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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먹은 날이 길일이라고 했던가? 유난히 청렴한 하늘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이대로 오늘 하려는 일이 잘 진행되기를 바라면서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입구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몰래 훔쳐본 가게 안에는 예상대로 금발의 알바생이 보이지 않았다.

계획의 첫발이 무사히 통과한 것에 미하루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상단에 달린 종이 울리자 손님에게 낼 커피를 만들고 있던 여직원이 하이 톤의 목소리로 반겼다. 발랄한 목소리를 안내 삼아 미하루는 저번에 앉았던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여직원이 만든 커피를 손님에게 갖다주는 사이 가게 안을 살폈다. 점심이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막 들어온 자신을 포함해 대여섯 정도만 있었다.

 

“어? 저번에 오셨던 손님!”

“아, 네… 저번에 너무 편하게 있다 가서 다시 왔어요.”

 

메뉴판을 건네러 온 여직원이 자신을 알아보자 미하루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속으로 예상보다 쉽게 풀릴 거 같다며 승리포즈를 취했다.

 

 

 

혼자 온 것을 배려한 건지 아니면 본인이 심심했는지 에노모토 아즈사라 자기소개를 한 여직원은 미하루가 부탁한 커피를 꺼내고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업무시간인데 괜찮냐는 질문에도 그녀는 지금처럼 손님이 적을 땐 괜찮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하루 역시 그녀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야 했기에 절로 굴러온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이야기꽃을 피웠다.

소소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에노모토는 전에 왔을 때 미하루가 보여줬던 편지지들이 떠올랐고 조심스레 편지를 보냈는지 물었다. 기다리던 주제가 에노모토의 입에서 나오자 미하루는 반쯤 남아있는 커피를 한 모금 크게 마시고 계획의 다음 단계를 진행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짧은 검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눈매가 나쁜 카자미라는 녹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찾아오면 분홍색 봉투를, 친구라던가 지인이라는 사람이 오면 노란색 봉투를 건네면 되는 건가요?”

“네, 건네주시고 남는 한쪽 봉투는 태워주세요. 그리고 만약에 2주가 지나도록 편지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2개 전부 태워주세요.”

 

미하루에게 건네받은 봉투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는 에노모토의 손길이 마치 백지수표라도 받은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구기지 않을 정도로만 다루면 될 텐데-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몸짓에 미하루는 그녀가 거절했을 때를 대비해 생각해둔 십여 가지가 넘는 화술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미하루씨.]

귀에 꽂아둔 이어폰으로 들리는 리츠의 목소리에 미하루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피하고 있는 사람이 올 시간이었다. 에노모토와의 수다를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그를 만난다면 지금까지 잘 진행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에 미하루는 남아있는 커피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야겠네요. 대화 즐거웠고 편지 부탁드릴게요.”

“네, 걱정 마세요.”

 

마지막까지 의욕이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그녀에게 미하루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

 

 

 

 

 

“카자미 경부보!”

 

맡고 있던 안건에 급한 불을 끈 카자미는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커피를 뽑으러 나왔지만 늘 이용하는 자판기에 매진 불이 들어와 있었다. 형사부 근처의 자판기에서 같은 커피가 있다는 걸 떠올렸지만 공안부와 형사부가사이가 매끄럽지 않다는 걸 알기에 포기했다. 공안부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카자미를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카자미의 머릿속에 의문의 물음표가 가득 찼다.

평소라면 무시하고도 남을 자신이었지만 요 몇 주간 편지를 주고받은 그녀가 떠올라 그를 무시하지 못한 카자미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는 뭔가 전달사항이 있다고 하기엔 두 손이 비어있었고, 그의 뒤를 따라 다가오는 사토 경부보의 대놓고 불편한 표정에 카자미는 더더욱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카기 순사부장, 무슨 볼 일이라도?”

“아, 부탁받은 게 있어서요.”

 

다카기가 맡아둔 물건이라며 정장 안쪽 주머니에서 꺼낸 건 손바닥에 딱 들어가는 사이즈의 아담한 봉투였다. 겉면에 쓰여 있는 春 한자에 저도 모르게 아- 소리를 냈다. 카자미의 반응에 다카기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면서 봉투를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봉투를 건넨 다카기의 환한 얼굴에서 물건을 맡긴 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쉰 카자미는 입안에 굴리던 말을 꺼냈다.

 

“…이것을 주면서 다른 말은 없었나요?”

“딱히…아!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근처에 집을 구해서 집들이하러 오라고 했어요.”

“그…렇군요. 일단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은 카자미는 다카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먼저 자리에서 벗어났다. 등 뒤에서 남아있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카자미는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안주머니에 넣었던 봉투를 꺼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포와로에 마지막 편지를 맡겨놨어. 유야가 직접 찾아갔으면 좋겠어.

p.s. 안 들키게 다녀오고 싶으면 XX일 X~X시 사이가 좋을 거야.]

 

인사말 없이 본론만 간략하게 적혀있는 편지의 내용을 시작하는 포와로라는 단어에 카자미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다른 장소도 아닌 그곳은 자신의 상사가 정보 수집을 위해 알바하고 있는 곳이며 특별한 일이 아니면 근처도 오지 말라고 못 박아둔 곳이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저 편지를 읽은 것뿐인데 벌써부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상사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기분이라 카자미는 어깨를 들썩였다. 차라리 상사인 그에게 부탁할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편지에 적혀있는 직접이라는 단어는 물론이고 상사에게 부가설명을 늘어놓을 생각을 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직접 다녀오자.’

 

그녀의 직업과 정보수집능력을 생각하면 추신에 적어놓은 시간은 아마 상사가 일하지 않는 시간대가 분명할 테니-

 

 

 

 

 

***

 

 

 

 

 

편지에 적힌 날짜와 시간에 맞춰 포와로를 찾아간 카자미는 상사는 물론이고 손님도 거의 없는 가게 안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알아낸 그녀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일단 평범한 회사원인척 포와로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종소리와 함께 직원의 인사 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혹시 카자미 씨인가요?”

“아, 네?”

“설명과 똑같네요! 부탁받은 물건이 있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카자미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노모토는 자기 할 말만 한 채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고 자신을 내버려 둔 채 진행되는 상황에 카자미는 며칠 전에 만난 다카기가 떠올랐다.

 

‘동생 다음으론 카페 직원에게까지 언질을 해둔 거야?’

 

카자미가 미하루의 교섭능력에 감탄하는 사이, 안쪽에 들어갔던 에노모토가 손에 분홍색 편지봉투를 쥔 채 돌아왔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라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편지봉투를 건네는 에노모토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카자미는 그냥 돌아가기 뭐해 급하게 커피한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주문한 커피를 받은 뒤 빠르게 가게를 나와 임시주차창에 세워둔 차로 돌아온 카자미는 홀더에 커피를 꽂고 받아온 편지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냈다.

 

[옛 연인인 카자미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말머리에 처음 편지를 봤을 때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손힘에 귀퉁이가 구겨진 편지는 사과로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본에 들어오고 나서 일에 복귀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길에서 자신을 발견해 평소의 수집능력으로 주소까지 알아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고 적혀있는 내용에 화가 나진 않았다.

 

[봉투에 카드 하나가 들어있을 거야. 그동안 나의 이기심에 어울려준 유야에게 주는 내 선물이야. 참고로 환불&거절은 안 됩니다.]

 

마지막까지 그녀다운 편지에 카자미는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남긴 선물을 확인하기 위해 봉투를 뒤집어 흔드니 손바닥 위로 카드가 떨어졌다. 도톰한 두께의 카드에는 어딘가를 나타내는 주소 한 줄과 비밀번호로 보이는 네 자리 숫자만 적혀있었다.

 

‘선물도 그냥 주지 않는구나.’

 

계획을 성공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을 미하루가 머릿속에 떠올라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입가의 미소를 눈치 채지 못한 채 카자미는 카드에 적힌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뒤, 차의 시동을 걸었다.

카드에 적힌 주소는 무인보관함의 위치였다. 카자미가 보관함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자 안에는 샛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A4 사이즈보다 약간 큰 서류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포와로에 스스로 갔다는 소리네. 칭찬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방위성 협력자가 생긴 것을 축하합니다! 안에 들어있는 봉투에 공안협력자 신청할 때 필요한 서류들을 작성해서 넣어놨어~.]

 

포스트잇의 내용을 읽자마자 당황한 손으로 봉투 안에 들어있는 서류들을 꺼내 훑어본 카자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위성이란 조직의 협력자를 가지는 건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지만 과거 자신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억지를 부리면서 뿌리쳤던 손을 다시 잡아야 될지 망설여진 카자미는 내용의 흠이라도 잡아보려고 했지만 준비된 서류는 당장이라도 승인도장이 찍힐 정도로 완벽했다.

 

“나이 앞 자릿수가 바뀌었는데도 그대로면 나 직진만 할 거니까.”

 

망설이는 자신을 잡는 것처럼 미하루의 말을 떠올린 카자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은 그녀를 이긴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단지 이 서류를 제출한 뒤, 자신을 쪼아올 상사를 생각하니 위가 약간 아파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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