실렸다. 처지를 한탄하는 한숨이 입끝에서 비집어 새어나오고 말았다. 고민해봤자, 더 그에게 말을 전할 수 없다는 끄트머리에 도착할 뿐이리라. 고심끝에 이경은 겨우 연락을 취하고 책을 가지러 간다고 언질했다.
*
이경은 책꽂이에 책등이 일렬로 맞춰진 책과 같이 삶에 있어 정돈과 단정함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 졸업 한 이후로 쉰 적이 까마득한 삶에 녹아든 질서정연함이 그녀가 드러낼 삶의 결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몇년 전 호기롭게 들어 선 첫 직장이 직장인 복지를 챙겨주는 척하면서 사람을 부리는 블랙기업이었으니. 전시에 사람은 사람다운 생활을 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려 들어도 365일중 360일 야근은 분통이 터지다 못해 관자놀이에 열이 올라오는 빈도의 양이었다. 사장은 제 영욕을 명분으로 덧씌우는 방안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편달을 달성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응방식을 선택하는 사내 방침으로 퇴근 못 하기가 잦았다. 모두가 상시 바삐 굴어 퇴근 못하는 직장 분위기에서 바득바득, 상시 워라벨을 고수하고자 하는 직장상사가 제 선임이었던 것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그가 처리하지 않은 업무가 어디 가겠는가. 결제가 필요한 서류는 스스로 펜촉에 잉크를 칠해 저를 먹칠하지 않으며, 서류에 자아가 있어 업무를 재편해오라고 피드백을 주지도 않는다. 이가 이경의 몫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내에서 고용한 요리사가 있으며 사내 숙소가 있어 하루 마무리를 막사에서 보내곤 하는 그녀에게 시간은 철칙이었고 공연한 낭비는 달밤에 진 어둠이 짙어지는 결과를 초래해 삶 자체가 질서정연했다.
그러니 정해진 자리에 두지 않았을리가 없을 텐데. 키를 훌쩍 넘어서는 곳에 위치한 서고에 손을 뻗느랴 동작이 흐트러져 귓가에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이경은 손끝으로 쓸어 넘겼다. 끙, 속앓이를 하고는 위치 색출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고민했다. 오자서 근방에 있었던가? 하은주 황제시대를 정리한 책 근방에? 노자서 근처에? 풀썩 한쪽 다리를 바닥에 비투름하게 짚은 채 관자놀이를 지끈 쓸었다. 책장을 펼쳐내리고 책을 들었다 꽂았다를 반복하다가는 이경의 눈길이 한 책에 가 닿았다. 책등 비늘이 갈라지고 벗겨진 것이 녹록히 긴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아 반파된 듯한 책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훌쩍 키를 넘는 곳에 위치한 책에 손을 뻗느랴 품에 가득 담은 책을 부둥켜 이고가는 사람마냥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거렸다. 이경이 자신을 마주하기 곤란함을 고려했던지 자리를 피해 옆 방에 자리잡고 있던 그는 그새 방에 넘어와 있었다. 고생이 많다면서 입꼬리를 비죽 솟아 올린 채 천천히 이경에게 다가서고는 흔들거리는 의자를 잡아주었다.
"어휴, 몇달 전에 방을 정돈했다는 소식을 일컬어주는 걸 까먹었네요."
의자를 잡아주면서 이경이 찾는 책을 주면서 하는 말이 저 소리였다. 이경은 속이 둔중히 들어찬 악기가 진 웅장한 소리가 청아한 음색이 될 정도로 진종일 채로 악기를 연주하듯이 그의 등짝을 호되게 두들겨주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으이구 인간아, 말을 진즉에 해줬으면 방을 샅샅이 살펴보지 않...."
습성이 된 말이 평소처럼 나오다 못해 반쯤 비죽 정체를 들이밀었다. 이경은 솟구친 성미를 누르려는 듯이 입에 손을 대면서 말을 함구했다.
"네, 여전하십니다."
그는 팔등을 잡아준 손을 힘없이 놓았다 부드러운 시선을 붙였다. 속된말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데 저 인간이 보이는 창은 색을 입힌 호지를 겹겹히 쌓은 것 같이 불투명해 진종일 그가 정해놓은 모습만을 보는 느낌이었다. 상대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이고 연히 회칠하듯이 무르게 구는 남성은 속내를 가림한 눈으로 웃으면서 말했다. 발걸음을 뒤로 물러나면서 내보이는 부드럽고 느른한 태도와는 달리 남성은 층층히 자신을 둘러매고 있었다.
" 사람 몸을 으슬으슬케 할 날씨지. 겨울 감기에 콧등도 샛붉어질라. 날이 오늘따라 유독 춥고 지금 눈도 내리니 잠시 머물러 있다 가는게 어떠냐는 거지요."
이경은 눈을 까무룩 꿈벅거렸다. 받아칠 말이 입끝에서 맴돈 채로 점차 잦아들었다. 그와 이경이 연인이었을 때였다면 그랬겠다. 상대방이 말한 실없는 소리에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서 헛웃음을 흘려내면서 이경은 말했을 것이다. "실 없는 말은 마십쇼. 어디서 뻔한 기교를 부리고 그러십니까." 라면서. 이제는 말 할 수 없으리라. 이별한 이경은 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잡아 잠깐이나마 현재에 살고싶었기 때문이었다. 절절히 자리잡은 미련에 걸린 자신이 여간 어리석게 느껴졌다. 고개를 자못 들어 시선이 향하는 외창밖을 가만 눈으로 쫒았다. 걷는데 불편함을 느낄 양은 전혀 아니었다. 되려 운치를 만끽하며 방갈로에 찍히는 발자국을 뒤돌아 볼 정도였다. 닿으면 사륵 녹을, 내린지도 까먹게 잠시 존재만을 부대낀 채 황망히 사그라질 눈을. 제 가스라미에 이겨붙는 눈을 물그러미 바라보며 떠오른 생각을 정돈하고는 말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것이었다. 이 고원에 앏게 퍼진 눈은 대번에 쏟아져 내려 폭설이 되는 법도, 응결진 덩이가 마을 구석에 눈 더미가 되어 쌓이는 법도 없었다. 이경은 마을 구석을 훑듯이 내려다보았다. 마을 곳곳에는 옅은 눈이 나 지붕결에 새록새록 눈이 쌓여가리라. 건넌 다리 근방 해자에는 잘은 눈이 고운 비단올 자락 마냥 하냥 펼쳐질 것임을. 한송이, 한 송이 자그마히 피어오르는 눈이 소담하게 그지없을 것이리라. 망망히 축조된 외성에, 정처된 외벽에, 뒷 문간에, 외로 선 책장에.미풍이 들어 퍼뜨려진 눈이 이내 공간에 멈춘 채 자리잡는 광경이 눈 앞에서 황연이 떠올랐다. 눈이 손끝에서 소록소록 녹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