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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소녀는 자주 나그네에게 자장가를 요구하게 되었다.

핑계는 다양했다. ‘혁이 만 불러 줄 수 있는 노래니까.’ ‘혁이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좋으니까.’ ‘지금 졸리니까.’ ‘노래 가사가 좋아서.’ 정말 별의별 이유로 자장가를 요구하는 소녀의 모습은 필사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맹렬했지만, 의외로 남자는 상대가 집요하게 부탁하는 것과는 대비되게 쉽게 요청을 들어주고는 했다.

 

“그 노래가 그렇게 좋으냐?”

“응!”

“그런가.”

 

소녀가 어리광을 부릴 때 마다, 남자는 항상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내어줄 뿐이었다. 왜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작은 머리통을 무릎위에 누이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그는 결코 싫다거나 지겹다는 기색을 내비칠 때가 없었지.

 

“질릴 때도 되었을 텐데 말이지.”

“안 질려. 우리 엄마나 할머니가 불러준 걸 더 많이 듣고 컸으니까.”

“하하,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슬슬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 나이도 아니지 않나?”

“확실히…, 난 다 크긴 했지만….”

“장난이네. 어른이라도 자장가를 듣고 싶을 수도 있지.”

 

‘메에.’ 양이 마치 그의 말에 동의하듯이 울어, 소녀는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맞다, 어른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응?”

“나, 내일 옆 마을에서 온 사람들 만나러 가. 나도 이제 시집 갈 때가 되었다고, 신랑 될 애랑 그 애의 엄마아빠가 온데.”

 

자장가를 시작하기 전, 들판을 뛰어다니느라 헝클어진 소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손을 멈추고 말았다.

잠깐의 정적. 바람이 흔들어 놓는 풀잎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요란하게 들릴 만큼의 고요함 속. 아이의 식견으로는 감히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유추할 수도 없는 표정으로 소녀를 내려다보던 나그네는, 이윽고 애처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축하하네.”

“…아직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렇지만, 웬만큼 큰 결함이 없는 한, 상견례를 할 정도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식을 올리겠지.”

“으음.”

 

그건 맞지만, 어째서일까. 남자의 말은 추측이 아니라 예언처럼 들릴 정도로 단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 어렸기에 제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무어라 정리해 말할 수 없던 소녀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양 손을 가지런히 제 배 위에 포개어 올리며 잠들 준비를 할 뿐이었다.

 

“아가.”

“응. 혁아.”

“…전에 물어봤었지. 이 자장가를 누구에게 들었냐고.”

 

아아. 드디어 말해주는 건가. 남자의 눈치만 보던 소녀는 반가운 주제에 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그 빛나는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고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에, 내가 자네만큼 어렸을 때…. 친구에게서 들었네.”

“친구?”

“그래. 친구.”

 

기분 탓일까. 어쩐지, 나그네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느껴진다. 아니,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이 낮은 목소리는, 평소의 상냥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와는 다른 이 목소리는.

 

“…혁아?”

“왜.”

 

확실하다. 노래를 부를 때만 나오는 그 목소리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 음색에 잠깐 말문이 막힌 소녀는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어떤 친구였어, 그, 자장가 불러준 친구….”

“그게 그렇게 궁금해?”

“으음….”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만 같은 차가운 말투에 소녀는 절로 위축되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그네는 그 이상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아.’ 긴 한숨을 내뱉고 마른세수를 한 남자는, 마른 입술을 매만지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랑 닮았어.”

“응?”

“…너랑 닮았었어. 정확하게는, 네가 그 녀석을 닮은 거지만. 그 녀석이 훨씬 먼저 태어났으니.”

 

이건 그 ‘자장가를 불러준 친구’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까는 싫어하는 것 같아서, 더 묻지 않으려 했는데.

도무지 속을 할 수 없는 상대의 반응에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속에 있는 말을 토해내는 남자에게 귀를 열어주는 것뿐이었다.

 

“너처럼 대책 없이 상냥하고, 잘 웃고,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고…. 그런 계집애였어.”

“여자애였어요?”

“그래.”

 

마른얼굴을 매만지던 남자의 손이, 이내 아래로 내려와 빛나는 눈가를 덮는다. 두꺼운 장갑 너머 희미한 떨림이 느껴지는 손은 소녀의 두 눈을 가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눈…. 정말로 똑같아. 너는 그 녀석이랑 많이 닮았어. 그 새까만 눈이, 정말로.”

 

시야가 어두워지자, 기다렸다는 듯 잠이 몰려온다. 자장가도 듣지 않았는데 온 몸에 퍼지는 노곤함에 스르륵 눈을 감은 소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무의식의 세계로 가라앉았다.

 

 

❋ ❋ ❋

 

 

“…어?”

 

소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노을도 져버린 초저녁이었다.

아아, 안 된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부모님도 걱정할 것이고, 이런 어둠 속에서는 양을 제대로 돌보기도 힘들어진다.

 

“혁아!”

 

마음이 급해진 소녀는 지팡이를 집어 들고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혁아?”

 

분명 아까 전까지는 이 곳에 있었던 그가, 어디로 간 걸까. 그는 절대 제가 자고 있는 사이 훌쩍 사라지는 일이 없었는데. 언제나 제가 깰 때 까지 기다렸다가, ‘내일도 보자’는 작별 인사와 함께 사라지던 이었는데.

 

“…….”

 

어쩐지. 더 이상, 그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확신한 소녀는, 지팡이를 안고 소리죽여 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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