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는 이 별에서 가장 이질적이고도 강한 생물체였다.
먼 옛날, 이제는 더는 돌아갈 수 없는 행성에서 네 명의 동족들과 함께 이 별에 온 그는 불과 천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를 몰래 조종하고 있던 제 동족을 제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과거가 있었다. 나그네는 자신의 영혼을 쪼개고, 이 지구의 생명체인 척까지 하며 억 단위의 시간 동안 수많은 계획을 진행 시켰고, 이윽고 동족의 손에서부터 낯선 행성을 구해낸 구세주가 되었다.
‘이제 다 끝났군.’
자신과 같은 이방인은 이제 이 별에 없다. 여와는 제 손으로 소멸시켜 버렸고, 나머지 셋은 먼 옛날 지구와 하나가 되어 실체 없는 영혼만 자연에 남아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처음 살아남았을 때, 동료들과 만나기 위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나그네, 그러니까, ‘복희’는 결국 땅과 바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건 제가 해방해 주었던 인류에게 미련이 남았다던가, 선인계와 신계에 용무가 있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 별의 모든 것들에 제 손길이 닿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래. 적어도 ‘태공망’ 쪽은 그리 생각했다.
“…지독한 더위군.”
아련한 꿈으로 일렁이던 낮잠에서 깨어난 나그네는 목적지도 없으면서 정처 없이 산을 헤매었다. 마치 꿈에서 나왔던 그리운 얼굴을 잊기 위해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는 듯,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는 초여름의 더위라곤 생각되지 않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긴 천이 늘어진 머리덮개를 벗어버렸다.
“그냥 나무 밑에 누워있을 걸 그랬나. 하….”
허탈하게 웃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땀에 젖은 표정은 불쾌함과 초조함이 가득했다. 마치 두 명의 사람이 한 몸에 공존하는 것 같이 괴리감이 있는 모습. 아니, 그건 ‘마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나그네의 안에는,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두 인격이 하나이자 둘인 듯 뒤엉켜 공존하고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땀을 대충 훔치던 나그네는 짧게 혀를 차더니 커다란 바위 그늘에 앉아버렸다.
한심하기도 하지. 제 반쪽이 비난해도 어쩔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왕천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실없는 웃음을 흘리다가, 돌연 정색해 버렸다.
복희가 이 땅에 남아있게 된 것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제 미련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며, 그건 썩 유쾌한 진실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 여자를 이용했다. 제 사정도 모르면서, 모두에게 외면받는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이유로 곁을 지킨 담운의 심신을 이용했고, 결국은 그 목숨까지 앗아갔다. 그 사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토록 미련이 남는 이유는 간단했지.
자신은 그 여자를 좋아했다. 조금 낯간지럽고 징그럽게 표현하자면, 아마 사랑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떻게든 제 곁을 지켜주는, 의심할 여지가 생기지 않게 꾸준한 애정을 주는 그 계집애가 좋았다. 봉신계획을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했던 제 손에 쥐어진 유일한 것. 그걸 꽉 쥐고 있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미련이 남은 것이겠지. 아니면, 진부하기 짝이 없게도 그냥 제가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걸지도 몰랐다. 이왕이면,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네주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하.”
본인을 직접 만나러 갈 염치 같은 건 없다. 애초에, 제가 찾아가기만 해도 담운은 그 자체로도 모든 걸 괜찮다고 넘길 테니까 찾아갔다가는 모든 게 옛날처럼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제 일이라면 뭐든 굽히고 들어가는 담운이니, 찾아가서 사과는커녕 욕을 한다고 해도 ‘다 자신이 못나 그런 것’이라며 수긍하고 만나러 와준 자체에 기뻐하겠지.
왕천군은 그게 싫어서,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결국 담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렇게 떠나려는 제게 태공망이 열심히 조언해 주어도 그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가 제 영혼의 반쪽이라도 해도, 결국 이것은 자신과 담운의 문제였으니 말이다.
우습기도 하지. 그렇게 도망쳤으면 미련이라도 없을 것이지, 마음은 여전히 거기 있어서 이런 한심한 짓이나 하고.
더는 아프지도 않은 자학을 한 그는 그렇게 태공망을 앞에 세우고 무의식의 저 너머로 도망치려고 눈을 감았다.
‘자네 정말 이럴 건가?’
아아. 또 왜 저러는가.
왕천군은 갑자기 자신을 잡는 목소리에 화가 나 결국 도로 눈을 떴다.
‘오늘따라 참견이 심하군. 태공망.’
‘그러는 자네도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인다만? 벌써 8번째지 않나. 익숙해질 만도 할 텐데?’
‘할 말이 있다면 재수 없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렇게 힘들어할 거라면, 계속 닮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 말고 당사자를 만나서 한번 힘든 게 이득이 아닐까, 하는….’
‘작작 해라, 그 이야기.’
원래도 자신과 담운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게 싫긴 하지만, 지금은 그걸 떠나 그냥 이 문제에 대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정말 많이 지쳤으니까. 잔소리를 할 거라면 적어도 내일 해주었으면 싶었을 뿐이었지. 내일이면 그와 꼭 닮은 양치기 소녀에 대한 것도 조금은 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무얼 보아도 그가 생각나는 이 불치병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으니까.
‘난 잘 거다. 찾지 마라. 어디 가서 복숭아라도 주워 먹고 있던가.’
‘자네는 내가 무슨 방목하는 양인 줄 아나?!’
‘그건 양에게 모독적인 언사 같다만. 양에게 사과해라.’
‘…자네란 자는 정말….’
머릿속으로 열심히 떠들던 목소리 중, 한숨을 내뱉는 것은 태공망의 음성이었다.
길고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든 나그네는 땀으로 젖은 머리를 정리하면서, 콧노래로 언제나 부르던 자장가를 불렀다. 마치 자신을 놀린 또 다른 인격을 놀리기라도 하려는 듯, 정성스럽고도 큰 소리로 말이다.
“흠흠….”
‘하지 마라.’ 희미하게 왕천군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지만, 태공망은 그만두지 않는다. 적어도 완창은 하고 멈추겠다는 듯, 열심히 흥얼거리던 그는 머리덮개에 묻은 나뭇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산 중턱에 계속 있어도 소용이 없다. 어차피 갈 곳도 없긴 하지만, 산은 넘어가고 나서 생각하자.
콧노래를 부르면서도 나름의 계획은 다 생각한 나그네는 그대로 길을 떠나려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숨길 수 없는 기척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멈춰 섰다.
“…?”
들짐승은 아니다. 그런 것이었다면 애초에 이상함을 느끼지도 않았겠지. 점점 가까워져 오는 이 기는, 분명 선도의 기운이 깃든 기척이었다.
아직 선인계로 가지 못한 요괴선인인가. 아니면, 파문당한 도사인가. 어느 쪽이라도 제게 적대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그는, 이내 상대가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져 모습을 확인하게 되자… 그대로 맥이 풀리고 말았다.
“아….”
발소리도 거의 내지 않고 다가온 작은 그림자는, 그리운 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나그네는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가서는 여자가 환각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하기 힘든지,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삼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 있을 리 없다. 그는, 담운은 신계에 있어야 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누구인가. 혹, 제가 떠나보낸 그와 닮은 소녀 중 하나가 장성하여 돌아온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역시 원본과 지나치게 닮아서….
“…혁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나그네는 확신했다. 어떻게 여기 있는지는 도무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고 있는 것은 분명 담운 본인이라는 것을. 그 표정, 어조,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듣자마자 기억나는 음색까지.
갑자기 들이닥친 재회에 입이 얼어버린 그는 ‘태공망’으로서 무슨 말이든 꺼내려 하다가, 돌연 목소리가 바뀌고 말았다.
“너….”
불분명한 부름은 누굴 부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담운을 부른 걸지도 모르고, 갑자기 몸의 주도권을 줘버린 영혼의 반쪽을 부르는 걸지도 몰랐지.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나그네는 그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는 듯. 입술만 뻐끔거리며.
“저, 괜찮아? 더워 보여.”
침묵하는 자신을 살펴보던 담운은 땀이 흐르는 제 얼굴을 손등으로 훔치려 들었다. 복희는, 아니, 왕천군은 그 손짓에 퍼뜩 정신이 들어 손끝이 제 피부에 닿기도 전에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채었다.
“왜, 여기 있어?”
분명 제가 해야 할 말은 이게 아닐 터다. 그건 잘 알고 있었지만, 왕천군은 대뜸 그것부터 물어왔다. 마치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상대가 책망하기 전 변명을 찾기 위해 탐색전을 하듯, 방어적인 모양새로 말이다.
“인간계에 볼일이 있어 잠깐 내려왔다가, 신공표 씨가 네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셔서….”
“뭐?”
“그래서…, 그, 미안해. 보고 싶어서 왔어.”
신공표가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괴짜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담운이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제가 뒷걸음쳐온 세월이 너무 길었기에.
제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너무 지그시 바라봤기 때문일까. 손목을 잡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담운은 고개를 숙여버렸다.
“미안해. 역시 그냥 갈게.”
“어디 가?”
“어?”
“…내가, 언제, 가라고…. 젠장.”
급한 마음에 붙잡긴 했지만, 역시 아무 말도 나오질 않는다. 스스로가 답답하고 짜증이 나게 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왕천군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아주 스스로 머리를 갈겨버리려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태공망은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아, 정말이지!”
더는 참지 않겠다는 듯 외친 태공망은, 복희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서로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했다.
담운의 손목을 잡은 왕천군을 내버려 둔 채 저 멀리 물러선 태공망은 멀뚱멀뚱 서 있는 한 쌍을 향해 삿대질하며 마음속에만 담아둔 말을 퍼부었다.
“담운! 저 녀석은 말일세, 자네를 아주 보고 싶어 했으니 가지 않아도 되네! 그리고 왕천군! 나는 둘이서 잘 해결 볼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게! 자네가 내 복숭아 투어를 못 견딘 이상으로, 나도 이제 자네의 미련을 못 견디겠으니! 그럼, 이만!”
담운에게만 손 인사를 한 태공망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쏜살같이 시야 밖으로 달아나 버린다. ‘나 없인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웃기고 있네.’ 부랴부랴 뛰어가는 뒷모습을 향해 중얼거린 왕천군은 한동안 태공망의 뒤만 바라보나 싶더니, 이내 움켜쥔 손목을 놓아주며 고개를 돌렸다.
“진심이냐.”
“…뭐가?”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잖아.”
“응….”
그래.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어차피 거짓말을 해도 티가 다 나는 올곧은 녀석이니, 이런 질문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럼, 이제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명석한 머리로도 답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때, 이번에는 담운 쪽에서 질문해왔다.
“그, 태공망이 한 말…. 정말이야?”
“…그래.”
“…그렇구나….”
상대도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 기쁜지, 담운은 그제야 웃어 보였다.
아아. 이렇게 웃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본다. 왕천군은 그 귀한 미소에 목이 타올라서, 입안에 열기를 뱉어내듯 말을 이어갔다.
“겨우 그런 거에 웃기나 하고. 넌 알다가도 모르겠어.”
“겨우, 라니. 그렇지 않아. 나에겐 아주 기쁜 일이야. 나를… 미워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널 미워할 이유가 있다면,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점 정도뿐이야.”
“…….”
“…뭐, 그건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진짜 멍청하게 군 건 본인임을 알고 있기에, 왕천군은 그리 덧붙이고 마른세수를 했다.
겨우 이 정도 사실에도 웃어줄 걸 알았다면, 자신은 천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그를 찾아갈 수 있었을까.
타고난 머리를 써서 뒤에서 암약하는 것도, 본모습으로 돌아가 행성 하나를 동족의 손아귀에서 구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자신이었지만, 이 여자를 다시 웃게 만드는 건 할 수 없을 것 같아 돌아가지 못했던 건데. 자신과 같이 있으면 도무지 웃질 않았던 것만 떠올라, 그래서 돌아가지 못했던 건데.
“앞으로….”
지금 당장 이 모든 걸 정리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제 머리와 마음도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느긋이 앉아 이야기하기엔 인간계는 썩 좋은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은 몰라도, 잠깐 볼일이 있어 내려온 담운은 신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는 우선 이렇게 말했다.
“찾아가도 되냐. 너한테.”
“…신계로?”
“어디든. 신계에 있을 때나, 인간계로 내려왔을 때나. 언제든.”
만약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절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저지른 게 많은 몸이니, 당연히 이해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한 왕천군이었지만, 담운은 그 어느 때 보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응. 기다릴게.”
“…하.”
설마 했지만, 이토록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다니. 역시 걱정한 자신만 바보 같다.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진 왕천군은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슬쩍 담운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거면 됐어.”
정말로. 그거면 됐다. 나그네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