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아무렇지도 않게 깔려있습니다. 네타바레 주의.
* 원작의 엔딩 후, 조금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얘, 아가.”
그 남자는 어느 날 홀연히 소녀 앞에 나타났다.
어느 민족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독특한 복장. 발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걸음걸이. 다정하지만 울림이 좋은 목소리 까지. 남자는 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만큼 대단히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이 들판에서 그를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은 소녀와 수 십 마리의 양떼 들 뿐이었다.
“그래. 자네 말이야. 양을 치고 있느냐?”
“…누구세요?”
“그냥, 지나가던 나그네지.”
제가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라지만, 이렇게 생긴 나그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낯선 행색의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본 소녀는 제 앞까지 다가온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말투는 노인네 같은데, 생긴 건 제 아버지보다도 젊어 보인다. 하긴, 목소리가 청년의 것이었으니 이건 당연할까.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참으로 아름답고 기괴한 나그네였다.
“어린데도 혼자서, 장하구나.”
온화하게 웃은 나그네는 제게 다가온 양을 쓰다듬어 주더니 곧바로 소녀의 옆에 앉았다.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걸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소녀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인 얼굴로 기웃거리다가, 슬쩍 물어왔다.
“저, 무슨 일이세요?”
“음?”
“아니, 왜 제 옆에 앉으시나 싶어서요.”
“혼자서 일하는 게 힘들고 심심해 보여서 도와주려고 했지. 왜, 부담스럽나?”
부담스럽지는 않다. 소녀는 사회적 체면을 차리기에는 아직 어렸으니까. 사춘기도 오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일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수상하기 이전에 고마울 뿐이었지. 게다가, 좀 수상해 보이는 행색을 하고 있긴 했어도 나그네는 소녀의 마음을 쉽게 열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정말 도와주는 거예요? 양치는 거, 보통 일이 아니라고요.”
“어허. 나를 어찌 보고. 내가 한때는 마을 양을 다 몰고 다녔는데.”
소리죽여 웃은 나그네는 소녀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넘겨받더니 저 멀리 풀을 뜯으러 간 양들에게 다가갔다. ‘워어, 워.’ ‘이 녀석들. 너무 멀리 가면 늑대가 잡아간다.’ ‘옳지, 이리 온.’ 몇 마디 말과 손짓만으로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양들을 불러 모은 그는, 불과 몇 분 만에 소녀에게 돌아와 지팡이를 돌려주었다.
“자. 슬슬 해가 질 때니 돌아가야 되지 않느냐?”
“…어떻게 하신 거예요?”
“다 노하우가 있지. 하하.”
얼굴을 덮는 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이 아름답게 웃고 있다. ‘혹시 이 남자가 어머니가 말하던 설화 속의 도사라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의 것이라곤 생각 할 수 없는 남자의 분위기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소녀는 지팡이를 끌어안고 돌아섰다.
“조심해서 들어가거라.”
“…배웅은 안 해주세요?”
“집 정도는 혼자 가야지. 나도 갈 곳이 있거든.”
확실히 집도 못 찾아 갈 정도로 어린아이인 것은 아니지만, 뒤에 붙은 말이 좀 신경 쓰인다. 양떼를 이끌고 돌아가려던 소녀는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있는 나그네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세요? 이런 밤에 움직이면 위험해요. 우리 마을에서 자고 가세요.”
“상냥하구나. 역시.”
“…?”
역시, 라니. 무엇이 ‘역시’라는 것인가. 자신과 이 나그네는 초면인데, 대화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위화감을 느낀 소녀가 입을 다물자, 나그네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마치, 자신은 별로 수상한 말은 하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 말거라. 내일도 여기에 올 게지? 내일 보자꾸나.”
“나그네 님은 어디 안 가세요?”
“음. 당분간은 이 근처에서 머무를 예정이라.”
이 근처에 있는 마을은 제가 살고 있는 곳 밖에 없다. 이웃촌락은 반나절은 걸어야 도착하는데, 이 근처 어디에서 머무르겠다는 것인가.
역시 이 나그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소녀는 그늘에 가려진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가, 나그네의 등 뒤로 저물어가는 태양의 붉은 빛이 눈이 부셔 눈을 찌푸렸다.
“얼른 가야지, 아가.”
“…나그네 님도, 그, 내일 봐요.”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필요 없다네. 나그네 님은 무슨.”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건 정말 별거 아닌 질문이었을 텐데, 나그네는 입을 다문 채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혹 이름을 알리면 안 되는 입장이라도 되는 것인가. 돌부처처럼 가만히 서서 앓는 소리를 내던 그는,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혁.”
“응?”
“혁이라고, 그렇게 부르면 돼.”
‘네겐 그렇게 불리고 싶어.’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 나그네가, 붉게 타오르는 언덕 너머로 사라져갔다.
❋ ❋ ❋
자신을 ‘혁’이라 칭한 그 나그네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소녀목동을 찾아왔다.
나그네가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혼자서는 돌보기 힘든 양떼를 같이 관리해 주거나, 맹수가 나타나면 쫓아내 주는 것.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소녀에게는 힘들 목동 일을 함께 해주는 것이 그의 일과의 대부분이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아가, 이리 오거라. 쯧, 머리가 헝클어져서 엉망이 됐구먼.”
다정한 그는 언제나 아버지처럼, 오라비처럼, 혹은 친구처럼 소녀를 돌봐주곤 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며 머리카락을 묶어줄 때도 있었고, 배를 곯고 온 날에는 어딘가에서 과일을 구해와 먹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조건 없는 보살핌. 이유 모를 호의에 당황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일 뿐.
언젠가부터 소녀는 그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한 줌 만큼 남아있던 경계심도 금방 거두어버리고 말았다.
“나 궁금했는데, 혁이는 어떻게 그렇게 머리를 잘 땋아?”
이제는 말을 놓은 쪽이 편해질 정도로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지만, 소녀는 아직 나그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어디서 왔는지, 도대체 어디에서 머물고 있는지, 자신과 만나지 않을 때는 무얼 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것은 산더미만큼 있었지만, 그런 걸 물어볼 때 마다 남자는 늘 말을 흐릴 뿐 제대로 답해주진 않았다.
“그냥 여러 번 하다 보니 익숙해 진 거지, 별거 없다네.”
“여러 번? 얼마나 많이?”
“글쎄다. 세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구먼.”
‘자, 됐다.’ 제가 땋아준 머리를 잘 정리해 준 남자는 손을 털고는 도로 장갑을 꼈다.
“혁이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별로 없는 거 같아.”
“하하. 워낙 세월에 흐름에 관심이 없다보니 이리 됐구먼. 자네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걸세.”
“아닌 거 같은데….”
제 마을의 어른들은 모두 계산과 관련된 것에는 철저한 면이 있었다. 며칠 뒤에 무엇을 수확해야 하는지, 작년 겨울에는 언제 쯤 성애가 내렸는지, 올해는 양이 몇 마리나 줄었는지. 모두 그런 것만은 잘 기억했는데, 저 핑계를 어떻게 믿겠나? 물론 자신의 할머니는 ‘너무 오래전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봐도 나그네는 제 할머니 보다는 젊어보였다.
“혹시, 혁이는 도사야?”
“응?”
“옛날에 엄마한테 들은 적 있어.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먼 옛날에는 늙지 않고 특별한 술법을 쓰는 도사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흐음.”
미지근한 반응을 한 나그네는 자신이 묶어준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다가 능숙하게 말을 돌려버렸다.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졸음이 오나 보구먼. 오늘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조금 자고 일어나는 건 어떻겠나?”
“칫, 또 그렇게 말 돌리고….”
“하지만 정말로 졸려 보여서 권한 것인데. 아닌가?”
‘전혀 아니야’ 그렇게 답하려 했던 소녀는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 져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신기하기도 하지. 분명 아까 전까지는 전혀 피곤하지도 졸리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팔다리가 무거울 정도로 나른해져서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이야기 보다는…, 자장가 불러줘.”
“자장가라. 노래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만.”
“우리 아빠보단 잘 부를 거 같으니까, 괜찮아.”
“하하, 그런가?”
제게 기대오는 소녀를 무릎에 눕힌 남자는 어깨를 토닥이며 숨을 골랐다.
그냥 자장가일 뿐인데 뭘 저렇게 까지. 생각보다 비장한 상대의 태도에 소녀는 웃어버렸지만, 그 웃음은 남자의 노래를 듣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아….”
처음 들어보는 잔잔한 리듬, 평소와는 조금 다른 차분한 목소리, 서정적인 가사. 평소 조금 능청맞은 그의 성격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자장가에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소녀가,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물었다.
“…혁아.”
자신은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이거늘, 남자는 무엇에 그리 놀란 것인지 노래도 멈추고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노래만 멈춘 것이 아니었다. 어깨를 두드리던 손도, 호흡도, 모든 게 멈춰서… 꼭 인형마냥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지.
“…왜?”
겨우 입을 연 목소리가 어쩐지 이상했다. 평소 늘 듣던 그의 목소리보다 조금 더 낮다고 할까. 아니, 아예 음색 자체가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도. 하지만 어린 소녀는 그 차이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제 할 말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나, 이런 자장가는 처음 들어봐. 우리 엄마가 불러 주는 거랑도, 할머니가 불러 주는 거랑도 전혀 달라….”
도대체 얼마나 먼 곳에서 온 걸까. 이 근방에서 내려오는 자장가는 다 한 번 씩 들어본 소녀는 문득 남자가 저 멀리 그가 온 곳으로 떠나가 버릴까봐 두려워 져 움직임을 멈춘 손을 마주잡았다.
“노래 좋아….”
“그러냐.”
“…혁이도, 이 자장가, 엄마한테서 들은 거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요령 좋게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거겠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녀는 팔에 힘이 빠져 남자의 손을 놓아버렸지만, 이번에는 남자 쪽에서 먼저 손을 마주해 왔다.
“아니.”
그러면 누구에게서 들은 거야?
단호한 남자의 대답에 그렇게 물으려던 소녀는, 그대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무엇이 그리 답답한지 빈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그는 다시 자장가를 불렀다.
소녀가 깊게 잠들 때 까지. 주변의 양들이 풀로 배를 채우고 드러누울 때 까지. 계속해서. 계속해서. 몇 번이고….