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며칠인지 모를 철야를 하던 중, 수면실에서 짧은 수면을 취하고 돌아온 옆자리 동료가 카자미의 어깨를 두들겼다. 보고서 작성을 한참 진행하고 있던 카자미는 동료의 손길에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

카자미의 말에 어느새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 동료는 잘 다녀오라는 듯 손만 대충 휘저었다. 그런 동료를 뒤로 하고 카자미는 오랜만에 경시청 내 수면실이 아닌 집으로 향했다. 물론 맡고 있는 사건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그저 로커에 묵혀놨던 옷을 새로운 옷으로 바꾸기 위한 퇴근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고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던 카자미는 한동안 편지함을 확인 안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납부서가….’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보니 곧 있음 도착하겠지만, 어차피 늦은 시간에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편지함도 엘리베이터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카자미는 몸을 돌려 편지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확인하지 않았던 편지함을 열어보니 다행히 모 만화들처럼 내용물이 와르륵 떨어지는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신 카자미가 떠올렸던 납부서를 시작으로 온갖 전단지들이 편지함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직업상 문제로 나름 보안이 강한 맨션으로 이사한 건데 편지함을 차지한고 있는 전단지들을 보니 보안이 강해도 이것들은 막을 수 없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편지함을 가득 채웠기에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꺼내보니 내용물들은 일본인 평균키보다 큰 키만큼 커다란 카자미의 손에 넘칠 듯 말 듯 한 양이었다. 카자미는 종이꾸러미를 들지 않은 손으로 편지함을 닫고 1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주머니 안에 있는 열쇠를 찾다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꾸러미를 바닥에 흩뿌리는 해프닝이 일어날 뻔 했지만 다행히 종이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서자 현관 위 자동 등이 카자미를 반기듯 은은한 빛을 밝혔다. 구두를 벗고 거실로 이동하는데 현관 등을 제외하고 빛 하나 없는 집안은 포근한 봄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거실 테이블에 가지고 온 편지꾸러미와 휴대폰을 대충 내려놓고 카자미는 원래 목표였던 갈아입을 옷을 챙기기 위해 침실로 들어갔다.

 

 

 

 

 

 

 

 

[○○○○Letter]

Kazami Yuya x Takagi Miharu

 

 

 

 

 

 

 

 

갈아입을 옷을 쇼핑백에 챙기고 시간확인을 하기 위해 휴대폰 화면을 켜보니 언제 온지 모를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보통 급한 일이면 전화가 왔을 텐데 부재중 전화는 남아있지 않았기에 카자미는 큰 걱정 없이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문자 발송인은 아까 자리를 비운다고 말을 건넸던 동료로부터였다.

 

[내일 회의시간이 오후로 미뤄졌으니 집 간 김에 따뜻한 욕조에 몸 좀 담구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 좀 제대로 자고 와라.

P.S. 너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 일 효율이 달라지니까 걱정 말고.]

 

동료의 문자에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욕조…목욕이나 할까?’

경시청 내 샤워실을 이용하면서 청결을 유지했지만 그래봤자 샤워기에서 나오는 따듯한 물이 전부였기에 카자미는 동료의 말에 힘입어 보일러의 전원을 키고 욕실로 이동해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이 채워지는 동안 카자미는 어지럽게 펼쳐진 종이꾸러미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잡다한 것 사이에서 필요한 편지들을 골라내던 중, 쨍한 원색컬러로 가득한 전단지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파스텔톤 하늘색 편지봉투를 발견하고 순간 손이 멈췄다.

 

“유우야군에게!”

“편지?”

 

10년도 더 된 기억의 한 장면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위원회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생일선물의 일부라며 그녀가 건네줬던 편지도 이와 같은 파스텔톤의 하늘색 편지봉투였다.

“우연이겠지…?”

오랜만에 떠오른 추억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보낸 사람을 확인하던 카자미는 들고 있던 편지를 놓치고 말았다. 테이블에 떨어진 편지에는 이름과 주소대신 분홍펜으로 ‘春’ 한글자만 적혀있었다. 그저 단순한 한자였으면 놀라지 않았겠지만 한자 획 중 다섯 번째 획을 길게 빼서 쓰는 건 그녀가 자신에게만 쓰는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카자미의 머릿속에 제일먼저 떠오른 단어는 어떻게? 그 다음은 왜? 이었다. 그도 그럴게 카자미와 그녀는 헤어진 지 5년이 지나고 있었다. 연락처를 지운 것은 물론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가족들도 주소를 모르고 있으니 그녀가 카자미가 사는 곳을 알 리 없을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의심되는 물건은 가차없이 처리해야 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손은 자연스럽게 떨어진 편지봉투를 다시 주워 안에 들어있는 편지지를 꺼내 펼쳤다.

 

[유우야군에게]

편지에 적힌 익숙한 필체에 손에 힘이 들어가 편지 한쪽이 구겨지고 말았다.

 

[갑작스런 편지에 유우야군의 얼굴은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겠네요. 그 덕분에 유우야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한껏 올라가 다른 사람이 보면 굉장히 무서운 상태라고 생각해요. 맞나요?

또 편지봉투에 적혀있는 한자에 어떻게? 왜? 라고 생각하고 한참 고민하다가 편지를 펼쳐보고 익숙한 필체에 편지 한쪽을 구기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먼저 유우야군이 머릿속에 떠올린 질문에 먼저 대답해드릴게요.

1. 어떻게? 저에겐 아주 유능한 조력자가 있습니다.

2. 왜? 단순하게 우연히 당신을 봐서입니다.

왠지 대답을 들어도 의문이 해소가 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라는 생각에 골머리를 앓을까봐 미리 밝힙니다. 동생에게 건네줄 것이 있어 경시청에 갔다가 잠시 본 게 전부입니다.

서로를 위해서 헤어진 지 5년이 지났는데 이런 식으로 편지를 남기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점은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서론이 긴 이유는 사실 근황 같은걸 적고 싶었지만 저도 유우야군처럼 직업상의 문제로 적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적을 수 있는 건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정도네요.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이유는… 당신이 깜짝 놀랐으면 하는 바람과 절 기억하고 있을까 하는 약간의 기대 2가지 때문이네요.

별 게 없는 이유예요. 그러니 답장도 못하게 제 주소를 적지 않았습니다. 유우야군도 이 편지를 처분해도 괜찮아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요.

春]

 

욕조에 물이 다 찼다는 알림이 울릴 때까지 카자미는 손에 든 편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