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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펼친 손 끝에서 소록소록 녹았다. 첫 눈이 오는 날, 이를테면 과거 연인과 가는 눈 송이를 같이 바라본다는 것은 여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말이 헤어졌다지 금세 손을 붙들고 사랑의 약조를 재청할 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남자를 재차 뒤로하고 여정을 떠날 수 있음에도. 새털같이 가볍고 예사해 바람 한점에 흩날려 사그라질 눈임에도. 그것도 오늘은 짐을 마지막으로 빼고 정리하러 이경이 남성이 사는 집에 온 날이지 않던가. 내심 이경은 제가 미련을 버리지 못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이경을 물그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 커피 마실래?”

“...네, 눈이 그칠 동안 신세 질게요.”

거절하지 못한다. 이경은 까무룩 창 밖에 바람을 타고 제 고운 입자를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부츠를 바싹 올리고 비로드 코트를 걸치고는 곧즉 눈이 내리는 정원에 한폭한폭 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경은 수월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속는 사람이 술수를 들여다보면서 아는 속임수. 남성과 여성이 서로간 전하는 거짓말은 새하얀 눈 가운데 총총히 찍힌 자욱마냥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었다.

남자가 물주전자를 올린다.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고요해진 방 안에 새어들어왔다. 그는 손가락 새에 티비 리모콘을 끼워 들었다 내려놓는다. 전지가 나갔다며 불이 들어오지 않는 티비를 탓하며. 투명하다 못해 정답을 알려주는 거짓말은 헛웃음이 나오게 하기 짝이 없었다. 등 뒤에 장난감을 숨기고 장난감 못 봤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아이와 같이 어설펐다. 이경은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어설픈 거짓말로 진실을 말해야함을 알 것이며 그가 낸 술책에 이경은 다시금 사로잡히리라는 것을. 그는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하면서 그 날 필요한 정량의 맥락을 채워넣을 줄 알았다. 그가 바라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알리러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그들이 오늘 한 약조라는 것을.

“ 라디오 틀어도 됩니까? 어디 있는지는 말 안 해줘도 알아요. 분명 부엌 카세트 테이프 옆에... ”

“ 이 집에 물건을 놓은 위치를 나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이지요. 태이경씨는.”

“ 언제적 이야깁니까. 언제적.”

이경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고요히 웃었다. 한 시기에 빛났다 퇴락한 기억을 하루를 넘길 추억으로 삼아 웃음을 나누는 옛 연인들처럼 그들은 마주 웃었다. 슬픔도 아픔도 닳고 닳아 더는 쓰라림을 받아쥘 구석이 없는 연인처럼. 서로간 향배를 시큰둥히 바라보다 상대도 모를 힐끔거릴 시선을 던지는 연인처럼. 한가득 핀 꽃망울 한 가닥이 향초에 빠져 기분좋은 잔향을 남기듯이. 그들은 웃었다. 물 끓는 소리는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랬잖아요. 태이경씨가. 티비는 거실에 마주한 쇼파에 걸터앉아 볼테니. 이놈은 정한일에 끝장을 봐야하니 한 번 마음 먹은 일을 잘 뒤바꿀 줄을 모른다고요. 블루투스 라디오와 오디오를 거기에 놓았다가는 쓸 일이 없이 자리만 차지할 거라고. ”

“그랬죠. 가형은, 잘 알겠지만요. 상대방에게 푹 고개를 숙이는 채 해도 진심어린 적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속이 마르지 않고 자신이 원해 택한 길로 끝이나마 항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잖아요. 손에 잡아 쥔 책이 재미있든 없든 끝줄에 찍힌 점을 보고야 다음 책을 읽는 사람이니까요.”

이경은 그에게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가후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시하면서 이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튄 시선을 마른 짚더미에 튄 불씨인냥 화륵 잡아쥘 건 뭐란 말인가. 가형, 불, 불 끄십쇼. 물 끓어요. 공연 시선을 피하러 고개를 살몃 뒤로 젖힌 이경은 흐트러진 시선을 견지했다. 그는 물이 끓는 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낮춰 이경을 쳐다보았다. 그가 펼친 시선이 이경에게 다가왔다. 센서가 달려있어 저절로 불이 꺼진다는 거지요. 무안하게 하십니다. 이경은 마른세수를 하며 자신 얼굴에 손을 바싹 당겨 붙였다. 그만 속을 드러내고 말았을 실수를 하면 이경이 상시 행하는 습벽이었다. 가후는 상대를 속속이 훑듯이 들여다보는 눈으로 입을 달싹이며 이경을 쳐다보았다. 이경은 저 인간 저럴때는 못 말리는 걸 익히 알아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빙글빙글 웃는 낯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 이놈이 그랬던지라서.”

가후는 웃음을 비죽 흘리며 입꼬리를 벌려 웃었다. 이경은 이왕 다 들통난 꽁무니를 내뺌하지 말기로 했다. 이경은 한가득 자리잡은 말을 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또 가형이 목소리 듣고 싶다고 침묵에 겨워 전화할게 뻔하지 않습니까. 그리하여 요리할 때 들으라고 했죠.

물이 꺼졌고 습윤한 공기가 거실 아래 그들이 앉은 탁자에 물밀 듯이 내려오고 있었다. 습윤히 진 공기가 콧등을 건드려 이경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가후는 짧게 가다듬어진 손새를 부드럽게 쓸고는 손가락끝으로 손톱을 툭툭 두들겼다. 이경은 알았다. 자신이 주시한데로 상대가 향배를 정해 들어섰을 시에 그가 표정을 감추려 대신 행하는 습벽이라는 것을. 이 인간아. 그가 이경에게 보여낸 습벽은 이경이 방금 그랬듯 무심코 흘러나온 것이 아닌 신호를 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네 뜻을 유심히 꿰어 알아봤으니 더는 의중을 숨길생각 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뜻을 행동으로 대신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기호였다. 가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세트 옆 라디오를 한 손에 끌어당겨 가져와서는 이경에게 차츰 다가섰다. 다가오는 시선이 눈 오는 날 슬레이트에 쌓인 고요함처럼 차분하면서 정일했다. 그는 라디오에 숫자를 입력하고는 이경의 손에 라디오를 올려주었다. 라디오 에서에서 8시에 시작하는 채널 인사음이 나와 귓가에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허도 어스름입니다. 오늘 첫눈이 온 날입니다.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늘 소복히 눈 내린 날을 만끽하면 어떨까요? 첫 눈이 온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주변 사람과 소담한 이야기를 나누어보세요. 겨울이 와 꽃망울이 다 떨어졌죠. 텅 비었던 가지에 눈이 그새라 봄을 일찍히 예고하며 피었고, 슬레이트 지붕에는 살며시 눈이 피어 제 지붕빛을 덮고 있으며, 소란스러움과 이지러짐이 핀 도시에는 눈이 고요함으로 세상을 설파하고 있네요. 저는요. 다분히 눈이 개인적인 매체라고 생각해요. 눈은 소리를 방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죠. 고요하게 주위를 물들이는 눈이 내리는 날. 말을 전하는 수신인이 소식을 잠잠히 덮는 날. 질문에는 해당하는 답이 있던 걸 무마하는 날. 모든 소리가 지워진 날이에요. 종이에 가득찬 공백은 글로 물들여지기 위해 존재하듯이 이 날은 벙긋거리는 말로 세상을 채워야한다고요. 이 날, 가족에게는 안부의 말을, 친구에게는 우정의 말을, 연인에게는 사랑의 속삭임을 전달하는 건 어떨까요?

네, 8시. 오늘의 곡은...아, 허도에 사는 다람쥐네 이장님 푸들씨가 신청해주셨네요. 곡은 떠나지마, 제발. 진중해진 눈빛에 시선을 기울이다 이경은 그만 고개를 푹 아래로 숙였다. 켜진 둥근 외등빛이 새하얀 낯빛으로 그의 옷깃을 물들였다. 이경은 속내로 웃음을 삼켜야할지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입가에 새 정돈되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와 라디오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야, 가문화. 고심이 말그레 해진 눈이 그를 물그러미 쳐다봤다. 이경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다 의중에 들어선 웃음을 허심히 지었다. 못 말린다는 애정어린 체념이 섞인 채였다. 사람 하루를 당신 멋대로 단장하고 나눠 놓고 웃음짓게 할 겁니까? 이경은 시선을 바싹 붙여 그의 벙긋 벌어진 옷깃을 품으로 재차 깊게 끌어당겼다. 아, 이놈이 재롱 부려봤단거지요. 예, 더말할 필요 없습니다. 제 하루 돌려내십쇼. 벙긋 달싹이는 입을 맞추었다.

 

질문에는 해당하는 답이 있다. 침묵에 닫아진 채로 긴 시간을 보내온 그들은 속내를 터놓지 않았다. 답변을 향해 열려있는 외창을, 살짝 엿보일 틈새라도 보이자면 우리 각각 빗금을 내리는 걸 무얼 보았다고 할 수 있을텐가. 그럼 어떤가? 해당하는 답을 찾을 이유가 없는 순간도 때로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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